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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의 멜랑콜리아 I
500년간 예술가·역사가·과학자·수학자들을 매료시킨 그림
알브레히트 뒤러의《멜랑콜리아 I》이라는 판화 한 장을 가지고 500년 동안 수많은 해석이 나왔다. 그림 한 장을 놓고 AI에게 단순한 프롬프트 몇 줄을 주었더니 아래와 같은 멋진 글이 나왔다. 글 자체도 상당히 수려하게 쓰였지만 내가 정작 놀란 것은 AI의 문장력이 아니라 내용이다. 이 그림 한 장을 설명하는 데 서양의 철학, 신학, 과학, 수학, 의학, 천문학, 미술사의 지식이 총동원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이다. AI가 이런 글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것은 인간이 500년 동안 이 그림을 들여다보며 쌓아온 지식과 해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5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판화 한 장을 들여다보면서, 그 안에 있는 상징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누군가는 수학으로 접근했고, 누군가는 철학으로, 누군가는 신학과 의학으로, 또 누군가는 예술가 자신의 내면과 연결했다.
AI는 그것들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 아니다. 이미 500년 동안 쌓여온 인간의 해석과 지식을 조합한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으면서 내가 감탄한 것은 AI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한 그림을 바라보며 쌓아온 지식의 양과 깊이였다.
글에서 몇 차례 인용한 Smarthistory라는 곳도 흥미롭다. Smarthistory는 2005년 미술사학자 Beth Harris와 Steven Zucker가 시작한 비영리 온라인 미술사 교육기관이다. 지금은 800명 이상의 연구자와 전문가가 참여해 미술사 에세이와 동영상 강의를 만드는 거대한 공개 교육 플랫폼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800명이라니.
참으로 부럽기 그지없다.
우리나라에는 뒤러의 《멜랑콜리아 I》과 정확히 같은 성격의 작품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수많은 공구가 등장하는 그림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작품을 하나 찾아본다면, 나는 단원 김홍도의 <기와이기〉를 떠올린다.
재미있게도 두 그림에는 대패, 톱, 자, 먹통이라는 네 가지 공구가 겹친다.
그런데 〈기와이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에게는 단순히 조선시대 사람들이 기와를 이는 모습을 그린 풍속화만 보이지 않는다. 미술도 보이고, 과학도 보이고, 수학도 보이고, 철학도 보인다.
그래서 《멜랑콜리아 I》을 AI에게 써보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와이기〉에 대해서도 써보게 했다. 비슷한 톤으로, 가능한 한 깊고 길게 에세이를 써달라고 했다. 그런데 결과는 달랐다.
《멜랑콜리아 I》에 대한 글에 비해 깊이도, 길이도 아쉽다. 왜 그럴까? 나는 이것이 단순히 AI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전통 그림에 축적되어 있는 깊이 있는 해석 자체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기와이기〉에 대한 설명은 많다. 하지만 찾아보면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서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풍속화라는 설명, 당시의 건축 기술과 생활상을 보여준다는 설명 등이다.
그런데 《멜랑콜리아 I》을 둘러싼 500년의 해석처럼, 그림 속의 작은 물건 하나를 붙잡고 철학과 과학과 수학과 신학과 인간의 내면까지 파고드는 해석은 상대적으로 찾기 어렵다. 해석에 깊이도 없고 철학도 없다. 뒤러가 현실에 없는 '기묘한 다면체'를 던져놓아 500년간 수학자들을 괴롭혔듯, 김홍도 역시 대패질하는 사람의 발치에 자귀와 도끼가 한 몸으로 엉킨 듯한 정체불명의 도구를 무심히 흩뿌려 두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특별한 공구의 실체에 대해 의문조차 품지 않는다.
없어서 못 찾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아무도 질문을 던지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미술사학자, 과학자, 수학자, 철학자, 엔지니어들의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나 또한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내가 요즘 '단원풍속도첩' 해석에 몰두하는 이유도 이 죄진 듯한 마음의 짐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이다.
다음은 AI가 써 준 멜랑콜리아 I 해석 글이다.
