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아의 식탁 - 샐러드, 치아바타빵

단원 풍속도첩 : 자리짜기 - 저 사람은 아이일까, 노인일까?

단원을 만나다 : 엔지니어의 눈으로 본 단원 풍속도첩

자리짜기 - 저 사람은 아이일까, 노인일까? 

단원 김홍도의 〈자리짜기〉를 보면 흔히 한 가족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아버지는 자리를 짜고, 어머니는 물레를 돌리고, 어린 아들은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한 사람이 눈에 걸립니다. 

저 책을 읽고 있는 사람, 정말 아이일까요?

국립중앙박물관의 해설처럼 이 그림에서 ‘서민 가정의 유일한 희망’을 읽어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해석이었습니다.

"어린 아들의 글 읽는 소리에 맞추어 아버지는 자리를 짜고 어머니는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아내고 있다. 아들은 낮에 서당에서 배운 천자문을 부모님 앞에서 자랑스레 막대기로 짚어가며 읽어 보이고 있다. 부모는 글 읽는 아들이 대견스러워 일을 하면서도 힘든 줄을 모른다. 〈자리짜기〉에서는 서민 가정의 유일한 희망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을 조금만 오래 바라보면 몇 가지 장면이 마음에 걸립니다. 책을 읽는 인물의 자세는 정말 학동의 모습일까요? 왜 그는 바지를 입지 않은 채 바닥에 앉아 있을까요? 여인은 무엇 때문에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고 있으며, 세 인물은 왜 서로를 바라보지 않을까요?

실제로 이 글의 초안을 작성하면서 작품 해설 방식에 대해 형님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형님은 단원 풍속화첩 전체를 관통하는 서민의 해학 코드를 보았을 때, 오줌을 싸서 바지를 벗겨놓은 동자의 천진난만한 장면이 맞다며 '하의를 벗은 노인'이라는 해석은 억지라고 맞섰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형님의 설명을 듣고 다시 그림을 보아도, 제 눈에는 자꾸만 정신을 놓아버린 늙은 아비의 비극적인 초상으로 보였습니다.

"아이로 보면 서민의 훈훈한 해학이지만, 노인으로 보면 한 가족의 서글픈 비극이 된다."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 - 자리짜기]

이 스케치를 보고 있으면 한 가지가 더 궁금해집니다. 외국인인 Chandlee의 눈에는 이 인물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적어도 그가 남긴 그림 속 인물은 어린아이보다는 노인에 가까운 모습으로 보입니다.  아래 스케치 그림은 'Export Paintings as Art and Agency: Re-assessing Export Paintings of China and Korea - Lina Shinhwa Koo'라는 자료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Figure 4: W. H. Chandlee (American, 1865–1955), Copies of Han Jinwoo’s Genre Drawings, about 1886 (original drawings were made before or in 1885). Image: Otis T. Mason, “Corea by Native Artists,” Science vol. 8, no. 183 (August 1886), 116.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아이로 믿어왔던 등을 돌린 인물을 노쇠한 노인으로 읽어보기 시작하면, 이 평화롭던 방 안의 공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건네기 시작합니다.

단원은 한 방 안에 자리짜기와 물레질, 글 읽기를 함께 배치했습니다. 실제 생활공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기보다, 한 가족의 노동과 생활을 한 화면에 압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단원은 현실을 단순히 사생한 것이 아니라,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관계와 심리적 긴장감을 하나의 화폭 안에 압축해 보여주기 위해 단원 특유의 다시점(多視點) 구도를 활용해 이 방을 연출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고정관념을 잠시 내려놓고 세부 묘사를 다른 눈으로 살펴보면, 상투적인 교과서적 설명 뒤편에서 가난과 노쇠, 돌봄의 부담이 뒤엉킨 한 가족의 비극적 초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1. 책을 등지고 앉은 사람

이 그림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인물은 바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책 읽는 어린 학동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확대해 보면 전혀 다릅니다. 저는 기존의 통념과 달리 그는 어린 학동이 아니라, 기억을 잃고 아이처럼 퇴행해버린 늙은 아버지로 읽힙니다.

