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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자라를 만난다 : 백로 — 백로의 20미터, 나와의 경계선
2026년 9월 16일, 날씨 맑음
탄천의 물길을 걷다 보면 사람과 야생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들을 마주한다. 물속에 납작 엎드린 자라는 발걸음 소리에도 2~3미터 거리에서 눈만 껌뻑이고, 잉어나 가물치는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려도 제 갈 길을 느긋하게 헤엄친다.
영리하기로 소문난 까치는 한술 더 뜬다. 내가 좋은 건지, 아니면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앞선 건지 먼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불과 1미터 남짓한 발치에서 멈추기도 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간 눈으로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는 그 대담한 눈빛 앞에서는 야생이라는 거리감이 무색해진다. 그 덕분에 대머리 까치는 머리에서 새로 올라오는 깃털 하나하나까지 세세히 찍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백로는 다르다. 백로의 덩치 큰 사촌 격인 왜가리조차 대략 10미터 언저리까지는 무심하게 자리를 지켜주곤 했는데, 눈부시게 하얀 이 녀석만큼은 유독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제일 가까이 다가간 것이 기껏해야 20여 미터 남짓. 정확한 거리는 몰라서 다음에는 레이저 측정기로 한번 재봐야겠다. 이 정도 거리에서 한 발짝만 더 내딛으려 해도 바로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그래서 백로를 촬영한 영상을 보면 나를 경계하는 것 아니면 이미 날아가고 있는 장면이 대부분이고, 그나마 다른 녀석들에 비해 영상도 많지 않다.
이에 대해 검색해 보니 FID라는 나의 지적 허영심을 드높여 줄 아주 멋진 단어를 찾아냈다. 조류 행동학에서는 위협이 다가올 때 날아오르기 시작하는 거리를 비행개시거리(FID, Flight Initiation Distance)라고 부른다. 서식 환경과 상황에 따라 차이가 크다고 하는데, 탄천의 백로가 허락한 20여 미터는 도시의 소음과 사람들의 동선을 겪으며 녀석 나름대로 좁히고 좁힌 경계선일 것이다.
녀석을 관찰하다 보니 덤으로 영어 공부도 된다. 백로는 영어로 이그릿(Egret). 녀석이 먹이를 노리며 얕은 물속을 조심스레 헤치고 걷는 동작은 워킹(walking)이 아니라 웨이딩(wading)이라 부르고, 백로처럼 이런 방식으로 먹이를 찾는 새들을 웨이더(wader, 섭금류)라고 부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살의 저항을 가르며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발을 딛는 그 세심한 움직임이, 탄천 물가에 선 녀석의 태도를 꼭 알맞게 설명해 주는 듯하다.
아, 오늘은 새로 배운 단어가 4개로 용량 초과다. 3개로 제한하려고 했는데... wading과 wader가 같은 의미에서 파생된 단어이니 그건 합쳐서 오늘 새로 배운 영어 단어는 3개라고 치겠다.
물속 생물과 달리 몸을 숨길 곳도 없고, 사방이 열린 물가에서 오로지 인내로 물고기를 노려야 하는 백로에게는 날아오를 수 있는 하늘만이 유일한 피난처일지 모른다. 물결을 응시하던 녀석이 인기척을 느끼고 커다란 날개를 펼쳐 미끄러지듯 날아갈 때, 그 고요한 날갯짓 뒤에는 생존을 향한 팽팽한 긴장이 배어 있다.
발치까지 다가오는 까치의 친근함도 정겹고 10미터 앞에서 버텨주는 왜가리의 덤덤함도 고맙지만, 20여 미터 밖에서 지키는 백로의 침묵 또한 귀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20여 미터는 야생과 인간이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며 만들어낸 가장 정직하고 안전한 간격일 것이다.
조급하게 좁히려 애쓰기보다, 물가에 서서 그저 흐르는 물처럼 가만히 머물러 본다. 카메라를 든 불청객이 아니라 갈대숲을 흔드는 바람이나 물가의 돌멩이처럼 백로에게 자연스러운 배경이 되는 날.
그때가 되면 녀석도 물속을 천천히 웨이딩(wading)하며 15미터, 10미터의 문 앞으로 조금씩 다가와 줄지 모를 일이다.
물론 그 문을 통과할지 말지는 온전히 백로의 몫이겠지만, 멀게만 느껴졌던 까치가 먼저 다가와 준 것처럼 백로에게도 한번 희망을 걸어본다.
백로 영상 1 => https://www.youtube.com/shorts/b6ZumGP0rgQ
백로 영상 2 => https://www.youtube.com/shorts/7yGFwtmfbm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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