멜랑콜리아 I - 500년간 예술가·역사가·과학자·수학자들을 매료시킨 그림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의 《멜랑콜리아 I(Melencolia I)》를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이상한 그림이었다. 한 여자가 앉아 있다. 그런데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고개를 한쪽 손으로 받치고 있다. 표정은 어둡고, 눈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지만 무엇을 보는지는 알 수 없다. 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주변에는 컴퍼스, 자, 망치, 톱, 대패, 집게, 못 같은 도구들이 널려 있다. 구가 하나 놓여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다면체가 있다. 옆에는 앙상한 개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자고 있다. 작은 천사는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다. 벽에는 모래시계와 저울, 종이 걸려 있고 그 옆에는 숫자가 빼곡한 마방진이 있다. 사다리가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멀리에는 바다가 있고 작은 도시가 보인다. 하늘에는 무지개가 걸려 있다. 그런데 그 아래에는 혜성인지 별똥별인지 모를 밝은 물체가 지나간다. 그리고 왼쪽 위에는 박쥐처럼 생긴 괴물이 날개를 펼친 채 글자가 적힌 리본을 물고 있다. MELENCOLIA I. 1514년에 만들어진 판화 한 장이다. 크기는 고작 약 24 × 19cm.
그런데 이 작은 판화 하나를 놓고 500년 동안 미술사가, 철학자, 과학사 연구자, 수학자, 의학사 연구자들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2014년 작품 제작 500주년을 기념하면서 《멜랑콜리아 I》가 예술가, 역사가, 과학자, 수학자들을 수세기 동안 매료시켜 왔다고 소개했다. 도대체 뒤러는 이 작은 판화 한 장에 무엇을 넣어 놓은 것일까. 아니, 어쩌면 더 재미있는 질문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왜 우리는 이 그림 한 장에서 이렇게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일까.
먼저 그림이 만들어진 때부터 생각해 보자. 1514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살아 있었고,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작업한 뒤였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지 불과 22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유럽의 지식 유통 방식을 바꾼 뒤 약 7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리고 뒤러는 그 인쇄술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예술가였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 동시에 판화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캔버스 한 장을 만들어 궁정이나 부유한 후원자에게 보여주는 것과, 판화 한 장을 만들어 여러 장 찍어 유럽 곳곳에 퍼뜨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뒤러는 판화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와 이름을 유럽 전체에 퍼뜨렸다. 그는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미지를 유통시키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멜랑콜리아 I》도 특별하다. 이것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생각이 복제되어 퍼져 나가는 매체다.
그런데 제목부터 이상하다. MELENCOLIA I. 왜 그냥 MELENCOLIA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여기에는 철자가 조금 이상하다. 오늘날 영어로는 Melancholy라고 쓰고, 라틴어 Melancholia도 익숙하다. 그런데 뒤러는 Melencolia라고 적었다. 당시의 철자와 표기 관습을 생각하면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가 현대적인 단어를 생각하고 보면 낯설다. 그리고 그 뒤에 I가 붙어 있다. 로마 숫자 1이다. 이 작은 숫자 하나 때문에 또 하나의 거대한 해석의 문이 열린다.
가장 유명한 해석은 첫 번째 멜랑콜리라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멜랑콜리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단순한 우울감과 같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이어진 의학적 전통에서는 인간의 몸과 성격을 네 가지 체액, 즉 혈액·황담즙·점액·흑담즙의 균형으로 설명했다. 그중 흑담즙과 연결된 것이 멜랑콜리였다. 중세에는 멜랑콜리가 상당히 부정적인 상태였다. 그런데 르네상스가 오면서 조금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멜랑콜리가 단순히 병적인 상태가 아니라 뛰어난 인간의 특징으로도 생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탈리아의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는 멜랑콜리와 지적·창조적 인간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너무 많이 생각하는 사람은 멜랑콜리에 빠질 수 있지만, 바로 그 깊은 사고 능력이 위대한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는 식의 생각이다. 중세에는 멜랑콜리가 피해야 할 상태였다면, 르네상스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천재의 그림자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독일의 인문주의자 하인리히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Heinrich Cornelius Agrippa)가 등장한다. 아그리파는 멜랑콜리를 세 단계로 구분하는 생각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상상력(imagination), 두 번째는 이성(reason), 세 번째는 정신 또는 지성(spirit/intellect)과 관련된다. 첫 번째 단계가 예술가와 연결된다. 그래서 《Melencolia I》의 I를 첫 번째 멜랑콜리, 즉 melancholia imaginativa로 보는 해석이 생겼다. 이 해석에 따르면 그림의 주인공은 예술가의 멜랑콜리다. 그런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역사적 문제가 있다. 아그리파의 《De occulta philosophia》가 정식으로 출판된 것은 1531년이다. 뒤러가 《멜랑콜리아 I》를 만든 것은 1514년이다. 그러면 뒤러는 17년 뒤에 출판될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물론 아그리파의 원고는 그보다 훨씬 일찍 작성되었고, 1510년 무렵부터 필사본 형태로 유통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하지만 뒤러가 실제로 그 원고를 읽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따라서 "I는 아그리파의 첫 번째 멜랑콜리를 의미한다"라고 단정하기보다는 "I를 아그리파가 구분한 첫 번째 멜랑콜리와 연결하는 해석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정도가 안전하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숫자 하나에도 이렇게 역사적 논쟁이 붙는다.
