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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풍속도첩 - 서문(序文) - 엔지니어의 눈으로 다시 꿰맨 단원 풍속도첩

단원을 만나다 : 엔지니어의 눈으로 본 단원 풍속도첩

서문(序文) - 엔지니어의 눈으로 다시 꿰맨 단원 풍속도첩

기자의 '논갈이'를 '밭갈이'로 오독한 글에 화가 나서 시작한 글쓰기였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단원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 모두 들여다보고 에세이를 쓰게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한 편 써보려고 시작했던 일이 두세 달 만에 이렇게 급박하게 번져가고, 어느새 책으로의 출판까지 고민하게 되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저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그 과정에서 제가 김홍도의 그림을 바라보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동안 단원의 그림을 10초 이상 들여다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저 "아, 김홍도의 풍속화구나" 하고 무심히 지나쳤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하나의 그림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림을 조금 알게 된 것 같았지만, 오래 볼수록 오히려 하나도 모르겠다는 당혹감이 밀려왔습니다. 처음에는 답이 보이는 것 같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질문만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손짓 하나가 궁금하고, 신발의 재질이 궁금하고, 지게에 실린 짐의 정체가 궁금하고, 인물의 굳은 표정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림 한 점이 거대한 미스터리가 되어 눈앞에 우뚝 섰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원의 그림을 권위 있게 '설명'하려고 쓴 책이 아닙니다. 솔직히 저도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그림은 기존의 학설이 더 맞는 것 같고, 어떤 그림은 제가 전혀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그림은 여러 해석을 아무리 견주어 보아도 무엇이 맞는지 끝내 알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이 책이 지닌 가장 솔직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비상한 능력 하나를 허락하신다면, 저는 아마 단원을 딱 한 시간만이라도 소환해 달라고 간청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집요하게 묻고 싶습니다.

"단원, 이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왜 이 손목을 이렇게 꺾어 그렸습니까?"
"저 사람은 대체 누구입니까?"
"제가 이렇게 해석했는데, 제 생각이 맞습니까?"

아마 한 시간이라는 시간도 턱없이 모자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을 오래 들여다보다 보니, 한 가지 서글픈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 그림을 '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실제로 보았고, 만졌고, 직접 해보았던 노동의 감각들이 너무나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지게를 져 본 사람, 쟁기를 잡아 본 사람, 밤늦도록 가마니를 짜 본 사람, 물레를 돌리던 어머니 곁에서 그 팽팽한 소리를 지켜본 사람, 서당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글을 읽어본 사람.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점점 지워지고 있습니다.

박물관에 가면 지게가 전시되어 있고, 그 옆에는 친절한 설명문이 붙어 있습니다. "지게는 사람이 짐을 등에 지고 운반할 때 사용하던 농기구입니다."

틀린 설명은 아닙니다. 하지만 실제로 지게를 져 본 사람의 몸이 기억하는 감각은 결코 박물관 설명문에 적히지 않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일어날 때 발의 위치는 어떻게 하고 어디에 먼저 힘을 주어야 넘어지지 않는지, 어깨 어디에 멜빵이 걸려야 살이 짓무르지 않는지, 짐이 한쪽으로 쏠리면 허리 근육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가파른 비탈길에서 지게의 하중이 몸을 어떻게 아래쪽으로 끌어당기는지.

쟁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논에서 직접 쟁기를 잡아본 사람은 그림 속 농부의 손과 어깨, 흙을 딛는 발의 각도를 보며 단순히 "쟁기를 끌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보습이 논과 밭에서 사용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언제 쟁기를 누르고 언제 들어 올려야 하는지, 그림 속에서 왜 농부가 쟁기를 온몸으로 힘껏 누르고 있는지까지도 몸의 기억으로 짚어낼 수 있습니다.

