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 #후안그리스 #입체파
사실 마드리드에 가기 전까지는 후안 그리스라는 화가를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마드리드의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와 티센 보르네미사 국립박물관을 둘러보며 그의 독특한 화풍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피카소, 브라크와 함께 '입체파의 3대 거장'으로 불리는 이유를 이제야 온몸으로 실감하게 되었네요. 개인적으로는 피카소의 거친 해체보다 후안 그리스 특유의 차분하고 정돈된 색감과 기하학적 미감이 훨씬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후안 그리스, 아침식사]
바로 퐁피두 센터가 소장한 후안 그리스의 1915년작, '아침식사(Le Petit Déjeuner)'였습니다. 지인분께서 이 그림의 특별한 분위기가 참 좋으셨다며 보내주신 귀한 사진이었습니다.
두 그림을 가만히 비교해 보니 구도와 색감이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습니다. 1915년에 '아침식사'를 그리며 식탁 위의 풍경을 구상한 뒤, 이듬해 그 연장선상에서 곧바로 이어 그린 연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마드리드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 1916년작 '포도'라는 작품명과 아침 식사(1915년작)랑 구도나 색감이 놀라울 정도로 많이 닮아 있습니다. 제목 자체도 '포도'라 아침 식사하면서 '아침식사' 작품을 구상한 후 바로 이어서 구상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른 그림처럼 후안 그리스의 작품에는 JOURNAL이란 글자가 자주 나옵니다.
이 흥미로운 추론을 미술사적 기록과 비교해 보니 실제로도 완벽한 정답이었습니다.
식탁이라는 하나의 시공간: 후안 그리스는 1915년 말부터 1916년까지 하나의 아침 식탁을 배경으로 방을 바꾸지 않고 연속적인 정물화 연작을 작업했습니다. 1915년 10월경 퐁피두의 '아침식사'를 완성한 후, 그 배치를 조금 더 정돈하고 클로즈업하여 1916년 6월에 완성한 작품이 바로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의 '포도'입니다.
숨은 그림 찾기 같은 '포도': 제목이 왜 '포도'일까 궁금했는데, 화면 윗부분의 둥근 과일 그릇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검은색 동글동글한 알갱이들이 겹쳐진 포도송이가 숨어 있더군요. 전작이 아침 식사라는 행위 전체를 조명했다면, 이 작품은 식사 후 디저트로 놓인 포도와 신문에 더 깊이 시선을 집중한 결과물이었던 셈입니다.
입체파의 단골 손님, "LE JOURNAL"의 비밀
두 작품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흥미로운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화면에 선명하게 쓰인 "JOURNAL"이라는 글자입니다. 후안 그리스뿐만 아니라 입체파 화가들의 정물화에는 왜 이 단어가 단골로 등장할까요?
실제 파리의 일상 일간지: 'Le Journal'은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에서 실제로 매일 발행되던 대중적인 일간지였습니다. 당시 파리의 카페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읽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도시민들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림 속 신문은 "이 장면이 지금, 여기 파리의 일상 속 풍경"임을 알려주는 시대적 장치입니다.
현실을 캔버스로 끌어들이는 콜라주: 입체파 화가들은 신문지 조각을 실제로 화면에 오려 붙이는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 기법을 즐겨 썼습니다. 캔버스라는 가상의 회화 공간 위에 진짜 신문이라는 '현실의 파편'을 결합해 현실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한 혁신적인 시도였습니다. 신문을 직접 붙이지 않더라도 활자체를 그대로 모사하며 그 효과를 냈습니다.
문자와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유희: 프랑스어로 'Journal'은 신문이라는 뜻 외에도 '일기, 일지'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때로는 글자를 다 보여주지 않고 "JOU"나 "OURNAL"처럼 일부분만 잘라내어 화면의 구도를 잡는 시각적 도구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기하학적인 입체파 그림 속에서 선명한 활자 고딕체는 조형적으로 아주 훌륭한 대비를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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