그림을 확대해서 보면서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한 부분이 이것이다. MELENCOLIA와 I 사이에 작은 기호 같은 것이 하나 보인다. 멀리서 보면 장식처럼 보인다. 확대하면 더 분명해진다. 마치 § 같은 모양이다. 이것을 현대적인 의미의 §, 단락표지라고 확정해버리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뒤러의 작품을 둘러싼 연구에는 이 표기의 성격을 두고 여러 논의가 있다. 어떤 해석에서는 장식적인 기호로 보고, 어떤 연구에서는 단순한 장식 이상의 것으로 읽으려 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뒤러가 자신의 생전 기록에서 이 작품을 오늘날 우리가 익숙한 "Melencolia I"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연구도 있다는 것이다. 뒤러의 네덜란드 여행 기록에서는 이 작품을 die Melancholi, die Melancholey 등으로 불렀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니 이 작은 기호 하나를 가지고도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정말 제목의 일부인가? 상징인가? 장식인가? 혹은 우리가 의미를 찾고 싶어서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가? 이 질문 자체가 《멜랑콜리아 I》를 보는 재미다.
이번에는 리본을 들고 날아가는 생물을 보자. 보통은 박쥐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상당히 괴상하다. 쥐 같은 얼굴에 날카로운 이빨이 보이고 혀도 나와 있다. 날개를 활짝 펴고 있고, 그 가운데에 MELENCOLIA I가 적힌 리본을 물고 있다. 박쥐는 밤의 동물이니 어둠과 멜랑콜리를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일부 연구에서는 이 생물을 단순한 박쥐가 아니라 악마적 존재로까지 해석한다. 그리고 애초에 이 리본 자체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르네상스 판화에서 의인화된 인물이 이런 띠 모양의 리본, 즉 반데롤(banderole)을 들고 있는 것은 흔한 관습이었다. 그 위에 적힌 글귀가 반드시 작품의 '공식 제목'이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어쩌면 우리가 제목이라고 믿어온 것 자체가, 화면 안의 한 도상이 들고 있는 여러 속성물 가운데 하나였을 뿐인지도 모른다. 작은 생물 하나에서도 동물학 → 상징 → 악마학 → 제목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의심으로까지 길이 열린다.
박쥐 뒤에는 무지개가 있다. 이상하다. 우리는 보통 무지개를 보면 희망을 생각한다. 성경적으로는 홍수 이후 인간과 신 사이의 언약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바로 옆에는 밝은 천체가 지나간다. 혜성일 수도 있고 별똥별일 수도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이상한 빛을 종종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였다. 같은 하늘에 무지개와 불길한 천체가 동시에 존재한다. 희망과 불안이 한 장면에 같이 있는 것이다.
왼쪽 아래에는 넓은 물이 펼쳐져 있다. 그 너머에는 작은 도시와 배가 보인다. 앞쪽은 도구와 물체로 꽉 차 있는데, 뒤쪽은 갑자기 공간이 열린다. 그래서 이 배경을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인간이 측정할 수 있는 세계와 측정할 수 없는 세계의 대비로 읽는 해석도 가능하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중앙의 다면체가 측정의 세계가 펼쳐지는 전경과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광대한 자연을 나누는 듯한 구도를 지적한다. 앞에는 인간이 만든 도구가, 뒤에는 인간이 아직 다 측정하지 못한 세계가 있다.