뒤통수와 정수리를 확대해 보면 머리숱이 풍성한 동자의 댕기머리와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만약 단원이 어린 학동을 그린 것이라면, 다른 작품에서 보이는 어린아이들처럼 진한 흑발의 댕기머리를 좀 더 분명하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정수리와 뒤통수의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하고 두피가 드러나는 듯한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얼굴의 이목구비와 입매 역시 포동포동한 어린아이보다는 나이 든 사람의 모습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눈꼬리와 콧방울이 처진 듯한 얼굴선, 앞으로 굽은 등, 그리고 유난히 굵어 보이는 손과 손가락의 마디까지 하나하나 살펴보면, 제 눈에는 이 인물이 어린 학동보다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성인 남성, 더 나아가 노인에 가까운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는 윗도리만 간신히 걸쳤을 뿐, 바지를 완전히 벗어던진 채 맨살로 방바닥에 앉아 있습니다. 예법을 중시하던 사회에서 학동이 대낮에 가족 앞에서 이런 행태를 보였다는 설명은 제게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이는 인지 능력을 크게 잃어버린 노인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바지를 벗어던지고, 이마를 죄던 망건과 상투마저 헤쳐버린 돌봄의 참혹한 한계 상황으로 보입니다.

바닥에 펼쳐진 서책의 압도적인 크기와 판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통설처럼 천자문이 아니라 『동몽선습』이나 『동몽필습』, 혹은 『격몽요결』 같은 아동용 유교 윤리 입문서일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그림 속 책은 인물의 상체 절반을 가릴 정도로 상당히 크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화면 구성상의 회화적 과장이 다소 가미되었다 하더라도, 일반 서민 가정에 보급될 수 있는 서책 중 이처럼 큼지막한 규격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목판본이 바로 이들 기초 입문 교재의 대자본(大字本)입니다. 실제로 서당과 가정에서 널리 쓰인 이들 대판본은 가로 약 20~22cm, 세로 약 32~34cm에 달할 만큼 웅장한 크기를 지녔습니다.

여기에 본문 구성과 판식(板式) 역시 결정적입니다. 보통 한자 옆이나 네모난 광곽(匡郭, 테두리선) 바깥 여백에 훈음이나 잔주석이 빽빽하게 붙어 있는 일반 주해서들과 달리, 그림 속 서책은 테두리 바깥에 아무런 주석도 없이 여백이 휑하게 비어 있습니다.

네모난 광곽 안쪽에 굵고 큼직한 본문 글자만 넓은 행간을 두고 듬성듬성 배치된 무주(無註) 목판본 형태는, 4자 1구의 운문으로 빽빽하게 채워지는 천자문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이는 『동몽선습』, 『동몽필습』, 『격몽요결』과 같은 유교 입문서에서 볼 수 있는 산문형 본문 편집 체제와 상당히 유사합니다. 즉, '어린아이의 어리석음을 깨우친다(蒙)'는 뜻을 지닌 유교의 기초적인 윤리 교재들입니다.

여기에 거친 숨결을 품은 두툼한 전통 닥종이의 질감 위에 굵직한 먹선으로 박아 넣은 대자본의 판형은, 화폭을 세밀하게 들여다볼수록 당대 서민가에 보급되던 그 투박한 종이결의 물성을 고스란히 전해줍니다.

[필자가 소장중인 동몽필습]

참고로 제가 소장 중인 『동몽필습』 책의 사진입니다. 저의 아버지께서도 읽으시던 책입니다. 다른 책도 몇 가지 있는데 글자의 배치로 봐서 작품 그림과 비교 시 천자문은 아닌 것 같고, 명심보감이나 다른 책들도 대부분 테두리 상단에 주석이 있어서 가정에 있을 만한 책 중에 주석이 없는 것으로 추려보면 읽고 있는 책은 동몽 계열 서책이 아닐까 합니다.

여기서 저의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 봅니다.

아버지는 정식으로 학교 문턱을 넘어보신 적이 없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노름 빚으로 집안이 완전히 풍비박산 나면서, 어린 아버지는 부잣집으로 들어가 거의 종처럼 얹혀살며 거친 세월을 견뎌야 했습니다. 서당이나 학교는 꿈도 꾸지 못했고, 그저 부잣집 도련님이 사랑방에서 훈장님께 글을 배울 때 문밖에서 귀를 곤두세우며 어깨너머로 주워들은 것이 배움의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배움에 대한 갈망과 한(恨)은 평생 가슴에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 어깨너머의 공부만으로 한글과 한문을 스스로 깨치셨고, 배움이 짧은 것을 늘 안타까워하며 자식에게 글자 쓰는 법을 다시 묻고 배우기도 하셨습니다. 밤이 깊어 사방이 고요해지면 아버지는 늘 방에서 홀로 책장을 넘기며 웅얼웅얼 소리를 내어 글을 읽으셨습니다. 안방에 계시던 어머니는 잠을 설친다며 시끄럽다고 저를 시켜 "가서 아버지 글 읽는 소리 좀 그만 내시라고 해라" 하는 껄끄러운 심부름을 자주 보내곤 하셨습니다. 문풍지 너머로 들려오던 아버지의 낮고 거친 독경 소리, 그리고 어머니의 핀잔 섞인 잔심부름은 어린 시절 제 기억 속에 박힌 가장 선명한 밤의 풍경이었습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저는 저 돌아앉은 인물을 처음 마주했을 때 어린아이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저의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다행히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정신을 온전히 지키시며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을 잃지 않으셨지만, 백발의 노인이 되어서도 밤마다 책장을 넘기며 웅얼웅얼 글자를 읊조리시던 그 모습이 화폭 속 굽은 등 위로 겹쳐 보였습니다. 아버지가 닳도록 읽으시던 책이 바로 『명심보감』과 『동몽필습』이었습니다. 저의 독특한 해석은 이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유년의 기억과 아버지의 삶이라는 렌즈를 거쳐 도출된 것입니다.  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나네요. 

