보랏빛 바다에서 들은 소리
아들이 추천해 준 스페인의 라벤더 마을, 브리우에가
아들이 추천해 준 스페인의 라벤더 마을, 브리우에가
라벤더 하면 늘 프랑스 프로방스의 발랑솔만 떠올렸다. 그런데 스페인에 머무는 동안 아들은 부모님이 귀국하기 전에 꼭 함께 가 보라며 한 곳을 추천했다. 라벤더를 좋아하는 엄마에게 선물 같은 장소일 거라면서.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작은 마을, 브리우에가였다.
예년 같으면 7월 초는 아직 꽃이 절정을 이루기 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올해는 유럽을 덮친 이른 폭염 탓에 개화 시기가 앞당겨졌다. 라벤더 축제는 아직 다음 주에 시작하는데, 꽃은 이미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맞고 있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차를 타고 브리우에가에 가까워질수록 군데군데 보랏빛 라벤더밭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생각보다 밭의 규모가 크지 않아 조금은 아쉬웠다. 밭들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면 얼마나 장관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가장 큰 라벤더밭에 도착하는 순간, 그 아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
눈앞에 펼쳐진 브리우에가의 고원은 지독하리만치 고요한 보랏빛 바다였다. 지평선 끝까지 이어지는 보라색 물결은 마치 시간이 멈춘 채 세상이 숨을 죽이고 있는 풍경 같았다.
그러나 그 꽃밭 속으로 한 걸음 들어서는 순간, 모든 감각이 뒤집힌다.
눈이 보여 준 침묵을 가장 먼저 깨뜨린 것은 수만 마리 벌들이 만들어 내는 거대한 윙윙거림이었다. 처음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벌들이 만들어 내는 그 소리에 잠시 압도되었다. 혹시 벌에 쏘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스쳐 갔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벌들의 윙윙거림만 남고 자동차 소리도, 사람들의 말소리도 어느새 의식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 순간 꽃밭은 더 이상 조용한 풍경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생명의 현장이었다.
그 소리는 단순한 날갯짓이 아니었다. 척박한 석회암 고원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존재들의 숨결이었고, 대지가 연주하는 생존의 리듬이었다.
사실 이 강인한 생명의 땅은 원래 보랏빛과는 거리가 멀었다. 1710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이곳에서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과 영국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200여 년 뒤에는 스페인 내전의 격전지가 되면서 또 한 번 깊은 상처를 입었다. 지금은 향기가 흐르는 이 고원도 한때는 피와 화약 냄새가 가시지 않던 전장이었다.
이 땅의 운명을 바꾼 사람은 1960년대 브리우에가의 교사였던 알바로 마요랄(Álvaro Mayoral)이었다. 그는 프랑스 프로방스를 여행하다 라벤더밭을 본 뒤, 고향의 기후와 석회질 토양이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귀향한 그는 조카들과 함께 라벤더를 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회의적인 시선도 많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 작은 도전은 결국 전장의 기억을 향기의 기억으로 바꾸었고, 브리우에가는 오늘날 세계적인 라벤더 산지가 되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보랏빛 바다가 엄밀히 말해 '오리지널 라벤더'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곳을 뒤덮고 있는 꽃은 트루 라벤더와 스파이크 라벤더를 교배한 하이브리드 품종, 라반딘이다.
트루 라벤더보다 향이 더 강하고 수확량도 많으며 무엇보다 척박한 스페인 고원의 환경을 잘 견딘다. 캄퍼(camphor) 성분이 풍부해 향은 한층 선명하고 강렬하다. 평화로운 꽃밭이라고만 생각했던 내 눈앞의 풍경 뒤에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만의 향을 벼려 낸 식물의 치열한 생존 전략이 숨어 있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그 풍경을 영상으로 담아 본다. 화면 속에서는 보랏빛 꽃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그 사이를 벌들이 쉼 없이 오간다. 영상에는 풍경보다 소리가 먼저 담긴다.
