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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을 만나다 : 엔지니어의 눈으로 본 단원 풍속도첩
기와이기 - 이것은 공사판인가, 개그 콘서트인가?
조선시대 풍속화의 대명사로 꼽히는 단원 김홍도의 〈기와이기〉를 보면 우리는 대개 비슷한 설명을 듣습니다.
지붕을 잇는 서민들의 부지런한 노동. 흙을 나르는 사람, 기와를 올리는 사람, 지붕 위에서 기와를 잇는 사람. 각자 맡은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사람들의 분업과 협동.
틀린 설명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림을 아무리 오래 들여다봐도 저는 이 현장이 전혀 훈훈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꾸 웃음이 납니다. 한마디로 어이가 없습니다.
지붕 위에는 온갖 자재가 마구잡이로 쌓여 있고 기와는 사람 손보다 높게 날아다니고, 아래에서는 기와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두 장씩이나 겹쳐서 앞의 사람 머리 위를 가로질러 날아갑니다. 아래쪽에서는 엄청난 크기의 흙덩이를 줄에 매달아 올려주고, 위에서는 그 흙덩이를 잡아당기느라 몸을 거의 지붕 밖으로 내놓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한 사람은 다림줄을 이상한 추와 각도로 들여다보고 있고, 다른 사람은 위험천만한 상태에서 대패질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그림을 처음부터 다시 보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미술사학자의 눈이 아니라 30년 넘게 현장을 들여다본 엔지니어의 눈으로. 그랬더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두 군데가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도 이상하고, 자세도 이상하고, 도구도 이상하고, 자재를 올리는 방법도 이상합니다. 마치 김홍도가 어느 날 붓을 들고 “오늘은 이 공사판 사람들을 한번 제대로 웃겨 보자.”라고 작정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 그림에서는 이상한 것을 찾는 것보다 정상적인 찾는 일이 더 어려워 보입니다.
물론 이것이 작가의 실제 의도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림 전체에 반복되는 과장과 부조화를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이 작품을 단순히 ‘서민들의 부지런한 노동을 기록한 풍속화’라고만 보기에는 설명되지 않는 장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그림을 조금 다른 이름으로 불러보고 싶습니다. 조선시대 공사판 대환장 코미디. 그것도 꽤 고급스러운 코미디입니다.
1. 엔지니어에게는 아수라장이다
그림 전체를 한눈에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엔지니어의 눈으로 보면 사람보다 사람들이 작업하는 방식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저는 식은땀이 납니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과 부재들은 보이는데, 우리가 현대의 건설 현장에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작업발판이나 안전을 위한 가설구조물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곳에서 작업하고 있는데, 그 아래에는 그들을 보호해 줄 장치가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엔지니어의 눈으로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이것은 평온한 작업 현장이 아니라 안전이라는 개념이 아직 공사 현장에 제대로 들어오기 전의 아수라장에 가깝습니다.
한 사람은 지붕 끝으로 몸을 내밀고, 한 사람은 기와를 던지고, 한 사람은 흙을 끌어올리고, 또 한 사람은 그 흙을 받습니다. 하중도 움직이고 사람도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를 통제할 만한 가설구조물이나 안전장치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진지한 건축 기록화로 보면 아찔합니다. 하지만 이 장면을 코미디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김홍도는 위험한 현장을 단순히 위험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너무나 태연하게 움직이는 모습 자체를 웃음의 재료로 만든 것처럼 보입니다.
2. 일곱 명 모두 어딘가 이상하다
1) 다림줄을 보는 사람
먼저 이 사람이 다림줄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습니다. 한옥은 나무 부재를 서로 맞춰 세우고 끼워 맞추는 구조이기 때문에, 공사 과정에서 기둥이나 부재의 수직을 확인하는 일은 중요한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그림처럼 건물이 상당히 올라간 단계에서도 수직을 다시 확인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한쪽 눈을 감고 수직을 조준하는 자세도 특별히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오른손으로 줄을 잡고 왼쪽 눈으로 확인하는 것 역시 사람이 도구를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묘한 엇박자가 하나 생깁니다.
전통 건축에서 추를 매단 다림줄은 수직을 확인하는 데 쓰고, 먹통은 먹줄을 튕겨 곧은 선을 표시하는 데 쓰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 수직을 확인하는 자세로 무언가를 아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 줄의 끝에는 정교한 다림추라기보다 먹통처럼 보이는 물건이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시면 손으로 줄을 잡고 앞으로 약간 밀고 있어서 선이 수직이 아니라 사선입니다. 그러다 보니 먹통이 주춧돌과 맞닿아 있습니다. 수직을 볼 때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수직을 보려고 하는 기둥 자체도 빼뚤빼뚤 합니다.