그림 속 인물이 쥐고 있는 책은 배움의 즐거움을 누리는 독서가 아닙니다. 가족의 이름도, 사람으로서의 존엄도 다 잃어버린 채 유아기로 퇴행했지만, 젊은 날 뼈에 새겨지도록 읊조렸던 첫 교재의 서문만이 뇌리의 맨 밑바닥에 남아 빠진 이로 글자를 더듬으며 무의식중에 웅얼거리는 서글픈 잔상인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귀하다'는 글귀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잃고 발가벗겨진 채 주저앉은 노인의 모습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극적 역설을 자아냅니다.

유교 사회의 법도로는 용납될 수 없는 이 처절한 광경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기에, 젊은 며느리는 차마 시아버지를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수치심과 당혹감에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방 안에는 공부하는 장면이라면 흔히 기대할 만한 지필묵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대낮에 옷을 벗어던진 자식이었다면 부모가 당장 훈계했겠지만, 며느리는 고개를 돌리고 아들은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자리를 짤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감히 손을 댈 수도 훈계할 수도 없는 집안의 최고 어른(노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또 저의 서당 시절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이미 공식적인 서당은 거의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저의 형님도 서당에 다니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동네에 학식이 높으신 어르신 한 분이 계셨고, 젊을 때 많은 아이들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그분 댁에 가면 한지로 만든 책장을 여러 겹의 끈으로 꿰어 제본한 옛날 책들이 빼곡히 차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대로 보관하고 계셨다면 가보가 되었거나, 박물관에 기증해도 엄청난 보물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저와 동네 아이 한명해서 딱 2명만 방학을 이용하여 그 훈장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고, 그분이 노쇠하셔서 그게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달 남짓만 다녔기에 천자문의 앞쪽만 배우다 말았습니다. 그리고 서예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비용은 쌀인지 보리인지 기억 안 나지만 집에서 거둔 곡식 몇되였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제가 같이 수학한 친구보다는 서예만큼은 더 잘 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인지 서예 실습한 것을 집으로 가져오면 어머니가 뿌듯해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저는 어린 시절의 제 서당 경험 때문에 한 가지 의문을 떨칠 수 없습니다. 서당은 글자만 외우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어른을 어떻게 부르는지, 부모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기본적인 유교 예법을 함께 배웠습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서당에 보내는 이유에 이것도 큰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방학때 한달 남짓 가서 한자를 배워야 얼마나 배웠겠습니까?  아이들이 태권도 학원을 다니다가 어느날 호칭이 엄마에서 어머니로 바뀔 때 부모가 뿌듯해 하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요? 

물론 제가 다닌 것은 조선시대 서당이 아니라 훨씬 뒤의 작은 마을 서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가 경험한 서당에서 ‘배움’은 단순히 한자를 몇 자 외우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서당에서 글을 배운 10세 전후의 학동이라면 대낮에 가족들 앞에서 하의를 완전히 벗은 채 책을 읽고 있다는 기존의 설명은, 제 경험으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이토록 모호하게 남겨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치열하게 논쟁하게 만드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단원 김홍도가 우리에게 남겨 놓은 천재적 이중성의 미학인지도 모릅니다. 하나의 답을 정해 놓고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작은 단서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서로 다른 가설을 세워 끝까지 들여다보는 것. 어쩌면 엔지니어인 제가 단원의 그림에 빠져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원이 어린아이를 그릴 때 대체로 진한 흑발의 댕기머리를 분명하게 표현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인물의 머리 표현은 더욱 묘하게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단원은 왜 상투가 있어야 할 자리를 이렇게 흐릿하게 처리했을까요?