한 시대의 생활이 사라지면, 그 생활을 몸으로 알고 있던 사람이 그림에서 읽어내던 직관 역시 함께 사라집니다. 그대로 둔다면 언젠가는 김홍도의 그림 속 지게를 보고도 백과사전을 뒤적여야 하고, 쟁기를 보고도 사용법을 책으로 배워야 하며, 서당의 공기를 박물관의 박제된 글자로만 상상해야 할 날이 올 것입니다.

저는 그 기억이 완전히 휘발되기 전에, 제 몸에 남아 있는 투박하지만 나와 우리 선조들의 삶의 조각을 기록해 두고 싶었습니다. 몸으로 기억하는 세대가 거의 사라져 가고 있기에, 유년의 몸 기억을 바늘 삼아 30년 넘게 현장에서 체득한 엔지니어의 시선으로 하나하나 다시 꿰매어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이 책을 쓰는 가장 절박한 이유입니다. 제가 김홍도의 그림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미술사학자보다 정확하게 증명했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림을 스스로 뜯어보고 의심할 수 있는 '눈'을 다음 세대에게 조금이라도 건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집니다. 왜 저 손은 저렇게 부자연스럽게 꺾여 있을까. 왜 저 신발은 짚신이 아니라 반질거리는 형태일까. 저 지게에 실린 짐은 왜 나뭇가지가 아닐까. 왜 있어야 할 것이 화면 속에서 감쪽같이 사라졌을까. 저 아이는 정말 어린아이일까, 아니면 노인일까. 저 방 안의 늙은 아버지는 왜 하필 저 책장을 더듬고 있을까.

그리고 저는 제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려 합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제가 발견한 것과 전혀 다른 결을 발견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제 해석에 동의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에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하며 그림을 다시 한번 돋보기로 들여다보셔도 좋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고, 숨은 단서 하나를 건져 올리고, 서로 다른 가설을 세워보며 다시 붓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가 생각하는 가장 온전한 '그림 읽기'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해석은 오류투성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투박한 추론을 따라가다가 여러분이 단원의 그림 한 점을 평소보다 딱 10초만 더 오래 바라보게 된다면, 혹은 제가 미처 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여러분의 눈으로 건져내게 된다면, 이 책은 자신의 소명을 다한 것입니다.

저는 단원을 여전히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이 25점의 그림을 붙들며 250년 전의 천재 화가를 비로소 살갗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과하며 제가 어린 시절 마주했던 수많은 사람과 도구, 땀 냄새나는 노동의 원형을 다시 만났습니다.

지게를 져 보았던 사람들. 논바닥에서 쟁기를 틀어쥐던 사람들. 밤늦도록 고드랫돌을 넘기며 가마니를 짜던 사람들. 물레를 돌리며 한숨을 짓던 어머니. 서당에서 종아리를 맞아가며 책을 읽던 아이들.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을 말없이 등 뒤에서 묵묵히 바라보던 아버지.

어쩌면 제가 단원의 그림에 이토록 지독하게 빠져든 진짜 이유는, 그 낡은 화폭 속에 제가 지나온 시간과 우리가 잃어버린 체온이 고스란히 봉인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게를 져 보고 가마니짜기를 해 본 마지막 세대의 기억이 영영 흩어지기 전에, 김홍도의 그림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작은 시선 하나를 여기에 조심스럽게 놓아둡니다.

좋은 그림은 정답을 가르쳐 주는 그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한 사람이 자신의 답을 찾아가도록 오래 붙잡아 두는 그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한 인물을 보고도 누군가는 아이를 보고, 누군가는 노인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정반대의 해석일지라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 정해 놓은 답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 앞에서 자기만의 답을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는, 나 자신을 다시 일깨워 준 한 사람에 대한 뒤늦은 감사이자 찬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원 김홍도 선생.

당신은 이제 조금 덜 외로우실 것 같습니다.

250년이 지난 뒤에도 한 후배가 당신의 그림 앞에 앉아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요.

이제는 여러분이 만나보실 차례입니다.
여러분의 눈으로,
여러분의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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