이게 재미있습니다. 상황이 아예 말이 안되면 재미가 없는데 다림추 대신 손에 들고 있는 먹통으로도 급할 때 수직을 볼수도 있지만 다림줄 자체를 손으로 잡아서 기둥쪽으로 밀어서 기둥과 맞닿아 있고 그 기둥자체도 묘하게 살짝 비틀려 있는 이런 모든 한끗을 비튼 상황이 묘한 웃음을 짓게 만듭니다.
주변에서는 기와가 날아다니고, 흙덩이가 줄에 매달려 올라가고, 사람들은 지붕 끝에 몸을 내놓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만큼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한쪽 눈까지 감아가며 수직을 보고 있습니다.
눈은 한없이 진지한데, 장비는 전혀 진지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엇박자가 웃음을 만듭니다.
저는 이것을 단원이 건축 도구의 기능을 몰라서 잘못 그린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합니다. 그림 속에서는 수직을 확인하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도구를 일부러 들려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이것 역시 단원이 건축 현장의 도구와 작업 모습을 정확하게 관찰한 뒤, 딱 한 끗을 비틀어 만들어낸 익살은 아닐까요?
2) 기와를 받는 사람
아래에서는 기와를 던집니다. 이렇게 기와를 던질 때 위에서 받는 것은 공사현장에서 완전히 없던 풍경은 아닙니다. 실제로 현장에서 기와를 위로 던져 받아내는 아슬아슬한 풍경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한 장씩 던지는 것이 아니라 두 장씩 던집니다. 이 작품에서도 기와 두 장을 던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기와가 두 장이나 날아가는데도 그걸 한 손으로, 그것도 지붕에 걸터앉아서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 자세로는 제대로 받아내기 어려워 보입니다. 더구나 받을 때 기와가 받는 사람의 가슴 높이 정도에 포물선을 그리며 와야 하는데 기와는 손끝보다 높게 날아가고 있습니다. 저 궤적대로라면 기와는 받는 사람의 손을 지나 지붕 아래로 떨어질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그런데 단원은 그런 아슬아슬한 순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놓았습니다. 경사진 지붕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아래에서 날아오는 묵직한 기와 두 장을 한쪽 맨손으로 받아내려고 하는 저 자태는 당장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되어도 할 말 없을 판국입니다.
3) 흙덩이를 끌어올리는 사람
지붕 위의 사람은 흙을 끌어올리기 위해 거의 몸 전체를 지붕 밖으로 내놓고 있습니다. 정말 위험해 보입니다. 더 웃긴 것은 흙덩이의 모습입니다. 그림 속 흙덩이의 실제 크기나 무게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람의 손과 몸을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큰 덩어리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만약 지름 약 20cm의 구형 흙덩이라고 가정한다면, 한 덩어리만 해도 8kg 안팎입니다.
그럼에도 지붕 위의 사람은 이 무거운 흙덩이를 여러 개를 한꺼번에 끌어올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실제 무게를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가볍게 다룰 만한 하중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먼저 고꾸라질 수도 있고, 줄이나 결속이 풀리면 흙덩이가 그대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공사의 사실성이 아니라 한바탕 난리 소동을 떠는 현장이 먼저 보입니다. 단원은 이 작품에서 사람을 멋있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 모두들 우스꽝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 점이 재미있습니다.
4) 아래에서 흙덩이를 줄로 묶어주는 사람
흙은 물과 짚 등을 섞어 반죽이나 진흙 상태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림에서는 마치 단단한 흙덩이를 그대로 묶어 올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지붕에 사용할 흙이라면, 기와 사이에 넣는 홍두깨흙으로 보이는데, 저 정도의 단단함이라면 결국 지붕에서 다시 반죽하거나 펴 바르는 과정이 필요했을 텐데, 저 덩어리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했을지 궁금해집니다.
어쨌든 단단한 덩어리 형태로 지붕으로 보내서 지붕에 흙통은 안보이지만 거기서 다시 물을 부어 무르게 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지붕으로 올릴 흙덩이를 줄에 매달아 보내고 있는데, 앞서 살펴본 대로 한 덩어리에 8kg 안팎이나 나가는 묵직한 흙덩이를 여러 개 한꺼번에 묶었습니다. 실제 무게를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가볍게 다룰 만한 하중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무게 자체보다도 저 자세로 저 하중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 더 묘합니다.