저는 그것이 단순한 붓질의 실수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단원이 상투 자리에 남겨둔 흐릿한 먹 번짐과 얼룩은, 훗날 붓끝의 진실을 읽어낼 이에게만 살포시 문을 열어주는 우아한 탈출구처럼 보입니다.

겉으로는 부지런히 일하고 글을 읽는 태평성대의 서민 풍경(희·락)으로 위장했지만, 그 껍질을 한 겹 벗겨내면 늙고 병들어 기억을 잃어버린 부모를 노동의 공간 한가운데 두고 묵묵히 보살펴야 했던 조선 민초들의 고단한 삶과 돌봄의 숭고함(노·애)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단원은 서민들의 희로애락을 어느 것도 가감하지 않고 날 것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해학이라는 코드에 이렇게 가슴 아픈 이야기도 숨겨 놓은 것입니다. 정말 리얼리즘의 대가다운 천재적인 발상입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에게는 평화로운 일상을, 걸음을 멈추고 확대해 들여다보는 이에게는 삶의 무거운 진실을 건네는 이중 코드는 시대를 초월한 대가만이 부릴 수 있는 예술적 마술입니다. 이처럼 치열한 해석의 충돌을 부르는 이 그림은 단원이 민초들을 향한 깊은 연민의 온도를 가장 정확하게 복원해 놓은 작품이며, 단원은 당대의 한계 속에서도 예술가의 양심과 리얼리즘을 지켜내며 진실을 화폭에 아로새긴 진정으로 위대한 천재 화가였습니다.

2. 자리를 엮는 중년 남성

이 사람은 이 가정의 가장이자, 침묵으로 가계를 짊어진 아들로 읽힙니다. 머리에는 양반 사대부의 마지막 자존심인 네모난 사방관(四方冠)을 얹고 정갈하게 턱수염과 콧수염을 기르고 있으며, 겉옷인 도포만 벗었을 뿐 흰 홑바지를 단정히 입고 무릎을 꿇어앉은 자세입니다. 방바닥에 자리틀을 놓고, 무거운 돌이나 쇠로 만든 추인 고드랫돌에 날실을 감아 양손으로 앞뒤로 교차해 넘기며 자리를 엮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어깨는 거친 노동자의 다부진 근육이 아니라 마른 선비의 골격이며, 손가락 끝은 이미 굳은살이 박여 숙련된 장인의 손놀림으로 움직입니다. 시선은 날실이 얽히는 자리틀 바닥에 고정되어 있으며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늙은 아비의 웅얼거림과 아내의 타오르는 침묵을 모를 리 없으나, 오직 묵묵히 손을 놀리며 가족의 마지막 생명줄을 엮어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남성이 하고 있는 자리짜기와 흔히 말하는 돗자리짜기는 도구와 작업 방식에서 엄연히 다릅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돗자리짜기는 대형 입식 자리틀을 세우고 정밀한 빗살 도구인 바디를 걸어 작업하는 2인 1조 방식입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한 사람이 긴 대나무 바늘(바딧살)로 왕골이나 풀을 날실 사이에 밀어 넣어주면, 맞은편 사람이 바디를 힘차게 당겨 바탕질을 하며 촘촘하게 쳐서 엮습니다. 작업 속도가 월등히 빠르고 짜임새가 균일하여 완성도 높은 돗자리나 가마니를 만들 수 있는 대단히 효율적인 직조 방식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집안에 이 2인 1조 방식의 입식 자리틀이 있었습니다. 가마니를 짜는 가마니 바디도 있었고 돗자리를 짜는 왕골 돗자리용 바디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형님이 가보처럼 보관하고 있지만 80년대 이후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은 없습니다. 대대로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어도 그게 뭔지도 모르는 자식이 그것을 가보로 인식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저희 집에서 가마니 짜기는 80년대 초까지도 이어졌는데, 일부는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매일 밤늦게까지 가마니를 짰던 일은 참으로 고된 노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돗자리용 바디는 개인이 쉽게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에 전문 업자에게 돈을 주고 사 와야 했고, 밑천이 제법 들어가는 도구였습니다.

