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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 2037 1권 : 발렌시아의 인장
--장 Emergence Hole (우화의 굴)
붓끝에 묻어난 차가운 흙먼지가 사르르 날아갔다. 세바스티안의 손끝이 석조 구조물의 밑단, 습기 머금은 토양의 경계면에서 멈춰 섰다.
손가락 마디 하나가 넉넉히 들어갈 크기의 검고 아득한 굴. 단단하게 굳은 진흙 표면을 뚫고 나온, 완벽한 원형의 구멍이었다.
Emergence Hole.
누군가는 그것을 비상사태를 뜻하는 Emergency의 오타쯤으로 가볍게 스쳐 지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바스티안의 손가락은 검은 구멍의 테두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에게 이 굴은 위기의 신호가 아니었다. 수년, 혹은 수백 년의 억눌린 침묵을 깨뜨리고 지표면을 뚫고 분출한 완벽한 각성과 부활의 출구였다.
구멍 바로 앞, 젖은 흙바닥 위에 작은 사체 하나가 말라붙어 있었다.
우화 구멍을 겨우 탈출했으나, 단 몇 분, 단 몇 밀리미터의 차이로 허물을 벗지 못하고 등의 껍질이 참혹하게 찢겨 나간 매미 유충이었다. 지상의 정적을 깨고 첫 주파수를 쏘아 올리기도 전에, 포식자의 주둥이에 등쪽을 파먹힌 실패자였다.
세바스티안은 조심스럽게 마른 붓을 내려놓고 그 파먹힌 등껍질을 건드렸다. 서늘한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올라와 600년 전, 성배의 주파수를 육체라는 그릇에 담으려다 끝내 완성되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스러져갔던 스승과 동료들의 얼굴을 덮쳤다.
바람이 불자 근처 가지 끝에 간신히 걸려 있던 빈 허물 하나가 흔들렸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든 검은 까치 한 마리가 번개처럼 나뭇가지에 내려앉아 허물을 단숨에 낚아채 삼켜 버렸다. 껍질은 지상에 남아 타인의 양분으로 소멸하지만, 이미 주파수를 얻어 공기 중으로 날아오른 알맹이는 그 누구도 잡을 수 없다.
'빛을 보지 못하고 등껍질이 파먹힌 유충인가, 아니면 저 허물을 벗어던지고 빛의 바다로 날아오른 매미인가.'
세바스티안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무껍질 속 차가운 어둠에서 약 1년 동안 알 속에서 침묵을 견딘 작은 유충은 껍질을 깨고 세상으로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날개도, 안전하게 내려올 거미줄이나 실을 뽑는 능력조차 없는 2mm 남짓한 미물은 몸이 마르기도 전에 나뭇가지에서 지상으로 몸을 던진다. 떨어지는 곳이 단단한 흙인지, 돌인지, 혹은 기다리던 포식자의 입속인지 알 수 없었다. 치명적인 위험이 도사린 지상을 향해 무작정 떨어진 뒤, 곧 땅속으로 파고들어야만 하는 처절한 생존의 첫걸음이었다.
20세의 나이에 이사벨라를 잃고 첫사랑의 상흔과 트라우마 속에 방랑을 시작했던 그날, 자신 역시 아무런 무기나 대책도 없이 어두운 흙바닥으로 무작정 떨어져 내리던 그 막막한 애벌레에 불과했다. 준비되지 않은 채 던져졌던 그 무모한 추락, 떨어지자마자 어두운 흙을 파고들어 깊고 차가운 어둠 속에 자신을 매장한 채 지냈던 세월은 지하에서의 침묵이자 고통스러운 착륙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제, 2037년의 결전을 향해 가는 문턱에 있는 나이가 된 지금.
자신은 매미 일생의 어디에 서 있는가.
아직 어두운 굴속에서 지상의 주파수를 청음 하는 중인가, 아니면 마침내 지표면을 뚫고 나와 등껍질이 찢기는 위험을 무릅쓴 채 이륙을 준비하는 마지막 우화의 순간인가.
"지상에서의 추락은 끝이 아니라, 비로소 시작되는 부활의 관문이다."
세바스티안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붓을 들어 우화 구멍 주변의 흙을 정성스럽게 털어냈다.
지상에 남겨진 것은 고작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큼의 작은 구멍이었다.
그러나 그 구멍을 만들기까지, 어둠 속에서는 수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댓글
매미 애벌레의 맨몸 자유낙하 의미 심장해요
답글삭제맞습니다. 저도 설마 맨몸일까 하며 거미줄이라도 달고 천천히 떨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진짜 맨몸 자유낙하가 맞습니다. 세상으로 나가려면 알몸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뭐 우리도 별반 다르지는 않지만.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고공 자유낙하하는 매미 애벌레는 참 신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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