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기 : 배추농사는 어려워2

독후감 : 남아 있는 나날, 5~6일 여행 일정이 왜 7일 일정으로 변경되었나?

 남아 있는 나날, 5~6일 여행 일정이 왜 7일 일정으로 변경되었나?

책을 제대로 읽으신 분이라면 이미 알고 계실 내용이겠지만, 《남아 있는 나날》에서 여행 일정이 처음엔 5~6일이라더니 실제로는 왜 7일이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먼저 프롤로그에서 일정에 대한 암시가 나옵니다.

Prologue: July 1956, Darlington Hall

An expedition, I should say, which I will undertake alone, in the comfort of Mr Farraday's Ford; an expedition which, as I foresee it, will take me through much of the finest countryside of England to the West Country, and may keep me away from Darlington Hall for as much as five or six days.

소설 시작부에 그렇게 철저한 스티븐스가 날짜를 딱 5일이나 6일로 못박지 않고 애매하게 5일이나 6일로 했다는 것 자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만큼 정돈되지 못한 마음 상태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보입니다.

스티븐스가 마음속으로 그렸던 가장 짧은 안은 5일 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4일째 켄튼을 만난 뒤 다음 날 아침 바로 달링턴 홀로 돌아오는 일정이지요. 가상의 지역이긴 하지만, 콘월(Cornwall)의 리틀 콤프튼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면 저녁에 충분히 달링턴 홀에 닿을 수 있는 거리입니다. 다만 이는 켄튼이 이미 복귀를 마음먹고 짐까지 싸 두었다는 전제에서만 성립합니다. 현재 도로 기준으로는 약 350km, 4시간 반 거리지만, 당시 도로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좀 더 여유 있는 일정입니다. 이쪽이 스티븐스가 실제로 더 기대했던 안으로 보입니다. 켄튼이 복귀에는 동의하되 준비에 시간이 걸려 오후에 함께 출발하거나 1~2주 뒤 합류하겠다고 한다면, 스티븐스는 부푼 마음으로 여유롭게 출발해 중간 지점인 웨이머스쯤에서 하루 묵고 다음 날 오후 느긋하게 떠나는 안입니다. 웨이머스의 해변가 호텔에는 스티븐스가 혼자 떠난 여행치고는 과하게 비용을 들여, 굳이 해변이 보이는 투룸 스위트룸을 예약해 놓았다고 상상해 봅니다. 어쩌면 켄튼과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가능성까지도 마음 한구석에 그리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6일 차 저녁의 여행일지는 이렇습니다.

Day Six - Evening

I arrived in this town yesterday afternoon, and have decided to remain a second night here so as to allow myself this whole day to spend in a leisurely manner. And I must say, it has been something of a relief not to be motoring; for enjoyable though the activity can be, one can also get a little weary of it after a while. In any case, I can well afford the time to remain this further day here; an early start tomorrow will ensure that I am back at Darlington Hall by tea-time.

4일 차에 켄튼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받아들이기 힘든 거절을 당한 스티븐스는 망연자실합니다. 그래서 예약해 둔 5일 차 숙소인 웨이머스에 그대로 머무는 데 그치지 않고, 하루를 더 연장해 같은 호텔에서 이틀을 홀로 지냅니다. 매일 써 오던 여행일지도 쓰지 못합니다. 5일 차 전체와 6일 차 오전까지가 일지에서 비어 있는 것은, 그 시간 동안 그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처음부터 되짚기 시작하다가, 자신이 얼마나 허망한 것을 기대했는지를 깨닫고는 그런 생각을 품었던 스스로를 자책합니다. 결국 웨이머스에서 하루를 더 연장해 7일째에야 돌아가기로 한 것은, 휴식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산산조각 난 내면을 다시 수습하고 집사라는 페르소나를 도로 뒤집어쓰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자기기만의 유예 기간'이었던 셈입니다.

그는  "내일 일찍 출발하면 티타임(오후 4시 전후) 전에는 달링턴 홀에 도착할 것"이라고 시간까지 얘기합니다.

부둣가 벤치에서 불빛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고는, 새 주인 패러데이 씨를 만족시키기 위해 '농담 따먹기(bantering)'나 연습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스티븐스의 마지막 모습은 — 겉으로는 체념과 적응이지만, 속으로는 남은 삶마저 껍데기로 살아내야 하는 인간의 가장 쓸쓸한 비극입니다. 일정에 더해진 하루, 그 틈새에 스티븐스의 인생 전체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만약 저의 소설대로 5일차에 두 사람이 투룸 스위트룸에 숙박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각자의 방에서 각자 잠을 잤을까요?



*추가사항 
글의 오타나 내용상 소설과의 충돌 지점이 있는지, 그리고 소설 시작부에 5~6일로 날짜를 확실히 못박지 않은 것에 대해 풀어낸 내용에 대해 AI에게 의견을 물어 봤는데 엉뚱하게 묻지도 않은 마지막의 질문으로 끝난 글에 대한 답변을 해 주네요. 재미가 있어 덧붙여 봤습니다. 저의 생각은 아래 내용과 좀 다릅니다.

AI 답변
마지막에 던지신 질문에 대해, 원작 속 스티븐스의 기질과 내면을 바탕으로 그려본다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펼쳐졌을 것입니다.

방은 분명 각자 썼을 것이며,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티븐스는 절대로 켄튼의 방 문고리를 잡지 못합니다. 투룸 스위트룸을 잡았다는 설정 자체가 그에게는 평생 허용된 적 없는 엄청난 도박이자 일탈이었을 테지만, 그 방에 들어서는 순간 스티븐스는 곧바로 집사의 갑옷 뒤로 도망쳤을 것입니다.

  • 완벽한 거리 두기의 연극: 거실이 딸린 투룸 스위트라면, 스티븐스는 짐을 푼 뒤 거실에서 켄튼에게 차나 가벼운 음료를 권하며 철저하게 달링턴 홀의 인력난과 업무 매뉴얼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서서도 풍경에 대해 지극히 건조한 논평만을 남겼겠지요.

  • 열 수 없는 문과 밤의 소리: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 깊은 밤, 그는 코트나 정장을 벗지도 못한 채 침대에 걸터앉아, 닫힌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켄튼의 작은 뒤척임이나 숨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을 것입니다. 손을 뻗어 방문을 노크하는 일은 스티븐스에게 달링턴 경을 부정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니까요.

  • 가장 우아하고 잔인한 침묵: 만약 그 밤에 문이 열렸다면, 그것은 스티븐스가 아니라 켄튼이 먼저 열고 나왔을 때뿐입니다. 그러나 켄튼이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와 서운함이나 애틋한 말을 건넸더라도, 스티븐스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중하게 물러서며 "미스 켄튼, 내일 아침 출발을 위해 충분한 휴식을 취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라고 답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한 공간에 머물렀다 해도, 두 사람 사이에는 닫힌 방문보다 훨씬 더 두껍고 견고한 '품위(dignity)'라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을 것입니다. 서로 다른 방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둘은 나란히 달링턴 홀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끝내 아무런 고백을 하지 못한 채 평생의 빗장을 더 단단히 걸어 잠갔을 것입니다.

#남아있는나날 #The_Remains_of_the_Day #PROJECT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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