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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식물
겨자 - 나는 성장하고 있는가?
수년 동안 집 근처 텃밭 한구석에서 겨자를 길렀다. 순전히 알싸하고 쌉싸름한 겨자잎 쌈을 나와 가족들이 좋아했기 때문이다. 씨앗 봉지를 뜯어 손바닥에 쏟아놓았을 때 참 씨앗이 작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직경 1~1.5mm 남짓한 동그란 알갱이들. 무씨 같은 일반 십자화과 작물과 비교하면 분명 작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성경의 표현처럼 세상 모든 씨앗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텃밭을 일구며 만져본 상추씨나 고들빼기 씨앗만 해도 겨자씨보다 훨씬 가늘고 미세하다. 특히 텃밭 작물 중에서도 바람에 날릴 듯 가벼운 고들빼기 씨앗은 어릴 적 시골에서 보았던 까만색의 담배씨에 견줄 만큼 작다. 내가 아는 한 가장 작은 씨앗은 모래알보다 고운 담배 씨앗이다. 그런데 그 작은 담배씨가 싹을 틔우면 사람 키를 훌쩍 넘어, 조건이 좋을 때는 3미터 가까이 자라기도 한다. 만약 이 성경의 비유가 한국의 농경 문화 속에서 쓰였다면, 겨자씨 대신 담배씨에 빗대었을 때 그 극적인 대비가 훨씬 더 깊이 와닿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흙을 뚫고 나온 여린 겨자 싹은 순식간에 잎을 넓혀갔고, 진짜 전쟁은 그때부터였다. 톡 쏘는 향과 부드러운 잎은 사람의 입맛에만 별미인 것은 아닌가 보다.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와 진딧물들이 먼저 알고 몰려들어 겨자밭은 순식간에 벌레들의 잔칫상이 되었다. 주말마다 아침 일찍 나가보면 밤새 잎맥만 남긴 채 뜯겨나간 구멍투성이 잎들이 수두룩했다. 친환경으로 키워보겠다고 막걸리 희석액을 뿌리고 일일이 손으로 벌레를 잡아내도 잠시뿐, 벌레 먹은 잎을 다 쳐내도 금방 또 벌레가 먹어버리니 결국 남는 것이 없었다. 온 계절을 흙먼지 속에서 씨름한 뒤에야 겨우 밥상에 쌈 몇 장을 올릴 수 있었다.
식물학적으로 겨자는 지중해와 중동이 원산지인 일년생 풀로, 씨앗은 빻아 톡 쏘는 향신료로 쓰고 여린 잎은 입맛을 돋우는 쌈 채소로 먹는다. 겉보기엔 연약한 풀이지만 갈릴리의 비옥한 들판에서는 2~3미터, 조건이 좋으면 3~4미터에 이를 만큼 크게 자라기도 하며, 나무는 아니지만 마치 작은 나무처럼 가지를 펼친다.
이번주 목사님 설교 본문은 마태복음 13장 31~33절의 겨자씨와 누룩 비유였다. 나는 두 비유를 나란히 읽으면서 하나님 나라의 신비로운 생명력을 묵상해본다. 누룩이 안으로 은밀하게 스며들어 전체를 변화시키는 모습이라면, 나는 겨자씨에서 밖을 향해 뻗어나가 마침내 다른 존재들이 깃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생명을 본다.
마태복음 13장 31절에서 32절: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유대 농경 사회에서 겨자는 단순한 비유 속 식물이 아니었다. 유대교의 율법 문헌에는 겨자를 다른 작물과 어떻게 구분해 심어야 하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규정까지 등장한다. 그만큼 겨자는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실제 밭작물이었다. 예수님은 이 친숙한 작물을 통해 시작의 미약함과 결말의 풍성함, 그리고 작은 것 안에 감춰진 생명의 힘을 일깨우셨다.
벌레 떼와 사투를 벌였던 텃밭을 떠올리며 말씀을 묵상하니 문득 새로운 깨달음이 마음에 닿는다. 성경의 겨자씨 비유는 작은 씨앗이 자라 거대한 그늘을 만들고 새들이 깃드는 영광스러운 결실을 보여주지만, 그 이면에는 벌레에게 뜯기고 상처 입으면서도 다시 새순을 밀어 올리던 치열한 생의 싸움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믿음 역시 마찬가지다. 해충 한 번 타지 않고 깨끗하게 자란 관상용 신앙은 없다. 일상의 염려와 의심, 세상의 유혹이라는 벌레들에게 수없이 잎을 갉아먹히면서도 땅속 깊은 곳에서 말씀의 뿌리를 놓지 않는 인내, 그 뜯겨나간 자리를 딛고 다시 피어나는 생명력이야말로 결국 공중의 새들이 깃드는 나무가 되는 비밀이다.
오늘 내 믿음의 잎에 뚫린 구멍 하나에 낙심하지 않고, 상처 난 자리에 다시 말씀의 물을 길어 올리며 내 안의 작은 씨앗이 일으킬 조용한 부활을 묵묵히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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