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아의 식탁 - 샐러드, 치아바타빵

오늘도 자라를 만난다 : 자라의 손

 자라의 손

[일광욕하는 자라]

2026년 9월 14일, 날씨 맑음

우리는 흔히 사람의 것만 손이라 부르고, 동물의 것은 가리지 않고 발이라 부른다. 앞뒤 가리지 않고 네 다리로 땅을 디딘다는 이유만으로, 언어 속에서 손이라는 이름은 오직 인간만의 독점적 전유물처럼 굳어졌다. 무언가를 쥐는 기능과 직립 보행을 인간만의 우월한 징표로 여기는 것은 생명의 역사 앞에서 다소 오만한 시선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생애를 천천히 되짚어보면 그 경계는 쉬이 허물어진다. 우리는 생의 첫해를 바닥에 엎드려 네 발로 기어 다니며 시작한다. 그리고 황혼의 끝자락에 이르면 보행기나 지팡이에 의지해 사실상 다시 네 발로 땅을 짚으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다. 평생에서 온전히 두 발로 꼿꼿이 서는 시간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

어디 그뿐일까. 껑충거리며 두 발로 달리는 캥거루나, 작은 앞발로 열매를 그러쥐고 갉아먹는 다람쥐와 풀잎을 움켜쥐는 토끼를 보면, 두 발 보행이나 사지의 역할 분담 역시 인간만의 특별한 증표는 아니다. 결국 포유류라는 거대한 울타리 안에서 인간 또한 네 개의 발을 가졌을 뿐이며, 다만 앞발의 쓰임이 조금 더 섬세하게 진화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포유류를 벗어난 파충류의 세계는 어떨까. 물가에서 자라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이 생명이야말로 분명한 손을 지니고 있음을 실감한다.

물속의 자라는 그저 부유하거나 헤엄치지 않는다. 강바닥의 자갈과 돌을 들추고, 틈새를 후비며 먹이를 찾기 위해 바위를 꽉 거머쥔다. 그 손놀림은 무딘 짐승의 발길질이 아니라, 대상을 정교하게 제어하려는 노련한 석공의 손길을 닮았다.

실제로 자라의 몸을 찬찬히 뜯어보면 그 차이는 더욱 뚜렷해진다. 물살을 가르며 추진력을 만들어내는 뒷발이 부채나 노처럼 넓게 펼쳐진 형태라면, 바위를 딛고 선 앞발은 명백히 대지를 쥐기 위한 손의 골격을 갖추고 있다.

다섯 개의 손가락 중 안쪽 세 손가락에는 바위를 쪼개고 돌을 젖히기 위해 날카롭고 굳센 손톱이 단단히 돋아나 있다. 반면 바깥쪽 두 손가락은 손톱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물갈퀴 막 속으로 자연스럽게 숨어들어 있다. 험한 바닥을 헤집는 세 개의 강인한 갈고리와, 물을 밀어내는 두 손가락의 유연함이 한 손 안에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무심히 발이라 규정짓는다 해도, 거친 물살 속에서 돌을 젖히고 삶을 건져 올리는 녀석의 앞발은 결코 단순한 발이 아니다. 그것은 생을 향해 바위를 그러쥐는, 가장 정직하고 온전한 손이다.

 
[좌측의 자라의 손(앞발)과 우측의 발(뒷발)]


]탄천의 자라 영상] => https://www.youtube.com/shorts/51Y_zvlkR3c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