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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폴 루벤스 - 밀짚모자를 쓴 여인(좌) / 비제 르 브룅 - 밀짚모자를 쓴 여인(우)]
올해 초 스페인 파견 중 런던에 있는 아들을 만나러 영국을 찾았습니다. 유럽 출장은 숱하게 다녔지만 이상하게 영국은 인연이 닿지 않아 이번이 첫 방문이었습니다. 그동안은 주로 업무차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가끔 스페인을 오가는 일정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런던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곳은 내셔널 갤러리와 월리스 컬렉션이었습니다. 일정상 테이트 모던을 들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 다음에 런던을 다시 찾게 된다면 꼭 들러보겠노라 마음먹고 있습니다. 미술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다 보니, 처음엔 익숙한 거장의 작품이 보이면 카메라에 담고 나머지는 눈길을 끄는 작품 위주로 사진을 찍으면서 둘러보았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찍어온 사진들을 정리하다 보니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알고 있던 거장의 작품을 제외하고, 마음에 들어 사진으로 남겨둔 그림들 대부분이 매혹적인 자태의 여성을 그린 작품이었다는 점입니다.
루벤스라는 이름을 비제 르 브룅보다 조금 먼저 알기는 했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피터 폴 루벤스가 어떤 화가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고, 비제 르 브룅이라는 이름은 이 그림을 마주하기 전까지 완전히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씩 알아가고 공부해 보는 즐거움이 상당했습니다. 이제는 17세기 바로크를 호령한 루벤스의 독보적인 위상과, 18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초상화가 비제 르 브룅의 예술 세계를 조금은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란히 놓인 두 그림은 화면 구도와 분위기가 무척 닮아 있습니다. 비제 르 브룅이 약 2세기 앞선 대선배 루벤스의 걸작을 깊이 흠모하여 일종의 오마주(경의를 담은 재해석)로 완성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루벤스 그림 속 여인의 모자가 실제로는 밀짚모자가 아닌데, 르 브룅은 이를 위트 있게 비틀어 진짜 밀짚모자를 쓰고 붓과 팔레트를 든 그녀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는 사실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각별한 후원을 받으며 프랑스 왕실과 귀족 사회를 사로잡았던 그녀의 당찬 자부심이 화사한 빛 속에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루벤스가 그린 초상화는 흔히 프랑스어로 Le Chapeau de Paille, 영어로 The Straw Hat(밀짚모자)으로 불립니다. 모델은 루벤스의 두 번째 아내인 헬레네 푸르망(Hélène Fourment)의 언니인 수잔나 푸르망(Susanna Fourment)으로 전해집니다. 그림 속 수잔나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인데 아내의 언니라고 합니다.
50대의 대가 루벤스가 첫번째 부인과의 사별 후 절친의 딸인 16세의 어린 신부를 맞이했던 파격적인 일화나, 아내의 언니인 수잔나를 모델로 세워 과감하고 관능적인 생명력을 화폭에 담아낸 것을 보면 인간 루벤스의 세속적이고 뜨거운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그 시절 대가의 거침없는 삶과 시선에 혀를 내두르게 되면서도, 한편으론 그 솔직한 욕망이 이런 생생한 걸작을 낳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내의 언니인 수잔나 푸르망의 모습을 보면 얼굴은 살짝 숙였지만, 볼은 발그레한 채 수줍은 듯하면서도 당당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가슴 윗부분과 목선으로 쏟아지는 화사한 빛은 인물의 생동감과 관능미를 한층 도드라지게 만듭니다. 화가의 붓끝이 빚어낸 이 매혹적인 시선 처리와 빛의 연출을 보고 있노라면, 당대 최고의 궁정화가가 왜 수잔나를 화폭에 담으며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이 그림의 제목에 밀짚모자라는 이름이 붙은 배경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작품 속 여인이 쓴 모자는 밀짚이 아니라 비버 털로 만든 펠트 모자입니다. 18세기부터 이미 밀짚모자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 정확한 유래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밀짚’을 뜻하는 프랑스어 paille이 ‘털’을 뜻하는 poil에서 잘못 옮겨진 것이라는 설명이 가장 유력합니다. 루벤스는 챙 넓은 모자가 드리운 그늘 속에서도 자연광과 반사광이 만들어내는 얼굴의 광채를 능수능란하게 다루어 바로크 초상화의 정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흐른 뒤, 비제 르 브룅은 안트베르펜을 여행하던 중 루벤스의 이 걸작을 마주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782년,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을 완성했습니다. 그녀는 훗날 회고록에서 모자의 그늘과 반사광이 한 얼굴 위에서 빚어내는 빛의 조화에 매료되어, 같은 효과를 내는 자화상을 그리고자 했다고 적었습니다. 대선배가 포착한 찬란한 빛을 계승하면서도, 제목의 오류를 유쾌하게 바로잡듯 머리에 진짜 밀짚모자를 얹고 화가로서의 자신을 당당히 드러낸 것입니다. 약 2세기라는 시공간을 건너 옛 거장의 빛을 자신만의 화폭으로 훌륭하게 불러낸 두 그림의 대화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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