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 #윈슬로호머 #호머 #티센보르네미사
지난 2026년 2월부터 줄곧 머물던 스페인 발렌시아에서의 시간을 뒤로하고 어제 마침내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타국에서의 긴 여정 동안 마드리드의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과 고야의 판화미술관을 거쳐, 바르셀로나의 피카소미술관과 호안 미로 미술관까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마치 마음속에 숨겨둔 예술의 보물지도를 하나씩 채워나가는 듯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쟁쟁한 여정 속에서 뜻하지 않게 제 영혼을 세차게 흔들며 찾아온 화가가 있습니다. 바로 미국의 화가, 윈슬로 호머입니다.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에는 렘브란트의 쓸쓸한 노년의 자화상을 비롯하여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등 서양 미술사의 거장들이 남긴 명화들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캔버스들 사이에서 유독 제 발길을 오랫동안 붙잡아 세운 그림은 전혀 낯선 화가의 작품이었습니다.
첫인상은 묘한 불편함이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구도도 맞지 않고 여백의 배치마저 어색해 보이는, 마치 일상의 찰나를 서투르게 포착한 스냅사진 같은 구도였습니다. 화면 왼쪽으로 치우쳐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넓게 비어 있는 우측의 어두운 여백. 그 기묘한 불균형의 틈새를 따라 시선을 아래로 내리다 보면, 나무 바닥 위에 덩그러니 떨어져 시들어가는 빨간 장미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옵니다.
잘못 채워진 단추처럼 어딘가 어긋난 이 구도가 주는 긴장감이 되려 제 손으로 카메라를 들게 만들었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된 그 그림 뒤편의 이야기는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화가로서 과감하게 시도했던 구도적 실험인 동시에, 사랑하는 여인 헬레나를 다른 남성에게 떠나보내야만 했던 인간 윈슬로 호머의 애절하고 쓸쓸한 연서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말로 다 하지 못한 고백과 차마 잡지 못한 미련이 그 넓고 짙은 우측의 여백 속에 고스란히 고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 낯선 만남을 계기로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며 저도 모르게 깊은 내적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한 그의 또 다른 걸작 새로운 밭의 퇴역 군인을 바라볼 때는 제가 무척 사랑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치열한 붓 터치가 겹쳐 보였고, 그의 광활하고 생동감 넘치는 바닷가 그림들을 볼 때는 발렌시아의 눈부신 햇살을 담아내던 호아킨 소로야의 바다가 떠올랐습니다. 묵묵히 자신만의 고독을 짊어지고 예술에 명을 바쳤던 그의 고단한 인생사 역시 어딘가 고흐의 삶을 닮아 있어 마음이 아련해집니다.
더불어 이번 마드리드 여행에서 얻은 또 하나의 값진 수확은 후안 그리스라는 이름입니다. 입체파의 삼대 거장으로 불린다지만 제게는 다소 낯설었던 그 이름을 지난주 마드리드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와 티센보르네미사 국립박물관에서 비로소 선명하게 각인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의 위대한 화면 속에서도, 저는 이상하게도 피카소보다 후안 그리스의 정제되고 서정적인 입체감에 더 마음이 끌렸습니다. 마드리드에서 마주한 이 입체파 거장들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조만간 한국에서 열리는 퐁피두 센터 소장 입체파 전시를 찾아 다시 한번 그 주파수를 이어가 보려 합니다.
발렌시아에서 보낸 계절과 마드리드의 미술관 복도에서 마주했던 낮선 고독들. 뜻밖의 미술관 방랑길에서 마주한 윈슬로 호머의 쓸쓸한 여백은, 어쩌면 저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거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행 가방을 정리하는 오늘 밤, 제 마음속 서재에는 오래도록 빛이 바래지 않을 보물 같은 화가의 이름 하나가 깊이 새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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