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2037 #1권 #발렌시아의인장 #사군툼 #사군토 #밤세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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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 2037 1권 : 발렌시아의 인장
세바스티안은 고대 사군툼이라 불리던 이곳 사군토 성 유적지, 옛 지하시설 터에 서 있었다. 발렌시아의 뙤약볕은 차가운 돌벽에 가로막혀 힘을 잃었지만, 그가 감지하는 영적 열기는 오히려 뜨거웠다. 그는 가방에서 마노석 성배 파편을 꺼내 들었다.
이곳은 인장의 땅이었다. 2,200년 전, 한니발의 군대가 8개월간 포위했던 사군툼. 그 비극의 마지막 날들이 남긴 주파수가 성벽의 균열마다 스며 있었다.
그는 유적지 한구석에 있는 작고 어두운 전시실로 들어섰다. 벽에는 프란시스코 도밍고 마르케스가 그린 《사군툼의 마지막 날》의 캔버스가 걸려 있었다.
그림은 소란스러웠다. 불타는 성, 절규하는 여인들, 그리고 광기에 찬 로마 병사들의 칼날. 색채는 어지럽게 얽혀 있었고, 붓 터치는 포성보다 날카로웠다. 세바스티안이 그림에 시선을 고정하는 순간, 그의 '안테나'가 반응했다.
그림 속 비명과 포성이 고음의 기괴한 금속성 소음으로 변환되어 그의 고막을 송곳처럼 찔렀다. 그것은 죽음의 주파수였다. 그는 비틀거리며 그림 앞 의자에 주저앉았다. 시야가 흐려지고, 전시실의 에어컨 소리가 사라졌다. 대신 매캐한 밤 냄새와 흙먼지가 그의 폐부로 들이닥쳤다.
2,200년 전의 지하실. 세바스티안은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그곳에 존재하는 영적 질량이 되었다.
사군툼의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는 짐승의 포효였다. 지하실 문틈으로 스며드는 연기는 죽음의 냄새를 풍겼다. 아빠 모사르베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던져주고 간 것은 흙먼지가 묻은 밤 세 알이 전부였다.
여덟 살 루카스는 구석에 웅크린 채, 누나 엘레나가 화로 재 속에서 꺼낸 검은 덩어리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밖에서는 로마군의 칼날이 방패를 긁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남매의 온 신경은 오직 그 밤알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때였다. '퍽—!'
날카로운 폭발음이 지하실의 정적을 찢었다. 칼집을 내지 못한 밤 한 알이 내부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터뜨려버린 것이다. 파편은 누나 엘레나의 뺨을 스치고 벽에 박혔다. 이제 남은 건 단 두 알뿐이었다.
세바스티안은 그 밤이 터지는 순간의 진동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것은 공포의 파동이었다.
엘레나는 옷소매로 뜨거운 밤을 감싸 쥐고 조심스럽게 껍질을 발라냈다. 바스락하며 검은 가루가 아이들의 마른 입술 위로 떨어졌다. 엘레나는 노란 속살이 붙은 쪽을 남동생에게 내밀며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루카스. 이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보물이야. 누나는 아까 성벽에서 병사 아저씨들이 준 빵을 배불리 먹어서 지금 배가 빵빵해. 그러니까 네가 이거 다 먹어."
루카스는 누나의 마른 손과 일렁이는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누나의 목울대가 울컥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누나는 애써 가슴을 편 보였다. 루카스는 고개를 저으며 누나의 배에 가만히 귀를 갖다 대었다.
"누나, 거짓말하는 거 다 알아. 누나 배 속에서 나처럼 똑같이 꼬르륵 소리가 나잖아."
엘레나는 당황하며 배를 움켜쥐었지만, 정직한 굶주림의 소리는 지하실의 고요를 뚫고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루카스는 탄 밤 조각을 조심스럽게 받아들고는 손톱으로 딱딱한 껍질을 긁어내며 속삭였다.
"엄마가 그랬어. 맛있는 건 나눠 먹어야 두 배로 맛있어진다고. 누나 한 입, 나 한 입. 그래야 우리 둘 다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안 나고 예쁜 소리가 날 거야."
