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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아직 읽지 않은 네 개의 세계
책상 위에 새로 산 네 권의 책을 나란히 놓아본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겨진 나날,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앤디 위어의 프로젝트 헤일메리, 그리고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다. 아직 첫 장을 제대로 넘기지 않았는데도 빳빳한 표지를 손끝으로 쓸어내리는 것만으로 손끝에 묘한 온기가 번진다. 읽지 않은 책은 단순한 종이 묶음이 아니라, 언젠가 내가 걸어 들어가 길을 잃고 헤매다 마침내 새로운 문을 열고 나와야 할 미지의 영역이다.
남겨진 나날은 동창들과 함께하는 영어 원서 읽기 모임에서 펼쳐 들었다. 어느새 나는 주인공 스티븐스에게 깊이 감정이입한 채 책장을 넘기고 있다. 스티븐스는 본심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한 채 차가운 격식과 틀 안에 머문다. 켄튼 양을 마음 깊이 연모하면서도 끝내 고백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서, 서투르고 조심스러웠던 나의 지난날을 본다. 본심 대신 명분만 앞세우는 그의 태도는 말로 다 하지 못하는 행간의 서늘한 여백을 남기고, 품위라는 이름 뒤에 숨겨둔 회한과 차마 터뜨리지 못한 감정의 절제미가 가슴을 조용히 적신다.
갈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해변의 카프카는 아직 몇 페이지만 조심스레 들여다본 상태다. 하지만 하루키의 글에 깃든 선율은 이미 책장 너머에서 마음을 두드린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이야기 속에서, 음악은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먼저 건드릴 것이다. 나는 그 선율이 책장을 넘기는 손끝과 밤의 정적 속에서 어떻게 울려 퍼질지 가만히 귀를 기울여본다.
우주적 색채를 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아직 책의 소개글과 저자의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정도만 읽었지만, 차갑고도 단단한 지성의 빛이 이미 표지 너머에서 느껴진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오직 법칙과 계산, 집요한 공학적 치밀함으로 돌파구를 찾아내는 그 담담한 투쟁은 오랜 시간 도면과 수치를 다뤄온 나의 손끝 감각을 조용히 깨울 것만 같다.
그리고 묵직한 녹색 표지의 오디세이아가 자리 잡고 있다. 시대를 초월한 유혹과 방랑, 기나긴 귀향을 담아낸 이 대서사시는 책장을 대충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예상치 못한 큰 안도와 확신을 안겨주었다.
이 책에는 104점의 명화가 실려 있다. 그것도 내가 가장 애정하는 화가인 피터 파울 루벤스의 역동적인 붓질이 대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그 숫자보다, 그림들이 텍스트의 곁을 장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사의 호흡을 또 하나의 시선으로 확장한다는 사실이다. 현재 발렌시아의 인장을 집필하며 성인 소설에 그림을 넣는 문제로 내내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혹여 어린이용 그림책처럼 보일까 저어하며 QR코드로 대체해야 하나 망설이던 고민이, 글과 그림이 단단하게 맞물린 이 책을 마주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내가 세상에 내놓을 책 역시 딱 이 판형에, 서사의 호흡을 함께할 명화들을 아낌없이 담아낸 온전한 형태로 만들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해 본다.
이 책들은 아직 온전히 내 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책상 위에 놓인 순간부터 머릿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궤적을 그리기 시작한다. 절제된 감정의 여백과 문장 너머의 음악, 구조를 받치는 공학적 치밀함, 그리고 서사를 확장하는 명화의 깊이까지. 이 매력적인 조각들을 하나하나 오래 흡수하고 싶다. 그리고 오랜 시간 다듬어온 PROJECT 2037의 세계에, 그것들을 나만의 결로 정교하게 녹여내고 싶다. 책장을 넘기기 전, 네 개의 세계를 바라보며 새로운 항해를 향한 단단한 숨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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