신기하게도 그 거대한 윙윙거림은 오히려 세상의 다른 소음을 모두 지워 버린다. 마치 거대한 백색 소음처럼 마음을 감싸 안으며 가장 시끄러운 공간에서 가장 깊은 침묵을 선물한다.
고원을 둘러보면 브리우에가를 중심으로 오래된 성벽과 허물어진 요새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카스티야라는 이름이 '성이 많은 땅'이라는 뜻을 품고 있듯 이 지역은 오랫동안 국경과 영토를 둘러싼 분쟁의 최전선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돌을 쌓아 성을 만들었고, 그 두꺼운 성벽 안에서 두려움을 견뎌야 했다.
예년 같으면 7월 초는 아직 꽃이 절정을 이루기 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올해는 유럽을 덮친 이른 폭염 탓에 개화 시기가 앞당겨졌다. 라벤더 축제는 아직 다음 주에 시작하는데, 꽃은 이미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맞고 있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차를 타고 브리우에가에 가까워질수록 군데군데 보랏빛 라벤더밭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생각보다 밭의 규모가 크지 않아 조금은 아쉬웠다. 밭들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면 얼마나 장관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가장 큰 라벤더밭에 도착하는 순간, 그 아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
눈앞에 펼쳐진 브리우에가의 고원은 지독하리만치 고요한 보랏빛 바다였다. 지평선 끝까지 이어지는 보라색 물결은 마치 시간이 멈춘 채 세상이 숨을 죽이고 있는 풍경 같았다.
그러나 그 꽃밭 속으로 한 걸음 들어서는 순간, 모든 감각이 뒤집힌다.
눈이 보여 준 침묵을 가장 먼저 깨뜨린 것은 수만 마리 벌들이 만들어 내는 거대한 윙윙거림이었다. 처음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벌들이 만들어 내는 그 소리에 잠시 압도되었다. 혹시 벌에 쏘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스쳐 갔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벌들의 윙윙거림만 남고 자동차 소리도, 사람들의 말소리도 어느새 의식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 순간 꽃밭은 더 이상 조용한 풍경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생명의 현장이었다.
그 소리는 단순한 날갯짓이 아니었다. 척박한 석회암 고원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존재들의 숨결이었고, 대지가 연주하는 생존의 리듬이었다.
사실 이 강인한 생명의 땅은 원래 보랏빛과는 거리가 멀었다. 1710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이곳에서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과 영국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200여 년 뒤에는 스페인 내전의 격전지가 되면서 또 한 번 깊은 상처를 입었다. 지금은 향기가 흐르는 이 고원도 한때는 피와 화약 냄새가 가시지 않던 전장이었다.
이 땅의 운명을 바꾼 사람은 1960년대 브리우에가의 교사였던 알바로 마요랄(Álvaro Mayoral)이었다. 그는 프랑스 프로방스를 여행하다 라벤더밭을 본 뒤, 고향의 기후와 석회질 토양이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귀향한 그는 조카들과 함께 라벤더를 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회의적인 시선도 많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 작은 도전은 결국 전장의 기억을 향기의 기억으로 바꾸었고, 브리우에가는 오늘날 세계적인 라벤더 산지가 되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보랏빛 바다가 엄밀히 말해 '오리지널 라벤더'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곳을 뒤덮고 있는 꽃은 트루 라벤더와 스파이크 라벤더를 교배한 하이브리드 품종, 라반딘이다.
트루 라벤더보다 향이 더 강하고 수확량도 많으며 무엇보다 척박한 스페인 고원의 환경을 잘 견딘다. 캄퍼(camphor) 성분이 풍부해 향은 한층 선명하고 강렬하다. 평화로운 꽃밭이라고만 생각했던 내 눈앞의 풍경 뒤에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만의 향을 벼려 낸 식물의 치열한 생존 전략이 숨어 있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그 풍경을 영상으로 담아 본다. 화면 속에서는 보랏빛 꽃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그 사이를 벌들이 쉼 없이 오간다. 영상에는 풍경보다 소리가 먼저 담긴다.