그 사이에 사다리가 있다. 위로 올라가지만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지식이나 영적 상승의 상징으로 읽는 해석이 있는 반면, 그냥 건축 현장의 도구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멜랑콜리아 I》에서는 평범한 물건 하나도 평범하게 보이지 않는다. 바로 옆에 컴퍼스와 기하학적 입체, 마방진과 저울, 모래시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다리 하나도 결국 철학의 질문으로 끌려 들어간다.
이제 그림의 중심으로 돌아가자. 가장 큰 인물, 날개가 달려 있다. 보통은 천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확하게는 멜랑콜리의 의인화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인물은 성별도 완전히 분명하지 않다. 여성적인 얼굴과 옷을 하고 있지만 날개와 자세 때문에 초월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천사인가? 여신인가? 멜랑콜리라는 추상적 개념의 의인화인가? 예술가인가? 뒤러 자신인가? Smarthistory의 설명에서도 멜랑콜리의 의인화로 보는 해석과 기하학의 의인화로 보는 해석을 함께 소개한다. 우리가 흔히 미술작품을 볼 때는 "이 인물은 무엇을 상징한다"라고 말하고 끝낸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멜랑콜리인가?"라고 물었더니 "기하학일 수도 있다"가 나오고, "뒤러 자신의 정신적 자화상일 수도 있다"가 다시 나온다.
이 인물의 손에는 컴퍼스가 있다. 오늘날 컴퍼스는 학교 수학 시간에 원을 그리는 도구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측정하고 비례를 재고 형태를 구성하는, 훨씬 중요한 도구였다. 예술가에게도, 건축가에게도, 기하학자에게도 필요했다. 그런데 그녀는 컴퍼스를 들고 있지만 아무것도 그리고 있지 않다. 이게 《멜랑콜리아 I》의 가장 유명한 긴장 가운데 하나다. 도구는 있다. 능력도 있다. 그런데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 장면을 이상적인 형태를 머릿속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을 현실의 작품으로 구현하지 못하는 예술가의 좌절로 보는 해석이 나왔다.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유명한 해석이 바로 이 방향이며, 그는 《멜랑콜리아 I》를 뒤러의 정신적 자화상으로 보았다. 르네상스의 예술가에게 기하학은 단순한 기술 이상의 것이었다. 화가가 물감을 잘 칠하는 장인이 아니라 자연의 비례와 공간의 질서를 이해하는 지식인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다. 뒤러 자신도 기하학과 인체 비례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관련 저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인공의 머리에는 화환이 있다. 흔히 물냉이와 미나리아재비 계열의 식물로 해석되며, Smarthistory는 당시 멜랑콜리와 연결된 '건조함'을 완화하는 해독 식물로 여겨졌다고 설명한다. 반면 단순히 예술적·알레고리적 화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허리에는 열쇠가, 발치에는 돈주머니가 있다. 열쇠는 권력이나 통제와, 돈주머니는 재산과 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둘이 주인공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열쇠도, 돈도, 도구도, 지식도 있는데 그녀는 앉아 있다. 인간이 가진 외적 능력과 자원만으로는 내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읽을 수도 있다.
(다만 뒤러가 남긴 준비 스케치에는 “열쇠는 권력, 주머니는 부”라는 메모가 있어, 적어도 열쇠와 주머니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는 비교적 분명한 근거가 있다.)
주인공은 팔을 책 위에 얹고 있다. 그러나 책을 읽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지식이 옆에 있는데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지식은 존재하지만 행동은 없다. 파노프스키의 해석에서 이 인물은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지만 바로 그 생각 때문에 행동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읽힌다.
발치에는 개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매우 피곤해 보인다. Smarthistory는 이 개를 그레이하운드로 보면서, 전통적으로 충성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멜랑콜리와도 연결된다고 설명한다. 재미있는 비교가 하나 가능한데, 뒤러가 같은 1514년에 만든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에도 개가 나온다. 하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책상에 앉아 열심히 글을 쓰고, 방은 정돈되어 있으며 빛도 따뜻하다. 개와 사자도 편안하게 누워 있다. 반면 《멜랑콜리아 I》에서는 도구가 바닥에 널려 있고 주인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생산적인 사색과 마비된 사색의 대비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멜랑콜리아 I》를 도덕적·신학적·지적 덕목과 연결되는 세 개의 대형 판화 가운데 하나로 설명한다.