반면 그림 속 남성이 하고 있는 것은 기계적 장치가 전혀 없는 원시적인 1인 고드랫돌 자리짜기입니다. 바닥에 눕혀놓은 통나무나 작은 틀에 날실을 걸고, 끝에 무거운 돌이나 쇳덩이 추(고드랫돌)를 주렁주렁 매단 뒤, 혼자서 풀 한 줄기를 놓고 양손으로 고드랫돌을 일일이 앞뒤로 넘겨가며 자리를 엮습니다. 기계적 장치가 거의 필요 없어 산에서 나무를 베어 틀을 짜고 적당한 돌을 주워다 매달면 되니 제작비는 거의 들지 않지만, 작업 속도가 훨씬 느리고 허리와 손목에 가해지는 육체적 피로도가 극심합니다.

남자의 오른쪽 허벅지 곁에는 자리를 엮기 위해 가지런히 추려둔 풀 단이 길게 놓여 있습니다.

흔히 자리의 고급 재료로 쓰이는 왕골(완초)은 줄기 단면이 매끄러운 삼각기둥 형태라 마디가 없고 대개 쪼개어 가공해 쓰며, 부들은 잎 조직이 스펀지처럼 부드러워 마디가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삼베를 엮는 삼대(대마) 역시 속대가 딱딱하여 껍질을 벗기거나 쪼개지 않은 통줄기째로는 자리를 짜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돈도 없고 일손도 없는 가난한 선비의 입장이라면, 왕골을 재배하는 데 필수적인 '항상 물을 풍족하게 댈 수 있는 비옥한 최상급 논'을 보유하고 있었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림 속 풀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줄기 중간중간에 대나무처럼 뚜렷하고 굵직한 원형 마디 흔적이 선명합니다. 앞쪽은 가늘고 납작한 윗부분이고 뒤쪽으로 갈수록 밑동의 두툼한 부피감이 살아 있는 통줄기 형태로, 쪼개지 않고 통째로 엮어 거친 자리를 만드는 갈대(노석, 蘆席)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재배 밑천이나 최상급 토지가 필요한 왕골, 별도의 가공비가 드는 삼과 달리, 강가나 습지에서 돈 들이지 않고 손쉽게 베어다 말려 곧바로 쓸 수 있는 가장 값싸고 원시적인 서민의 재료를 택한 것입니다.

흩어지지 않도록 중간중간 단단히 동여매고, 자리틀 규격에 맞춰 양 끝을 작두로 반듯하게 쳐낸 단면은 이 남자가 비록 극빈의 처지로 몰락했으나 손끝만큼은 오랜 세월 다져진 숙련된 장인의 솜씨임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생산성과 효율 면에서는 2인이 바디로 바탕질을 하는 돗자리짜기가 월등히 유용함을 알면서도 남성이 이 외로운 1인 자리짜기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제대로 된 직조기와 바디를 들일 기본 밑천조차 없는 극빈의 처지인 데다, 바디를 마주 잡고 당겨줄 일손마저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당장 실을 뽑아내야 하는 물레질에 매여 있고, 정신이 온전치 않은 늙은 아버지는 일손을 돕기는커녕 돌봄이 필요한 상태이기에, 가장 혼자서 느리고 고된 1인 수작업을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의 고드랫돌 엮기는 단순한 노동 풍경이 아니라, 도구를 살 돈도 손을 보탤 일손도 없어 가장 원시적인 방식으로 묵묵히 뼈를 깎아 생계를 잇는 몰락 양반의 처절한 고립을 그대로 웅변합니다.

자리 얘기가 나온 김에 자리에 대한 눈물나는 에피소드 하나 풀어보겠습니다. 전국민이 알고 있는 어버이의 날에 딱 한번 불러보는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일단 1절의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낳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50대 이상의 분들이라면 이 가사를 모를 리 없고 모두들 이 노래가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오실 겁니다.  제가 군대에서 처음으로 아주 빡센 유격 훈련을 했을때는 초겨울이라 눈발이 날리는 날이었습니다. 한참 잠자는 시간인 새벽에 깨우더니, 윗통 벗게 하고 땅을 구르게 하면서 온갖 훈련을 다 시켰습니다. 훈련 중에 혼자 구르는 것도 있지만 조를 짜서 하는 것도 있었는데 조를 짜서 몸을 밀착시킨 후 움직일때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몸을 오돌오돌 떨면서 서로 숨막힐 듯 꽉 껴안는데 앞뒤로 밀착된 남자의 따뜻한 가슴의 온기가 그렇게 좋은 건지 몰랐습니다. 두번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귀한 경험입니다. 훈련을 다 시킨 후에 전부 실내로 집합시켰습니다. 