5) 기와를 아래에서 위로 던지는 사람
지붕 위를 향해 묵직한 기와를 2장씩 던져 올리는 인물입니다. 묘기에 가까운 수준이지만 전 어릴 적 실제로 이렇게 2장씩 던져 위에서 받는 모습을 봤습니다. 심지어는 다른 사례를 보니 3장을 한꺼번에 던지는 것도 봤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기와를 받는 사람이 볼 수 없는 위치에서 던진다는 점, 그리고 보이지 않는 아래에서 두 장씩 던진 기와를 위에서는 한 손으로 받는다는 설정 자체가 너무나 웃깁니다. 게다가 이미 수키와가 2장이나 겹쳐서 날아가는 중인데, 기와 종류도 바꿔서 암키와로 2장이나 겹쳐서 보이지도 않는 각도에서 또 던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게 될 그 경로 중간에 무방비의 사람이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있는 상태입니다. 제가 이 공사의 현장소장었다면 당장 공사를 중단시켰을 겁니다.
6) 대패질하는 사람
저는 이 인물을 보면서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목재를 바닥에 안정적으로 눕혀 놓고 밀어도 온 힘이 드는 판에, 길쭉한 판자를 비스듬히 세워두고 그 아슬아슬한 경사면 위에서 대패질을 하고 있습니다. 대패를 미는 순간 균형이 무너저 나무판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자귀인가 도끼인가?
발치에 흩어진 공구들을 뜯어보면 웃음은 더 커집니다. 곱자(직각자), 탕개톱(톱), 그리고 도끼처럼 뒹구는, 흔히 현장에서 ‘짜구’라고도 부르는 자귀가 눈에 띕니다. 곱자와 탕개톱은 제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유독 시선을 붙드는 것은 이 기묘한 자귀입니다. 활처럼 굽어 있는 자루는 전통 자귀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지만, 날을 보면 도끼 같고, 손잡이로는 쓸모없어 보이는 엉뚱한 곁가지까지 불쑥 뻗어 있습니다.
엔지니어의 시각에서 이 공구를 들여다보면 흥미는 배가됩니다. 완전히 터무니없는 엉터리라면 차라리 무덤덤했을 텐데, 뜯어볼수록 기능적으로는 묘하게 설득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 속 도구는 90도 가까이 꺾인 자루를 지녀 영락없는 자귀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박혀 있는 쇠날을 보면, 가로로 깎아내는 자귀 날이 아니라 장작을 패듯 세로로 결합된 일직선의 도끼날처럼 보입니다.
자귀와 도끼가 둘 다 필요하니 아예 하나의 도구로 합쳐버린 것일까요? 나무줄기인지 뿌리인지 모를 굽은 목재에 두 개의 손잡이 형상을 남겨두고 도끼날을 얹어놓은 이 정체불명의 도구는, 실제로 쥐고 쓰려면 어떻게든 작동은 될 것 같아 더 실소를 자아냅니다. 이 그림에는 해학 포인트가 무수히 많지만, 가장 공을 들인 해학 포인트가 이 신묘막측한 하이브리드 공구, 일명 ‘자귀도끼’가 아닐까 합니다.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공구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비실용적이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단원의 머릿속에서 나온 창작인 것 같은데, 이런 것을 생각해낸 것을 보면 단원도 저처럼(?) 상당한 엔지니어 감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와 좀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단원이 제 글을 본다면 “이제야 이걸 발견해 내다니” 하면서 저를 대견하게 여기실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제라도 누군가 자신의 이 공학적 유머 코드를 알아보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단원의 그림 속 도구들은 결코 무신경한 오작품처럼만 보이지 않습니다. 철저히 기능적인 원리를 바탕에 깔아둔 채 딱 한 끗을 비틀어놓은 지적인 유머처럼 보입니다. 위태로운 경사면 대패질부터 이 신묘막측한 하이브리드 공구까지, 단원은 단순한 노역의 현장을 유쾌한 해학의 무대로 탈바꿈시켜 놓았습니다.
대패를 미는가 당기는가?
대패를 쥔 오른손의 자세도 어딘가 어색합니다. 자세히 보면 오른손을 왼손처럼 그려 놓았습니다. 단원의 작품에는 유난히 이런 신체 왜곡이 많이 보이는데 진짜 그렇게 된 것을 그대로 보고 그린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해학을 위해 왜곡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대패는 미는 방식의 대패인데, 두 손으로 봉을 힘껏 쥐고 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 손 모양으로는 봉 자체를 잡을 수가 없고 손을 단순히 누르는 정도로 저 힘들고 정밀한 대패 작업을 한다는 것은 거의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 흐르는 전체 해학 코드를 봤을 때 이것을 실제로 장애를 가진 사람을 보고 그린 것이라고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4. 기와 하나가 문제가 아니다
참고로 대패질의 방향 자체를 이상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일본식 대패는 몸 쪽으로 당기면서 나무를 깎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목공 작업을 기준으로 이 그림을 보면, 이 사람의 자세가 처음부터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사용하던 전통 대패는 이와 달랐습니다. 일본식 대패처럼 당기는 방식이 아니라, 앞으로 밀어서 나무를 깎는 방식이었습니다.