주인공 옆에는 푸토(putto)라 부르는 작은 천사가 앉아 있다. 이 아이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맷돌 위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쓴다. 주인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작은 아이는 뭔가를 하고 있다. 아직 깊이 생각하지 않는 단순한 창작자와,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해서 행동하지 못하는 완성된 예술가의 대비로 읽기도 한다. 파노프스키는 바로 이런 식으로 큰 인물과 작은 푸토를 대비시켰다. 맷돌은 반복적으로 회전하며 무언가를 갈아내는 물건인데, 그 위에 아이가 앉아 있다는 것도 노동과 반복, 물질적 작업을 떠올리게 한다. 주변에는 실제 작업을 위한 도구가 너무 많은데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구와 노동의 가능성은 있는데 결과물은 없다. 이것이 그림 전체에 반복된다.
바닥에는 톱, 대패, 망치, 집게, 못, 풀무의 일부로 보이는 물건, 잉크병 같은 것들이 흩어져 있다. 미국 국립미술관은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열거한다. 모두 무언가를 만드는 도구인데 만들고 있는 사람은 없다. 못은 작은 물건이지만 일부 해석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연결되는 못으로 읽는다. 같은 못 하나가 목공 도구가 되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암시하는 종교적 상징이 되기도 한다.
바닥에는 완벽하게 둥근 구도 있다. 어디서 보든 중심을 기준으로 대칭적인 이 형태는 완전성, 이상적 형태, 우주의 질서 같은 개념과 연결될 수 있다. 아무런 무늬도 없이 그냥 놓여 있다는 점이 오히려 의미를 투사하기 좋은 물체로 만든다.
이 그림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가장 많이 논쟁되는 물체는 거대한 다면체다. 흔히 뒤러의 다면체(Dürer's solid)라 부르며, 어떤 면은 삼각형이고 어떤 면은 오각형처럼 보인다(흔히 truncated rhombohedron 또는 truncated triangular trapezohedron으로 설명된다). 왜 뒤러는 이걸 그렸을까. 기하학의 상징이라는 해석이 있고, 예술가가 다루어야 할 이상적 형태 — 머릿속의 완벽한 형태와 현실에서 구현되는 형태 사이의 간극 — 로 보는 해석도 있다. 원근법에 대한 뒤러 자신의 관심과 연결하는 시각도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이 다면체가 측정하려는 인간의 세계와 끝없이 펼쳐지는 자연의 세계를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하며, Smarthistory는 이 다면체가 르네상스의 원근법적 질서를 혼란스럽게 뒤집는 역할을 한다는 해석도 소개한다. 돌덩어리 하나가 기하학 → 예술 → 원근법 → 인간의 지식 → 자연으로 연결된다.
오른쪽 벽에는 4 × 4 마방진이 있다. 16 3 2 13 / 5 10 11 8 / 9 6 7 12 / 4 15 14 1. 어느 행도, 어느 열도, 대각선도 더하면 34다. 네 개의 작은 2×2 영역, 네 모서리, 중앙 네 숫자도 모두 34가 된다. 마지막 줄 가운데의 15, 14를 붙이면 1514, 바로 이 작품이 만들어진 해다. 그리고 이 해는 뒤러에게 단순한 제작연도 이상이었다. 1514년은 그의 어머니 바르바라가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하다. 4차 마방진이 점성술과 헤르메스주의 전통에서 우울과 파멸을 관장하는 토성의 어두운 기운을 상쇄하고 치유하는 목성의 수비학적 부적으로 통용되었다는 사실과 이 개인적 비탄이 겹칠 때, 뒤러가 왜 하필 그해에 이 숫자의 질서를 동판 위에 새겨 넣었는지가 조금 더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당시 마방진은 오늘날의 퍼즐과 달리 숫자에 우주적·점성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전통, 특히 행성의 숫자와 연결하는 전통 속에 있었다. 수학 → 점성술 → 우주 질서가 다시 연결된다. 뒤러가 이 마방진을 정확히 어떤 의도로 넣었는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우주의 질서를 숫자로 표현한 것으로 읽는 사람도, 인간이 아무리 복잡한 질서를 만들어도 결국 죽음과 시간 앞에 놓여 있다는 것으로 읽는 사람도, 뒤러 자신의 수학적 능력을 과시한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34라는 숫자 자체도 마방진의 전통적 구조에서 나온 것이면서 동시에 당시의 수비학적 전통과 연결될 수 있다. 수학적으로는 34이고, 상징적으로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하나의 숫자가 두 개의 세계에 걸쳐 있다.