단상에 노래 가사를 띄워 놓고 어머니의 노래를 하라고 시키는데 노래를 어느 정도 시작하자 한두명이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얼마 안되어 한명도 예외 없이 다들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큰소리를 내며 엉엉 우는데 결국은 저도 마찬가지로 엉엉 우느라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습니다. 남자들이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단체로 그렇게 펑펑 우는 장면을 경험하는 것은 아마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전 남자라면 군대 가서 이런 경험도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특별히 이 가사에서 턱 막히면서 먹먹한 순간이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입니다. 문자 그대로 이것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입니다. 

어릴때 저의 집의 바닥재는 신문지나 달력 같은 어지러운 잡다한 것들로 되어 있고 그 위에 까슬까슬한 왕골돗자리를 깔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좀 산다고 하는 집은, 걸레받이 위치까지 깔끔하게 콩기름을 먹인 노란 기름종이를 두른 것으로 기억하는데 보기에도 좋고 먼지도 안나고 방수도 잘 됩니다. 그런 친구집에 갔을 때 참 부러웠습니다.  저는 친구들을 집안까지 데리고 온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름에는 더워서 윗통을 벗고 잤는데 왕골돗자리의 낡은 부분의 왕골이 바스러져 등을 뚫고 들어왔기에 아침에 일어나면 상당히 따끔거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오줌이라도 싸면 어머니가 진자리(문자 그대로 왕골로 된 돗자리)에서 마른 자리로 옮겨 주시곤 했습니다. 그래서 오줌을 싸면 아침에 일어나서 자리도 걷어서 햇빛에 말리고 그 아래 젖은 종이는 기름 먹인 고정된 바닥재가 아니다 보니 그냥 걷어내고 다른 종이로 교체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키를 머리에 씌워 주시고 나무됫박을 주시면서 이웃집에서 소금을 얻어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옆집에 갔는데 소금을 그냥 주시는 게 아니라 막 뿌리는 바람에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후다닥 집으로 왔습니다. 그러면 다들 기다렸다가 박장대소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번 다시는 소금 얻으러 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오줌을 안 쌌기 때문인지 자존심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3. 물레를 돌리는 젊은 여인

이 여인은 수치심과 죄책감에 휩싸인 며느리입니다. 가체 없이 머리카락을 정갈하게 뒤로 넘겨 쪽을 찐 쪽머리를 하고 있으며, 흰색 홑저고리의 소매를 팔꿈치 위로 걷어붙이고 풍성한 긴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목화솜에서 무명옷 한 벌이 나오기까지는 씨아기(씨 빼기) - 솜타기(활타기) - 실 잣기(물레질) - 무명날기(날실 맞추기) - 베매기(풀먹이기) - 베짜기(직조)라는 눈물겨운 6단계의 가혹한 노동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여인이 지금 방 안에서 하고 있는 작업은 바로 그 6단계 중 한 올 한 올 정성을 다해 실을 뽑아내는 제3단계인 '실 잣기(물레질)'입니다.

흔히 물레질을 잘 모르는 이들은 커다란 물레 바퀴에 실이 칭칭 감겨 나가는 줄로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큰 바퀴는 실을 감는 통이 아니라, 회전력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수동 발동기일 뿐입니다. 바퀴 둘레에 걸린 끈(물렛줄)이 앞쪽 나무틀에 꽂힌 가느다란 쇠꼬챙이, 즉 '가락'을 맹렬한 속도로 돌려주는 구동 장치입니다.

그림을 가만히 보면 여인의 손끝과 물레 사이의 허공에는 오직 팽팽한 한 가닥의 실만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물레를 잘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여러 올의 실을 귀찮아서 생략해 버린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는 생략이 아니라 실제 물레질의 메커니즘을 뼛속까지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그려낸 소름 돋는 디테일입니다.

실이 만들어지는 진짜 원리는 여인의 손끝과 저 쇠꼬챙이 끝 사이의 허공에서 일어납니다. 여인은 왼손에 말아 쥔 솜고치(고치솜)에서 솜뭉치를 슬슬 풀어내며 뒤쪽 위로 팔을 길게 뻗어 올립니다. 그러면 고속으로 회전하는 가락 끝에 걸린 솜 섬유가 꼬이면서 팽팽하고 질긴 단 한 가닥의 실로 잣아져 나옵니다. 실이 충분히 늘어나고 꼬임이 단단해지면, 여인은 뻗었던 팔을 다시 가락 쪽으로 살며시 내리며 회전하는 가락 몸통에 실을 차곡차곡 감아 실토리(타래)를 만듭니다. '팔을 뻗어 실을 잣고, 팔을 모아 가락에 감는' 이 고도의 리듬과 호흡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물레는 최대한 바닥에 고정하려고 넓적하고 큰 돌을 중간 연결하는 가로대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단원이 포착한 장면은 바로 여인이 왼손을 허공 높이 쳐들어 손에 든 솜고치의 솜에서 실을 최대로 잣아내고 있는, 물레질의 전 과정 중 장력과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결정적인 순간의 스냅샷(snapshot)입니다. 물레 바퀴의 회전 가속도와 팽팽하게 뻗은 실 한 올의 긴장을 화폭에 정지화면처럼 박제해 낸 이 탁월한 동작 묘사는, 역동적인 삶의 현장을 귀신같이 낚아채는 스냅샷의 대가 단원 김홍도의 비범한 관찰력을 증명합니다.

