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기 : 배추농사는 어려워2

독후감상문 -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


1. 인상적인 장면들
1) 팬트리에서 책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두 사람의 몸싸움 팬트리 안에서 스티븐스가 몰래 읽고 있던 책을 미스 켄턴이 들이닥쳐 빼앗으려던 늦은 밤의 에피소드입니다. 명분상으로는 영어 대화 실력과 품위를 키우기 위해 연애소설을 읽고 있었다고 하지만, 과연 진짜 그랬을까요? 아마도 단순히 재미있어서였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티븐스는 '집사는 혼자 있을 때만 오직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철저한 강박과 사생활을 들키지 않겠다는 방어 기제 때문에 책을 품에 안고 온몸으로 버팁니다. 결국 미스 켄턴이 책을 낚아채 확인해 보니 아주 뻔하고 진부한 순애보 연애소설이었습니다. 이 해프닝은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긴장과 감정의 파문이 일렁인 대표적 사건인데, 참 이시구로 특유의 건조한 어조로 마무리됩니다. 조금 더 끈적하게 끌고 가도 좋았을 텐데요.

2) 미스 켄턴이 벤(Benn)과의 결혼 제안에 대해 고민 중이라고 전하는 밤 젊은 시절, 달링턴홀에 대자 레기날드 카디널이 예고 없이 찾아와 하룻밤을 묵기로 한 그 긴박한 날 밤입니다. 나치의 밀회가 상층부에서 벌어지고 온 집안이 긴장감에 휩싸여 있을 때, 미스 켄턴은 휴일에 외출하고 돌아와 스티븐스에게 폭탄 같은 고백을 합니다. 자신이 만나던 남자 벤으로부터 청혼을 받았고, 서쪽 지방으로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통보한 것이죠. 스티븐스는 이 결정적인 순간에도 감정을 드러내기는커녕, "중요한 국제적 거물들이 회합을 갖는 중이니 내조와 임무에 집중해야 한다"며 냉정하게 밀어냅니다. 미스 켄턴이 "내 결혼 소식에 이것밖에 할 말이 없느냐"며 서운함과 분노를 터뜨리는데도, 스티븐스는 끝까지 이를 업무적인 상황으로 축소시키며 외면합니다. 참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3) 버스 정류장에서의 재회와 속마음 고백 시간이 흘러 훗날 웨이머스 여행 중 소도시의 찻집에서 미스 켄턴(이제는 벤 부인)을 다시 만났을 때, 두 사람이 버스 정류장 비좁은 대기실에서 나눈 대화가 결정적입니다. 미스 켄턴은 결혼 생활이 처음부터 행복했던 것은 아니며, 과거 달링턴홀을 떠났던 것도 사실은 스티븐스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한 속임수이자 반항이었다고 털어놓습니다. 특히 그녀는 가끔씩 '당신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씁쓸한 상상을 하곤 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그 진심 어린 고백 앞에서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끝까지 예의 바르고 건조한 격식의 언어로 그녀의 말을 받아넘깁니다. "이미 엎지러진 물이며, 각자의 자리에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는 식으로 점잖게 선을 그어버리는 것입니다.
4) 카디널의 경고와 충돌 나치의 핵심 인물과 영국 총리가 밀회를 나누기 위해 모이던 바로 그날 밤, 대자 카디널이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그는 달링턴 경을 친아버지처럼 따르며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독일에 직접 다녀오며 나치 정권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서재에서 스티븐스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며 달링턴 경과 부딪칠 때, 카디널은 분노와 불안에 찬 목소리로 경고합니다. 당신은 히틀러와 나치 정권의 선전 도구이자 장기말로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으며, 아마추어적인 태도가 결국 파시스트들의 야욕을 돕는 최악의 무기가 되고 있다고 말이죠. 하지만 달링턴 경은 "네가 뭘 모른다, 그들은 오해받고 있는 것뿐이다"라며 카디널의 충고를 완강히 무시하고 내칩니다.

5) 전쟁의 폭발과 대자의 비극적 죽음 카디널이 그렇게 목숨을 걸고 막고자 했던 나치의 광기와 히틀러의 기만은 결국 역사가 증명하듯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전 세계적인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전쟁이 터지자 젊은 카디널은 참전하게 되고, 결국 벨기에 전선에서 목숨을 잃고 맙니다. 주인의 명예와 평화를 지킨다고 믿었던 그 맹목적인 충성이, 결과적으로는 나치와의 영합을 도왔고, 그것이 결국 자신의 대자를 비롯한 수많은 청춘들을 전쟁의 불길 속으로 몰아넣는 거대한 역사적 비극의 방조자가 된 것입니다.

6) 뒤늦은 후회 이 에피소드가 뼈 때리게 다가오는 것은 스티븐스가 이 모든 살벌한 경고와 비극을 눈앞에서 직접 겪고도 끝까지 "정치나 세계 대사는 내 알 바가 아니며, 나는 오직 주인을 모시는 일에만 충실했다"며 철저히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대자가 피를 흘리며 경고하고 목숨을 잃었음에도, 스티븐스는 나중에 웨이머스 해변에 이르러서야 "달링턴 경은 적어도 자기가 직접 선택한 실수를 저지르기라도 했지, 나는 주인의 지혜를 맹신하기만 했을 뿐 내 주체적인 실수조차 가져보지 못했다"며 비참한 허탈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2. 인상적인 장면 캡쳐
200 page
"However, if a butler is to be of any worth to anything or anybody in life, there must surely come a time when he ceases his searching; a time when he must say to himself: 'This employer embodies all that I find noble and admirable. I will hereafter devote myself to serving him.' This is loyalty intelligently bestowed."