마방진 옆의 모래시계는 비교적 해석이 쉽다. 모래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한번 떨어진 모래는 다시 올라가지 않는다. Smarthistory도 모래시계를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상징과 연결한다. 왜 멜랑콜리의 주인공 바로 위에 시간의 도구가 있는가. 시간은 흐르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이렇게 읽으면 그림이 갑자기 현대적으로 보인다. 위쪽의 종은 시간을 알리는 동시에 죽음을 알리는 물건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혹은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 그림 속 종은 조용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언제 울릴지 모른다. 그 옆의 저울은 무게를 재는 도구이자 판단과 심판을 의미한다. 인간의 영혼을 저울에 올려놓는 종교적 이미지도 있다. 저울 하나에서 측정 → 판단 → 심판 → 신학이라는 길이 열린다.
여기서 재미있는 연결이 하나 생긴다. 컴퍼스도, 저울도, 마방진도, 모래시계도 모두 측정하거나 계산한다. 길이를 재고, 무게를 재고, 시간을 재고, 형태를 잰다. 그런데 정작 인간의 멜랑콜리는 측정할 수 없다. 인간은 세계의 많은 것을 측정할 수 있지만, 인간 자신의 내면까지 측정할 수 있는가?
바닥의 불과 작은 용기는 연금술의 도가니(crucible)로 보는 해석이 있다. 연금술사가 금속을 가열하고 변형시켜 금으로 바꾸려 했던 것처럼, 이것 역시 변형과 창조의 도구다. 금속을 금으로 바꾸려는 연금술사, 나무와 돌을 형태로 바꾸는 장인, 무형의 생각을 이미지로 바꾸는 예술가 — 모두 닮아 있다.
여기까지가 화면을 채운 개별 상징들이다. 그런데 이 상징들을 하나씩 짚어보고 나면, 이 그림이 결국 가리키는 것은 낱낱의 알레고리가 아니라 한 사람, 뒤러 자신이 서 있던 자리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1471년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린 화가가 아니었다. 판화가였고, 드로잉을 했고, 회화를 했다. 기하학을 공부했고, 인체 비례와 원근법을 연구했고, 자연을 관찰했다. 그리고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예술가가 지식인으로 대우받는 것을 경험했지만, 독일의 장인적 전통에서는 예술가가 여전히 기술을 가진 장인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뒤러는 그 사이에 서 있었다. 손으로 만들었지만 머리로도 만들었다. 그리고 작품에 자신의 이름(AD 모노그램)을 적극적으로 남기고 판화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퍼뜨렸다. Smarthistory는 뒤러가 이탈리아에서 예술가의 지위와 정체성에 강한 인상을 받았으며, 이후 자신의 지적·예술적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구축했다고 설명한다.
화면 전체를 다시 보면 이 장인과 지식인 사이의 긴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컴퍼스, 톱, 대패, 망치, 집게, 못, 도가니, 기하학적 입체, 구, 책, 잉크병까지 있고, 작은 푸토는 글까지 쓰고 있다. 그런데 정작 중심의 인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완벽한 작품을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있지만, 현실의 재료는 그 이상을 따라가지 못한다. 머릿속의 완벽한 원과 종이 위에 그어진 원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완벽한 인간과 현실의 인간 사이에도, 완벽한 작품과 현실의 작품 사이에도 간극이 있다. 그 간극에서 멜랑콜리가 발생한다. 이것이 《멜랑콜리아 I》를 예술가의 정신적 자화상으로 보는 가장 유명한 해석이다.