그림 속 여인은 목화솜에서 무명실을 뽑고 있지만, 제가 어릴 적 저희 집에서는 누에를 많이 쳤습니다. 누에고치째로 팔기도 했지만 실을 뽑아 명주실 상태로 내다 팔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물레를 이용해 명주실을 뽑으실 때, 실을 다 뽑고 나면 나오는 번데기를 얻어먹겠다고 졸린 눈을 비비며 기다리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아직 실을 다 뽑지도 않았는데 서둘러 번데기를 건져 먹다 맴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여인은 고개를 완전히 돌리지 못하고 비스듬히 꺾은 채 곁눈질하듯 시선을 비껴 두고 있습니다. 서슬 퍼런 유교 사회에서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벗어젖힌 몸과 민망한 행색을 차마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어 겪는 극심한 난처함과 수치심 때문에 뺨과 턱 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습니다.

4.방 안에 도사린 비극과 결단의 그림자

앞의 세 장면은 그림에서 관찰되는 모습과 노동 형태를 바탕으로 읽어본 묘사입니다. 그렇다면 그 장면 뒤편에는 과연 어떤 가족의 이야기가 숨어 있었을까요. 이제부터는 그 침묵 뒤의 서사를 상상으로 엮어보았습니다.

가세는 이미 기울 대로 기울어 자식의 흔적조차 찾을 길 없고, 남편은 허리가 끊어질 듯 자리를 엮고 아내는 밤낮으로 물레를 돌려도 내일의 끼니조차 기약할 수 없는 극빈의 절벽입니다. 어린 자식이라면 야단을 쳐서 바지를 입히련만, 상대는 가문의 어른이자 남편의 늙은 친부이기에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훈계할 수도, 억지로 손을 대어 옷을 입힐 수도 없습니다.

며느리의 굳게 다문 입술 안쪽에서는 피눈물 같은 금기의 말이 맴돕니다. 이대로는 세 사람 모두 굶어 죽는다는 공포, 이제 그만 아버님을 저 깊은 산속으로 모셔야 하지 않겠느냐는,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참혹한 결단의 무게가 가슴을 짓누릅니다.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해, 여인은 솟구치는 죄책감과 당혹감을 삭이며 헛돌 듯 거칠게 물레 바퀴를 돌려댑니다.

이가 다 빠져 웅얼거리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인의 무구한 글소리, 그 소리를 지워버리려는 듯 돌아가는 물레의 파열음,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붉어진 뺨을 숨긴 채 시선을 돌리는 며느리, 그리고 늙은 아비의 마지막 수의(자리)를 짜듯 묵묵히 고드랫돌을 넘기는 아들.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니,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한 점이 어느새 조선 후기 한 가족이 감당해야 했던 생로병사와 가족 해체의 비극으로 변해버립니다.

5. 젊은 여인은 누구였을까?

그림 속 두 인물의 묘사를 세밀하게 대조해 보면, 상당한 나이 차를 지닌 남편과 재취(재취부인)의 관계로도 읽어볼 수 있습니다.

신체 묘사에서 드러나는 뚜렷한 세대 차이입니다. 남편은 사방관 아래로 드러난 이마의 깊은 고랑 주름과 푹 꺼진 관자놀이, 짙게 늘어진 콧수염과 턱수염에서 세월의 풍파를 정면으로 맞은 완연한 4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 장년의 모습입니다. 살집이 빠져나가 뼈마디가 도드라진 마른 체구는 오랜 가난과 노동으로 쇠약해진 가장의 육체입니다. 반면 여인은 주름 없이 팽팽한 턱선과 탄력 있는 팔뚝, 매끄러운 목덜미를 지닌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생기 있는 체구를 보여줍니다. 남편의 굳은 체격과 대비되는 생동감 있는 신체선은 두 사람 사이에 상당한 나이 차가 존재함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 젊은 처자는 몰락한 양반가로 팔려오듯 들어온 재취였을지도 모릅니다.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 끼니조차 잇지 못하고 정신이 온전치 않은 늙은 시아버지까지 모셔야 하는 집에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온 여인의 기구한 팔자가 엿보입니다. 꽃다운 나이에 들어와 하루 종일 좁은 방구석에서 쳇바퀴 돌듯 물레만 돌려야 하는 가혹한 운명에 대한 한(恨)이 서려 있습니다.