"하지만 집사가 인생에서 그 무엇에게든 혹은 그 누구에게든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으려면, 마침내 방황과 탐색을 멈추는 때가 반드시 찾아오는 법이다. '이 고용주는 내가 고결하고 숭배할 만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체화하고 있다. 나는 이제부터 그를 모시는 일에 내 자신을 바치겠다'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해야 하는 순간 말이다. 이것이 바로 현명하게 베풀어진 충성이다."


243 page
"Lord Darlington wasn't a bad man. He wasn't a bad man at all. And at least he had the privilege of being able to say at the end of his life that he made his own mistakes. His lordship was a courageous man. He chose a certain path in life, it proved to be a misguided one, but there, he chose it, he can say that at least. As for myself, I cannot even claim that. You see, I trusted. I trusted in his lordship's wisdom. All those years I served him, I trusted I was doing something worthwhile. I can't even say I made my own mistakes. Really - one has to ask oneself - what dignity is there in that?"
"달링턴 경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어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그는 인생의 끝에 이르러 자신이 직접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지요. 경은 용기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는 인생에서 특정한 길을 선택했고, 그것이 그릇된 길로 판명되었지만, 어쨌든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 적어도 그렇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나로 말하자면, 나는 그것조차 주장할 수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나는 믿었으니까요. 나는 경의 지혜를 믿었습니다. 그를 모셨던 그 모든 세월 동안, 나는 내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어요. 나는 내가 직접 실수를 저질렀다고조차 말할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자문해 보게 됩니다. 그 어디에 품위라는 게 있단 말인가요?"

*** 200페이지에서 방황과 탐색을 멈추는 때가 찾아와 30년 가까이 봉사한 결과가 결국은 그릇된 길이었다고 회상하는 장면...

마지막 장면에서 집이 팔려 패키지로 딸려 갔다고 하는 농담과 답변을 하면서 유일하게 농담을 제대로 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이후에 농담 따먹기가 사람들의 친화와 온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으며 새 주인도 그런 농담 따먹기를 할 줄 아는 집사를 원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열심히 연습하겠다는 다짐이 참 씁쓸하게 다가오네요.


3. 주인공 스티븐스의 대화 방식
이시구로가 주인공의 대화방식을 설계한 걸 보면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치밀합니다. 그는 한 번에 극적인 변화를 겪게 하지 않고, 대사의 미세한 틈새를 통해 철저하게 방어하던 마음이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는 과정을 그려내는데 그 대화의 흐름을 살펴보는 것이 이 소설의 백미입니다.

1) 격식이라는 완벽한 방어막
소설 전반부나 낯선 이들과 마주할 때 스티븐스의 화법은 철저하게 감정이 없는 문체입니다. 상대방이 감정적으로 다가와도 문장 끝을 건조한 사실로 매듭지어 버림으로써, 타인이 마음을 파고들지 못하도록 사방에 철책을 두릅니다. 그래서 사실 책의 전반부까지는 읽기가 힘들었습니다. 어려운 단어도 많아서 사실 뒤에는 영문판 포기하고 그냥 한글판으로만 읽었습니다.

2) 부정에서 긍정으로 넘어갈 때 방어적 합리화
마을 주민들이나 켄턴과 대화할 때 상대방의 말이나 태도를 처음에는 거부하거나 속으로 깎아내립니다. 하지만 대화가 이어질수록 상대방의 진심이 스며드는데, 이때 그는 그걸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하다가 자기 합리화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상대의 온기를 마음속으로 수용합니다. 생각이 바뀔 때도 감정이 아니라 꼭 묘한 논리적 변명을 거쳐야만 하는 것도 재미 있는 지점입니다.

3) 속마음과 보여주는 것의 처절한 괴리
대화 속에서 스티븐스가 가장 뼈 때리게 무너지는 순간은, 겉으로는 지극히 태연하고 예의 바른 격식을 차리고 있으면서도 행간 사이로 자신의 진짜 속마음이 새어 나올 때입니다. 켄턴양이 떠날 때나 웨이머스 해변에서 가슴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그는 말로는 차갑게 선을 긋지만 대화가 끝난 뒤 이어지는 내면에서는 그 껍데기가 박살 난 참혹한 허탈함이 폭발합니다. 남들 앞에서는 감정을 보이지 않다가, 혼자 남아서야 무너져 버리는 방어 기제... 참 짠합니다.

3. 소설을 덮으며 한마디 감상
소설의 마지막, 웨이머스 해변의 부두에서 우연히 만난 전직 집사와의 대화 끝에 스티븐스는 전직 집사로부터 "가장 멋진 부분은 저녁 시간"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평생을 일에만 매몰되어 주인의 거창한 대의에 온 생을 바치고 켄턴과의 사랑마저 놓쳐버린 그가,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비로소 깨달은 것이 겨우 '사람들과 어울려 가벼운 농담(bantering)을 나누는 기술'이라고 생각하다니요...

정말 뼈 때리는 블랙코미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게 요즘 제가 심취해서 해석하고 있는 단원의 그림과도 묘하게 연결되네요. 단원의 그림은 그냥 해학만 있는 줄 알았는데, 단원풍속도첩 25첩 중 절반 정도를 해석해 본 결과 그림마다 해학을 넘어 아주 노골적인 풍자가 담겨 있더라구요. 아주 뼈 때리는 블랙코미디라는 공통 코드가 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이 소설도 결국 그런 거였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노벨문학상을 탈 정도의 명작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 책을 선정해 준 영어책 읽기 모임 OO님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느낍니다.

이시구로 정말... 치밀하게 잘 썼습니다. 얄미울 정도로 말입니다. 제가 앞으로 소설 쓸 때 정말 참고가 많이 될 것 같습니다. # 남아있는나날 #The_Remains_of_the_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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