그래서 《멜랑콜리아 I》는 어쩌면 뒤러 자신이다. 얼굴을 뒤러처럼 그린 자화상은 아니지만, 뒤러가 무엇을 알고 있었고 무엇을 고민했는가를 보여주는 그림이라는 뜻에서 자화상일 수 있다. 기하학을 알고, 예술의 기술을 알고, 자연을 관찰하고, 인간의 비례를 연구했지만 인간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예술가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는데 손으로는 완벽하게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중앙의 인물은 뒤러의 얼굴이 아니라 뒤러의 정신을 그린 인물일 수 있다. "영적 자화상(spiritual self-portrait)"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이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이 해석을 소개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뒤러가 나온다. 뒤러는 생각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멜랑콜리아 I》을 보면 알 수 있다. 개의 털 하나하나, 천의 주름, 나무의 결, 돌의 표면, 금속 도구의 질감이 다 다르게 보인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이 작품이 검은 선과 흰 종이만으로 개의 털, 옷감, 돌의 표면 등 놀라운 질감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한다. 뒤러는 "생각만 하는 철학자"도 "손기술만 뛰어난 장인"도 아니다. 둘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다. 《멜랑콜리아 I》 자체가 그 사람의 모습과 닮아 있다.
이 그림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도구가 있는데 아무도 일하지 않는다. 컴퍼스도, 톱도, 대패도, 망치도 멈춰 있다. 도가니의 불은 있지만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개는 자고, 중심의 인물은 앉아 있다. 세계는 이렇게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은 멈춰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은 "멜랑콜리는 슬프다"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지식이 많아질수록 인간은 더 행복해지는가, 라는 질문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이것이 르네상스의 인간이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단순히 어두운 중세 → 밝은 르네상스라고 설명하면 너무 단순하다. 르네상스의 인간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다. 자연을 측정하고, 인간의 몸을 해부하고, 원근법을 계산하고, 고대 문헌을 다시 읽고, 별을 관찰하고,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기하학을 연구했다. 그런데 더 많이 알게 된다는 것은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멜랑콜리아 I》의 어두운 표정에는 바로 그런 르네상스의 양면성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세계는 인간보다 훨씬 크다.
이제부터는 개별 상징이 아니라, 이 그림을 '해석한다'는 행위 자체로 눈을 돌릴 차례다. 컴퍼스를 보면 기하학이, 기하학을 보면 르네상스의 예술론이 나온다. 마방진을 보면 수학이, 수학을 보면 우주의 질서가 나온다. 모래시계를 보면 시간이, 시간을 보면 죽음과 유한성이 나온다. 저울을 보면 판단과 심판이, 사다리를 보면 상승과 초월이 나온다. 그리고 중심의 인물을 보면 결국 인간의 정신이 나온다. 중요한 것은 이 서로 다른 해석들이 서로를 지우지 않고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중앙의 인물은 멜랑콜리의 의인화일 수도, 기하학의 의인화일 수도, 예술가의 정신적 자화상일 수도, 르네상스 인간의 지식에 대한 불안일 수도,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적 탐구일 수도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날개 달린 인물의 수학적 지식과 기하학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다른 연구는 플라톤의 미학과 연결해 완전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는 인간의 좌절로 읽는다. 또 다른 연구는 이 작품을 멜랑콜리 자체의 표현이라기보다 멜랑콜리를 다루고 치료하는 이미지로 읽는다.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지워버리지 않는다. 뉴질랜드 테 파파 박물관은 이 작품을 "다른 어떤 판화보다도 많이 해석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소개한다.
숫자 16개만으로도 책 한 권이 된다. 마방진의 숫자를 보면 수학사, 점성술, 르네상스의 수학, 숫자의 상징성, 1514년이라는 연도, 뒤러의 자기표현, 인간이 우주의 질서를 숫자로 표현하려 했던 역사까지 이야기할 수 있다. I 하나도 마찬가지다. I를 보면 멜랑콜리가, 멜랑콜리를 보면 흑담즙과 고대 의학, 중세의 체액론이 나온다. 다시 르네상스로 가면 피치노와 토성, 창조적 천재가 나오고, 아그리파와 상상력·이성, 예술가의 지위가 나온다. 그리고 다시 뒤러에게 돌아온다. 로마 숫자 하나가 르네상스 철학사의 입구가 된다.