남매는 손가락 끝이 시커멓게 물드는 줄도 모른 채, 서로의 입에 그 온기를 넣어주었다. 탄내와 쓴맛이 혀끝을 저몄지만, 그 순간만큼은 사군툼을 뒤흔드는 포성보다 이 아이들의 '사랑의 공명'이 더 거대한 울림으로 지하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때였다. 지하실의 낮은 천장을 뚫고 기괴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그것은 인간의 성대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음성이 아니었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고, 고막을 송곳으로 후비는 듯한 적진의 전령 알코루스의 목소리였다.
"내려놓아라. 사군툼의 사람들이여. 너희의 기도는 하늘에 닿지 않았다. 알콘은 무릎을 꿇었고, 너희의 내일은 이 성벽의 먼지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포기하라. 포기하고 침묵하라."
그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화로의 불꽃이 가늘게 떨렸고, 루카스는 귀를 막으며 누나의 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것은 영혼을 갉아먹는 '악마적 불협화음'이었다. 세바스티안은 이 소리가 그림에서 감지했던 그 죽음의 주파수임을 깨달았다.
누나 엘레나는 떨리는 손으로 동생의 귀를 더 꽉 막아주며 나직이 읊조렸다.
"저 소음에 속지 마. 루카스. 지킬 자식이 없는 사람은 저 소음을 이겨낼 자기만의 소리가 없으니까."
환상에서 깨어난 세바스티안은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차가운 전시실의 공기와 달리 뺨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벽에 걸린 도밍고 마르케스의 그림 속, 절규하는 여인의 뺨 위로 방금 본 엘레나의 비극적 흉터가 겹쳐 보였다.
남매의 입으로 들어간 밤은 결국 두 알뿐이었다. 나머지 한 알은 칼집조차 내지 못한 채 비극의 온도를 견디지 못하고 지하실의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터져버렸던 것이다.
세바스티안은 홀린 듯 다시 성벽 터로 나갔다. 2,200년의 세월을 견뎌낸 거대한 돌벽은 이제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안테나가 되어 웅웅거리는 주파수를 내뿜고 있었다.
그는 성벽의 거친 균열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더듬었다. 2차 포에니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도시 사군툼. 역사책은 그들의 집단 자결을 단순한 비극으로 기록했고, 적진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알콘을 영웅이라 불렀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지킬 신앙도, 대속할 온기도 없었던 알콘은 그 차가운 기계 소음에 영혼이 빠져나가 홀로 도망친 자에 불과했다.
그때, 세바스티안이 쥐고 있던 마노석 성배 파편이 가슴속 깊은 울림과 함께 뜨겁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성벽 깊은 바위 틈새, 2,200년 전 비극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갔던 밤 파편의 충격 흔적이 돌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흉터의 모양은, 세바스티안이 가진 마노석 성배 파편 측면에 새겨진 균열과 정확히 일치했다.
손끝을 통해 뇌리로 스며드는 새로운 공명. 그것은 알코루스가 뿜어내던 차가운 금속성 소음 속에서도 끝내 서로의 입에 온기를 넣어주던 남매의 낮은 숨소리이자, 제때 전해지지 못한 사랑의 영원한 통곡이었다.
세바스티안은 마침내 자신의 가슴을 짓눌러온 진짜 정체성을 깨달았다. 선조 세바스티안이 저지른 원죄와 역사 속에서 찢겨 나간 성배의 파편들. 이 마노석에 박힌 흉터는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그 업보를 짊어지고 흩어진 주파수를 수복해야 할 자신의 숭고한 숙명이었다.
"지킬 것이 있는 자는 소음에 속지 않는다..."
남매가 남긴 그 나직한 읊조림은 더 이상 옛날이야기가 아니었다. 알콘처럼 도망치지 않고, 선조의 죄악을 온몸으로 대속하며 600년의 저주를 끊어낼 집행자. 세바스티안은 가슴속 깊이 새겨진 첫 번째 인장의 주파수를 느끼며, 비로소 구원의 방주를 향한 첫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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