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아의 식탁 - 샐러드, 치아바타빵

성경의 동물(생명),Stanley의 유년시절 : 누룩 - 스스로를 바치는 희생의 상징

성경의 동물(생명) / Stanley의 유년 시절

누룩 -  스스로를 바치는 희생의 상징

어릴 적 농사일을 돕다 보면 어른들의 막걸리 심부름은 늘 내 몫이었다. 양은 주전자를 들고 술도가로 가 가득 받아오던 길, 어른들의 술맛이 궁금해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홀짝홀짝 훔쳐 마시곤 했다. 술이 좀 빈 것 같다는 어머니께 먼 길을 급히 뛰어오다 흘렸다고 둘러대던 그 시절의 막걸리는 참으로 달고 맛있었지만, 지금은 어떤 술을 마셔도 그때 그 맛이 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집에서도 방 한구석 따뜻한 아랫목 이불 속에 항아리를 묻어두고 동동주를 빚으셨다. 이불 틈새로 보글거리며 피어오르던 시큼한 향기와 숨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잘 쪄낸 고두밥에 잘게 부순 누룩을 고루 섞어 정성껏 치댄 뒤 항아리에 안쳐 며칠을 두면, 밥알이 동동 뜨며 코끝을 찌르는 달착지근하고 시큼 털털한 향이 방 안을 채웠다. 보이지 않는 생명이 빚어낸 경이로운 변화였다. 아버지를 위해 빚은 술이었지만 몰래 한 모금 떠먹어 보면, 술맛을 모르던 어린 나이였음에도 달큼하고 알딸딸한 기운이 참 좋았다. 맑은 술을 다 짜내고 남은 술지게미조차 아버지는 버리지 않고 맛있다며 드시곤 했다.

[장 프랑수아 밀레 - 빵 굽는 여인(La Fournée), 1854]

성경 속 수많은 동식물과 거대한 상징들 틈에서, 이 동동주의 핵심을 이룬 누룩(효모)의 존재감은 남다르다.  개의 빈도마저 앞서는 이 작은 미생물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삶 전체를 뒤흔드는 깊은 영적 서사를 품고 있다.

  • 마태복음 13장 33절 (조용한 침투와 절대적인 확장성):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 거대한 밀가루 반죽 속 누룩 한 줌은 턱없이 작아 보이지만, 외적인 위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스며들어 삶과 영혼의 결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생명의 힘이다.

  • 고린도전서 5장 7-8절 (정화와 순전함을 묻는 거울): 묵은 누룩을 내버리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명절을 지키라 권면한다. 부패와 변질을 부르는 인간의 욕심과 위선을 털어내라는 경고와 온전한 양식을 부풀리는 생명력이라는 누룩의 두 얼굴은, 오늘날 우리 내면의 영적 상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 완전한 소멸과 변혁: 누룩은 결코 형체를 유지한 채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거친 곡식과 고두밥 속으로 몸을 던져 흔적도 없이 부서지고 녹아내릴 때, 비로소 전체를 부풀리고 향긋한 생명의 술을 빚어낸다. 남 앞에 드러나려 들지 않고 온전히 녹아드는 가장 극적인 희생의 모습이다.

화덕 앞에서 거친 빵을 굽는 여인의 손끝에도, 차가운 방 아랫목에서 동동주를 빚던 어머니의 손끝에도 결국 같은 누룩의 숨결이 스며 있었을 것이다. 서양의 빵을 부풀리는 이스트든, 우리의 맑은 동동주를 빚어 올리는 누룩이든 본질은 다르지 않다. 낮은 자리로 내려가 곡식의 품으로 숨어들고, 형체를 비워내 단단한 알곡을 부드럽고 향기로운 생명의 양식으로 거듭나게 하는 일이다.

문득 누룩이 지닌 이 이중성 앞에 서서 내 삶을 가만히 비추어 본다. 나는 과연 둘 중 어디에 속한 존재일까. 이름과 형체를 지워가며 가정과 일터의 단단한 알곡들을 묵묵히 삭혀내는 순전한 희생의 누룩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드러내려는 조급한 욕심과 변질된 옛 성품으로 주변에 은밀한 악영향을 퍼뜨리는 묵은 누룩이었을까.

어린 시절 주전자 주둥이로 훔쳐 마셨던 그 알싸하고 달콤했던 한 모금처럼, 잊고 살았던 본래의 순전함을 다시금 마음에 품어본다. 나를 증명하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체를 살리는 따뜻한 누룩 한 줌으로 온전히 녹아들 수 있기를 조용히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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