작은 기호 하나도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MELENCOLIA와 I 사이의 작은 표시가 무엇인지 우리는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바로 그 사실이 재미있다. 500년 전 판화에 찍힌 작은 기호 하나의 의미조차, 심지어 그 리본이 정말 '제목'인지조차 우리는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 그림을 보면서 "이것은 반드시 ○○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순간 오히려 조심해야 한다. 이 작품은 그런 자신감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마 그래서 이 그림은 계속 살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완전히 해석된 그림은 더 이상 질문을 만들지 않는다. 설명을 읽으면 끝난다. "아, 이것은 이것이구나" 하고 넘어간다. 그런데 《멜랑콜리아 I》는 그렇지 않다. 설명을 하나 읽으면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마방진을 설명하면 왜 마방진인지, 컴퍼스를 설명하면 왜 컴퍼스를 들고 있는지, 다면체를 설명하면 왜 저 모양인지, I를 설명하면 왜 1인지, 박쥐를 설명하면 왜 박쥐인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는 왜 이 모든 것을 한 장의 그림 안에 집어넣었는가, 라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뒤러가 넣은 것은 상징이 아니라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 역시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뒤러가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느껴진다. 여기에는 예술이 있고 수학이 있고 의학이 있고 천문학이 있고 기하학이 있고 종교가 있고 철학이 있고 노동이 있고 시간이 있고 죽음이 있고 인간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따로 놓여 있지 않다. 모두 한 화면 안에서 서로 부딪힌다. 그래서 이 작품은 '어려운 그림'이 아니라 '너무 많은 그림'인지도 모른다. 뜻이 없는 것이 아니라 뜻이 너무 많다. 그림이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질문지처럼 보인다.
1514년의 뒤러는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이것이 결국 《멜랑콜리아 I》를 보면서 가장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뒤러는 이미 유럽에서 이름을 알린 예술가였고, 판화가로서 엄청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경험했고, 기하학과 비례에 관심을 가졌으며, 예술가가 단순한 장인이 아니라 지식인이라는 새로운 인간형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앞에 컴퍼스와 마방진과 다면체와 도구들을 늘어놓고 앉아 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할 수 없는 것도 많아진다. 완벽한 작품을 알고 있기 때문에 현실의 작품이 불완전해 보일 수 있다. 완벽한 아름다움을 생각하기 때문에 현실의 아름다움이 부족해 보일 수도 있다. 세계의 질서를 이해하려고 할수록 세계가 얼마나 복잡한지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단순히 슬픈 여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인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도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 《멜랑콜리아 I》의 가장 재미있는 점은 바로 마지막 답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노프스키의 해석, 멜랑콜리의 의인화라는 해석, 기하학의 의인화라는 해석, 예술가의 정신적 자화상이라는 해석, 아그리파의 세 단계와 연결하는 해석, 피치노와 르네상스의 창조적 멜랑콜리와 연결하는 해석, 플라톤의 미학과 연결하는 해석, 수학과 점성술의 관계를 강조하는 해석까지 — 서로 충돌하는 해석들이 함께 존재한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아예 이 작품이 하나의 확정된 의미로 환원되기 어렵다는 점 자체를 중요하게 본다. 조셉 레오 쾨르너 같은 연구자는 이 작품이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만들어져 관람자의 해석 노동 자체를 촉발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이 그림의 진짜 주제는 화면 속 상징들이 아니라 그 상징들 앞에서 끝없이 궁리하게 되는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결국 《멜랑콜리아 I》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이것이다. 뒤러가 정답을 하나 그려놓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을 수십 개 그려놓았다. 컴퍼스, 마방진, 모래시계, 종, 사다리, 개 한 마리, 박쥐 한 마리, 구, 다면체, 그리고 I. 그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의학으로, 철학으로, 수학으로, 종교로, 예술사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그러니 5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이 그림 앞에 서서 "이게 무슨 뜻이지?" 하고 다시 묻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멜랑콜리아 I》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정답을 남긴 그림이 아니라 질문을 남긴 그림. 1514년, 알브레히트 뒤러가 남긴 것은 어쩌면 멜랑콜리의 그림 한 장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그 순간 자체를 새긴 한 장의 판화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해석 역시, 수많은 해석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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