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아의 식탁 - 샐러드, 치아바타빵

Stanley의 유년 시절 : 1980년 국민학교 6학년의 일기 - 약속


1980년 6월 13일 금요일, 날씨 맑음

힘은 모든 것을 정복하지만 그 승리는 극히 짧은 것이다. (링컨)

'약속'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홍석이와 같이 집으로 오는데 

홍석이가 자기 집에 놀러오라고 해서 놀러 간다고 했다. 

집에 와서는 홍석이네 놀러가서 텔레비전을 보다니까 벌써 일곱시라서 

소죽 끓일려고 집으로 오니 들에 갔던 식구가 모두 돌아와 있었다. 

마침 소죽은 점심때 퍼주지 않았기 때문에 있었다. 

그러나 놀러 갔다고 혼났다. 

나는 약속을 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보고 약속을 하겠다.

***

1980년 6월 초여름, 해가 한 뼘씩 길어지는 하지를 향해 가는 무렵의 농촌은 눈으로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운 계절이었습니다. 텔레비전이 없던 저희 집에서, 동네 친구 홍석이네 집에 TV가 있다는 것은 매일 가슴을 설레게 하는 기가 막힌 물건이었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걸어오던 길, 홍석이가 던진 우리 집에 놀러 갈래라는 말은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었습니다.

집에 가방을 던져두자마자 헐레벌떡 친구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흑백 브라운관 화면 속에서는 뭐가 방송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 가장 재미있게 본 것은 '마징가Z'였습니다.  정신없이 화면에 빨려 들어가다 보니 시간의 흐름조차 잊어버렸습니다. 창밖은 아직 해가 중천에 걸린 듯 대낮처럼 훤했지만, 만화가 끝나고 어른들의 저녁 뉴스 화면으로 넘어가는 순간 벽시계를 쳐다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밖의 밝기만 믿고 방심했던 눈앞에서, 바늘은 이미 냉정하게 저녁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농가에서 소는 집안의 가장 큰 재산이자 한 식구였습니다. 하루 종일 밭을 갈고 짐을 나르며 고생한 소에게 따뜻한 저녁 여물을 끓여 주는 일은 어린 저에게 맡겨진 엄연한 당번이자 중요한 일과였습니다. 가마솥에 작두로 썬 짚을 넉넉히 넣고 물과 함께 왕겨(집에서는 왕겨라고 불렀지만 실제로는 등겨)를 한 바가지 듬뿍 섞은 뒤, 아궁이에 장작을 지펴 구수한 냄새를 피워 올려야 하는 정성과 수고가 들어가는 노동이었습니다.

밖은 훤해도 저녁이라는 현실을 깨닫자마자 솥단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고, 덜컥 겁이 나 숨이 턱에 닿도록 집으로 내달렸습니다. 마당에 들어서니 낮 동안 고되게 일하고 땀에 젖어 돌아오신 부모님과 가족들이 이미 다 모여 계셨습니다. 다행히 점심때 퍼주지 않고 남겨둔 소죽이 솥에 남아 있어 소를 굶기지는 않았지만, 제 몫의 책임을 팽개치고 남의 집에서 놀다 온 저에게는 불호령 같은 꾸중이 떨어졌습니다.

끝에 적은 나는 약속을 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보고 약속을 하겠다는 문장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야단맞아 기가 죽은 아이의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그 시절의 저는 생각보다 꽤 조숙했던 모양입니다. 맹목적으로 다시는 놀러 안 가겠다고 적은 글이 아니라, 나에게는 매일 저녁 등겨를 풀어 소죽을 끓여내야 하는 책임이 있으니 친구와 놀이 약속을 할 때도 내 형편과 해야 할 일을 먼저 헤아려보고 약속을 하겠다는 현실적이고 다부진 다짐이었습니다.

어스름조차 내리지 않은 훤한 마당 한구석, 불 꺼진 아궁이와 식어버린 소죽 솥을 앞에 두고 서 있던 열두 살 남짓한 소년. 만화영화의 화려한 화면보다 먼저 지켜내야 했던 삶의 무게와 서늘했던 가족들의 시선, 그리고 콧등을 스치던 소죽 냄새가 낡은 일기장 갈피마다 여전히 선명하게 배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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