김홍도의 〈기와이기〉에 그려진 대패 역시 이러한 전통 대패의 사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을 단순히 “대패질을 엉터리로 하고 있다”고 몰아붙이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대패를 앞으로 미는 동작 자체는 조선시대의 작업 방식과 맞다고 보입니다.
다만 진짜 문제는 대패를 어느 방향으로 쓰느냐가 아니라, 길쭉한 나무판을 비스듬히 세워놓고 그것을 안정적으로 고정하지도 않은 아슬아슬한 상태에서 그 위에 대패질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차이를 모르고 오늘날의 일본식 대패를 기준으로 그림을 보면, 조선시대 목수가 정상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부분까지 엉뚱하게 이상한 자세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7) 현장을 지휘하는 사람
현장을 지휘하는 듯한 인물도 가관입니다. 일하러 온 사람이 아니라 나들이 나온 양반처럼 발에는 공사판과 영 어울리지 않는 신발을 신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땀을 흘리며 몸을 던져 일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긴 막대기를 짚고 한가롭게 서 있습니다.
이 인물을 요즘의 현장소장에 비유한다면, 이 사람은 영락없이 그 자리에 해당합니다. 작업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자재를 나르고 있는데, 이 사람이 정말 현장을 책임지는 우두머리라면, 요즘식으로 치면 안전모도 착용하지 않은 채 신발마저 공사판과 어울리지 않는 차림으로 한쪽에 서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저는 여기서부터 웃음이 터집니다.
3. 이 건물은 도대체 무엇일까
잠시 시선을 돌려 건물 자체를 보면 또 다른 의문이 생깁니다. 벽과 문이 거의 보이지 않는 개방적인 구조입니다. 평범한 민가라기보다는 다른 용도의 건물처럼 보이지만, 정확한 용도는 그림만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엔지니어의 눈에는 용도보다 바닥이 먼저 들어옵니다.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은 보이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건물의 든든한 기단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잠깐만요. 바닥 기단은 어디일까요?"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물론 이것을 곧바로 조선시대 건축법 위반이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난리통 같은 현장에서 바닥까지 어딘가 허술해 보이니 웃음이 더해집니다. 적어도 민가용 초가집을 짓는 장면으로 보기 어려운 만큼, 이런 엉뚱하고 허술한 행동들이 화면 전체에서 만들어내는 대비는 더욱 단원의 의도된 풍자로 보입니다.
4. 기와 하나가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기와를 쌓아놓은 꼴을 보면, 이번에는 가관입니다.
실제 전통 한옥에서 기와를 이는 작업은 아래에서 위로 차례로 올려가는 것이 정석이지만, 현장 상황에 따라 임시로 쌓아두거나 여러 방향으로 적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기와가 옆으로 쌓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잘못된 공법이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묘합니다. 기와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작업 중인 사람들 주변으로 자재가 뒤엉켜 있습니다. 특히 지붕 위에서 벌어지는 기와의 이동과 적재를 앞에서 살펴본 기와 던지기 장면과 함께 놓고 보면, 이 현장은 어딘가 지나치게 부산스럽습니다.
문제는 ‘기와를 이렇게 놓을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왜 이 공사판은 이렇게까지 정신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요즘의 건설 현장이라면 자재를 임시로 쌓아두더라도 작업 동선과 안전을 고려해 정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단원의 화면에서는 기와도, 흙도, 목재도 각자의 자리를 고집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움직이고, 자재는 자재대로 흩어져 있습니다.
특히 이미 아래에서는 기와를 두 장씩 날려 보내고 있고, 위에서는 그것을 받아내고 있습니다. 바로 옆에서는 무거운 흙덩이를 끌어올리고 있고, 또 다른 곳에서는 목재를 대패질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공정은 돌아가는데 현장은 통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재미있다고 느끼는 지점은 오히려 여기에 있습니다. 단원은 건축 현장을 질서정연하게 기록하기보다, 사람과 자재와 작업 동작을 한 화면 안에 뒤섞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하나씩 뜯어볼수록 ‘이것도 이상하고 저것도 이상한’ 장면이 계속 나타납니다.