오랜 세월 정이 든 본처였다면 늙은 시아버지의 수발에 어느 정도 무뎌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재취의 입장에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낯설기만 한 늙은 시아버지가 대낮에 하의를 완전히 벗어던진 채 웅얼거리는 광경은 견디기 힘든 충격과 지독한 수치심, 모멸감으로 다가옵니다. 정면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 붉게 달아오른 여인의 얼굴은 이 끔찍한 곤혹스러움의 직관적 표출입니다.

남편에게 시아버지는 비록 정신을 놓았어도 차마 버릴 수 없는 자신의 친부이자 효(孝)의 대상입니다. 반면 젊은 재취에게 시아버지는 젊은 날의 청춘을 저당 잡고 자신과 남편의 숨통을 틀어막는 거대한 족쇄이자 공포입니다. 그 온도차가 방 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듭니다.

6. 그럼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나?

등 돌린 인물이 학동이 아니라 늙은 아버지라면, 이 방 안에는 메울 수 없는 상당한 서사적 공백이 하나 생겨납니다. 한창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웃음소리가 넘쳐나야 할 젊은 부부의 좁은 방 안에, 왜 자식의 흔적은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몰락한 양반 가문에 닥쳤던 또 다른 상실의 역사를 조심스럽게 상상해보게 됩니다.

가장은 앓아누운 본처의 약값을 대느라 대대로 내려오던 얼마 안 되는 문전옥답과 가재도구를 몽땅 탕진했습니다. 지극정성으로 탕약을 달였으나 본처는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집안에는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와 당장 내일 굶어 죽을 위기만 남았습니다.

본처가 남긴 어린 아들이 있었다면, 그 아이들은 한창 글을 배우거나 뛰놀아야 할 나이에 입 하나를 덜고 빚을 갚기 위해 부잣집의 종(머슴살이)으로 뿔뿔이 흩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양반의 핏줄인 어린 자식들을 남의 집 마구간과 들판으로 내몰아야 했던 아버지는, 평생 가슴에 칼을 품은 죄인의 심정으로 묵묵히 뼈를 깎는 노동에 매달립니다.

세 아들을 다 떠나보내고 정신이 온전치 않은 늙은 시아버지만 남은 빈털터리 집에, 젊은 처자가 팔리듯 재취로 들어왔습니다. 남편은 사별한 아내 대신 들어와 고생만 하는 젊은 재취에게 미안함과 빚진 마음을 안은 채, 말없이 손마디가 부서져라 고드랫돌을 넘깁니다.

손자들이 어디로 팔려갔는지, 집안이 왜 이토록 적막한지도 모른 채, 그저 젊은 날 뼈에 새겼던 『동몽필습』의 글자만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텅 빈 방 안의 침묵을 찢어놓는 늙은 아버지.

가산 탕진, 전처의 죽음, 뿔뿔이 흩어진 아이들의 부재, 그리고 젊은 재취의 원망과 수치심. 이 모든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그림 뒤에 덧붙인 상상입니다. 그러나 다시 그림을 바라보면, 자식이 사라진 방 안에서 세 사람이 나누는 침묵의 무게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작품에서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거나 이상하게 왜곡되어 있거나 정상적으로 그렸으나 보는 이로 하여금 왜곡되게 보게 하는 것, 이게 단원의 특징입니다. 그러기에 단원풍속화첩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해학 코드 뒤에는 결국 눈물 훔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단원의 블랙유머라 봅니다. 현실의 날것을 그대로 보여 주어 웃다가 울게 만드는 단원만의 코드입니다.

늙은 아버지는 책을 더듬고, 아들은 고드랫돌을 넘기고, 젊은 여인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립니다.

김홍도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그 방 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꾸만 묻게 됩니다.



참고 동영상(무명 직조) :
[전통 무명 직조 과정]

참고 동영상(자리 만들기) : [왕골 돗자리 만들기]

참고 동영상(어머니의 마음) : [어머니의 마음(어버이날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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