신기하게도 그 거대한 윙윙거림은 오히려 세상의 다른 소음을 모두 지워 버린다. 마치 거대한 백색 소음처럼 마음을 감싸 안으며 가장 시끄러운 공간에서 가장 깊은 침묵을 선물한다.
고원을 둘러보면 브리우에가를 중심으로 오래된 성벽과 허물어진 요새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카스티야라는 이름이 '성이 많은 땅'이라는 뜻을 품고 있듯 이 지역은 오랫동안 국경과 영토를 둘러싼 분쟁의 최전선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돌을 쌓아 성을 만들었고, 그 두꺼운 성벽 안에서 두려움을 견뎌야 했다.
1937년 스페인 내전 당시 이곳은 다시 한번 격전지가 되었다. 이탈리아군과 공화국군이 맞붙으며 비명과 포성이 고원을 뒤덮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증오의 소음이 가장 크게 울려 퍼졌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화약 냄새가 스며 있던 땅에는 라반딘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붉은 피를 머금었던 대지는 어느새 보랏빛 향기로 뒤덮였고, 상처의 기억 위에는 새로운 생명이 자라났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화약 냄새가 스며 있던 땅에는 라반딘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붉은 피를 머금었던 대지는 어느새 보랏빛 향기로 뒤덮였고, 상처의 기억 위에는 새로운 생명이 자라났다.
아직 축제는 시작 전이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어 브리우에가 시내에는 축제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다시 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인간이 돌로 쌓은 성은 세월 앞에서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그러나 자연이 만들어 낸 이 보랏빛 요새는 매년 여름이면 다시 살아난다. 전쟁의 소음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생명을 이어 가려는 존재들의 윙윙거림은 지금도 이 고원을 가득 메운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가끔 그날 찍어 온 영상을 다시 재생해 본다. 영상은 풍경보다 먼저 그날의 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벌들의 윙윙거림이다.
그때마다 아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벌에 쏘이면 어떡해.”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봉침이 몸에 좋다잖아.”
그 말을 듣고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사실 처음에는 나도 벌들이 조금은 무서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 윙윙거림은 소음이 아니라 생명의 리듬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브리우에가의 바람과 향기, 그리고 보랏빛 고원 위를 가득 메우던 생명의 움직임이 다시 눈앞에 펼쳐진다.
그 영상을 볼 때마다 문득 깨닫는다.
인간은 돌로 성을 쌓았고, 자연은 생명으로 요새를 지었다.
오늘도 그 보랏빛 바다에는 생명을 이어 가는 벌들의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다시 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인간이 돌로 쌓은 성은 세월 앞에서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그러나 자연이 만들어 낸 이 보랏빛 요새는 매년 여름이면 다시 살아난다. 전쟁의 소음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생명을 이어 가려는 존재들의 윙윙거림은 지금도 이 고원을 가득 메운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가끔 그날 찍어 온 영상을 다시 재생해 본다. 영상은 풍경보다 먼저 그날의 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벌들의 윙윙거림이다.
그때마다 아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벌에 쏘이면 어떡해.”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봉침이 몸에 좋다잖아.”
그 말을 듣고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사실 처음에는 나도 벌들이 조금은 무서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 윙윙거림은 소음이 아니라 생명의 리듬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브리우에가의 바람과 향기, 그리고 보랏빛 고원 위를 가득 메우던 생명의 움직임이 다시 눈앞에 펼쳐진다.
그 영상을 볼 때마다 문득 깨닫는다.
인간은 돌로 성을 쌓았고, 자연은 생명으로 요새를 지었다.
오늘도 그 보랏빛 바다에는 생명을 이어 가는 벌들의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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