기와를 쌓는 방식 하나가 결정적인 오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와를 던지고, 받고, 쌓고, 흙을 끌어올리고, 목재를 다듬는 모든 장면이 서로 얽히면서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부산스러움이 웃음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실제 공사판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웃기려고 작정하고 일부러 한바탕 난리통으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5. 공사판에 어울리지 않는 옷
일꾼들의 옷차림을 보면, 작업하기 편한 차림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들이 걸치고 있는 옷은 편안한 작업복이라기보다는 펄럭이는 자락에 가깝습니다. 요즘으로 비유하자면 양복 차림으로 공사판에 뛰어든 격인데, 복장의 불편함을 아랑곳하지 않고 옷자락을 휘날리며 일하는 모습은 해학의 극치입니다.
6. 이상한 것이 너무 많다면, 혹시 그것이 바로 웃음일지도 모른다
이제 여기까지 살펴봤다면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기와 하나가 문제였을까요?
다림줄을 보는 사람도 묘합니다. 기와를 던지는 사람도 아슬아슬합니다. 그것을 받는 사람은 더 아슬아슬합니다. 흙을 끌어올리는 사람은 거의 지붕 밖으로 몸을 내밀고 있고, 아래에서는 무거워 보이는 흙덩이를 줄에 매달아 올립니다. 대패질하는 사람은 불안정한 목재 위에서 작업하고 있고, 현장을 지휘하는 듯한 사람은 한가롭게 서 있습니다.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조금 이상한 장면” 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 화면 안에서 계속 반복됩니다.
사람의 자세가 이상하고, 작업 방법이 이상하고, 도구가 이상하고, 자재의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그런데도 그림은 이상하게 자연스럽습니다.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기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오류가 하나라면 실수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장면이 계속 반복된다면,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표현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우리가 지금까지 ‘오류’라고 부른 것들은 각각 따로 떨어진 문제가 아니라, 그림 전체에 반복해서 만들어 놓은 하나의 부조화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그림을 보면 묘하게 달라집니다.
이 사람은 왜 저렇게 하고 있고,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하고 있는지 하나씩 따져볼수록 웃음이 납니다.
이상한 사람이 한 명 있는 것이 아니라, 이상한 상황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저는 이 그림을 보는 질문 자체를 바꾸게 됩니다.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가?”에서
“단원은 왜 이렇게까지 그렸을까?”
로 말입니다.
7. 단원은 왜 이렇게까지 사람들을 웃겼을까
그렇다면 단원은 왜 이 사람들을 이렇게까지 우스꽝스럽게 그렸을까요?
저는 이것을 단순히 공사 현장에서 실제로 벌어진 웃긴 순간을 포착한 그림으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원은 조선시대 공사 현장의 부산스러움과 위험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일부러 과장하고 비틀어 하나의 해학적인 무대로 만든 것은 아닐까요?
오늘날 엔지니어의 눈으로 보면 거의 조선시대판 안전불감증 현장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섭기보다 웃깁니다.
어쩌면 우리는 단원이 그림 전체에 깔아놓았는지도 모를 코미디 무대에서 소품 하나를 겨우 찾아내고는 ‘이상하다!’며 소란을 피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정작 봐야 할 것은 그 소품 하나가 아닙니다.
그 소품을 포함해 그림 전체가 얼마나 철저하게 웃기게 만들어져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그림을 조선시대 공사판을 통째로 무대에 올려놓고 김홍도가 벌인 한바탕 블랙 코미디, 아니 조금 더 가볍게 말하면 조선시대판 한바탕 코미디로 읽고 싶습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20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그 웃음의 포인트는 놓친 채, 다림줄의 추 하나와 대패질하는 손 하나를 붙잡고 ‘오류’와 ‘위작’을 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단원은 우리까지 이 무대에 등장시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원은 그림 속 사람들을 웃기게 만들어 놓았는데, 정작 우리는 그 그림 앞에서 진지한 얼굴로 소품 하나를 붙잡고 서로 논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에서 가장 마지막에 웃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어쩌면 단원 자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200년 뒤 그 무대에 올라온 우리를 보며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어디 한번 자세히 봐라.”
기와이기 동영상 : https://youtu.be/ubWusPlgsSM
* 위 내용을 갖고 AI한테 동영상 좀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제가 생각한 것하고 많이 다르긴 한데, 의도한 바가 아닌 엉뚱하게 나온것 자체도 웃겨서 그대로 올립니다.실제 기와 던지는 모습 : https://www.youtube.com/shorts/BlPqGKbj3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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