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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을 읽다 보면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저려오면서도 쓴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일평생 달링턴 홀의 집사로 살며 국가의 중대사를 움직인다는 헛된 자부심에 취해 살았던 스티븐스. 그가 낡고 클래식한 포드 세단을 몰고 영국의 남서부를 누비며 떠난 7일간의 자동차 여행은 겉보기엔 그럴듯한 전원 드라이브처럼 포장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완전히 가관입니다. 옥스퍼드 근처를 출발해 솔즈베리, 타운톤, 데번주 모스콤(가상 지명), 콘월의 리틀 콤프튼(가상 지명)을 찍고 웨이머스 부두를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환 코스. 길치 본능을 발휘해 꼬불꼬불한 영국의 옛 국도를 악전고투하며 헤맨 실제 주행 거리를 대략 따져봐도 1,000킬로미터가 훌쩍 넘습니다. 물론 가상의 지명이 있어 정확하게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요. 남들이 보기엔 영국의 아름다운 전원과 해안선을 아우르는 고즈넉한 낭만 여행이겠지만, 알고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시골길을 엉뚱하게 빙빙 돌아다닌 여행에 가깝습니다.
특히 덜컹거리는 낡은 포드 차를 몰며 창밖을 바라볼 때마다 스티븐스는 영국의 풍경을 향해 진지한 예찬을 늘어놓습니다. "세계의 어느 다른 지역이 영국의 풍경만큼 품위와 고요함을 줄 수 있겠는가, 영국의 풍경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그 과장 없는 아름다움에 있다"라며 감탄을 마지않습니다.
작가 이시구로는 바로 여기에 정교한 블랙코미디를 심어 놓았습니다. 대단한 역사의 무대에 헌신했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파시즘에 기울어진 달링턴 경에게 충실히 봉사하며 인생을 허비한 한 인간의 헛된 기만과, 그가 마주한 영국의 찬란한 전원이 사실은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시골길에 불과하다는 씁쓸한 괴리. 그것이 작가가 설계한 첫 번째 냉소였습니다.
하지만 진짜 기막힌 블랙코미디는 책장을 덮은 현실에서 벌어집니다.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실제 촬영지는 소설 속 가상의 달링턴 홀 하나를 만들기 위해 실제 영국의 저택 여러 곳을 이어 붙였고, 소설 속 지명과 영화 속 촬영지도 서로 어긋나 있습니다. 엉뚱한 로케이션의 오차마저 영화의 시각적 아름다움 속에 훌륭하게 포장되었습니다.
더 웃긴 건 그 다음입니다. 이 비참하고 쓸쓸한 자기 기만의 여정, 그 무의미하고 비효율적인 1,000킬로미터가 넘는 방황을 알면서도, 독자인 우리들은 "와, 영국의 남서부 전원 풍경 정말 아름답다!"라며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스티븐스가 과거의 후회와 잃어버린 사랑을 곱씹으며 덜컹거리는 포드 차를 몰았던 그 길을, 현대의 우리들은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을 켜고 렌터카를 빌려 "오, 바로 이 영화 속 그 로케이션이야!"라며 기꺼이 돈과 시간을 들여 똑같이 따라 달립니다.
생각할수록 참 묘하고 우스운 일입니다. 작가가 늙은 집사의 헛발질을 비웃기 위해 파놓은 씁쓸한 비극의 함정에, 우리 현대의 독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걸어 들어가 낭만이라는 명목의 인증 사진을 찍어대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저 역시 그 거대한 블랙코미디의 연장선에서 예외는 아닙니다. 스티븐스가 겪은 헛된 순례의 길, 그 굽이진 시골길을 저도 언젠가 낡은 포드 세단을 몰고 직접 따라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기름이 떨어져 엉뚱한 민가에 불시착하고, 꼬불꼬불한 국도에서 길을 잘못 들어 투덜거리면서도 창밖을 향해 "세계의 그 어느 곳이 이토록 은은하고 품위 있는 전원의 풍요로움을 품고 있단 말인가" 하고 소리 내어 감탄하는 저를 상상해봅니다.
특히 제 마음이 머무는 곳은 소설 본문에서 비어 있는 그 5일차입니다.리틀 콤프튼에서 미스 켄턴을 떠나보내고 웨이머스 부두에 이르기까지 스티븐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원작이 말해주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동안 스티븐스는 자신이 평생을 바친 충정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 조금씩 마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진짜 공포는 정치가나 집사로서의 실패가 아니라,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사랑을 내 손으로 밀어냈다는 사실 그 자체였을지 모릅니다.
저 역시 그를 닮아 있었습니다.
수십 년 전 저는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다가오는 인연을 붙잡는 법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그게 첫사랑인지도 몰랐습니다.
헤어지는 법도 몰랐습니다.
왜 헤어졌는지를, 지금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더 아련합니다.
다만 덜컹거리는 차창 밖으로 스쳐 가던 영국의 평범한 시골길처럼, 내 청춘의 풍경 역시 엉뚱한 방향으로 길을 잘못 든 채 속절없이 흘러갔을 뿐입니다. 웨이머스의 찬 바닷바람 속에서 스티븐스가 삼켰을 침묵은, 어쩌면 수십 년 전 내가 터득하지 못해 삼켰던 그 미련의 온도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찰싹이는 파도 소리 외에는 아무도 없는 부두에서, 헤어진 이유도 잘 알지 못했던 그 그리운 이를 바닷바람 속에 띄워 보냅니다. 지나간 세월의 허망함과 닿을 수 없는 온기를 가슴 깊이 품은 채 묵묵히 발자국을 남깁니다.
그렇게 웨이머스 부두의 해 질 무렵, 전등이 하나둘 켜지는 것을 등지고 밤늦도록 바닷가의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더 이상 사람들이 없어지면 쓸쓸하고 텅 빈 호텔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마음을 다시 잡고 굽이진 시골 국도를 낡은 포드 세단으로 천천히 달리며, 다시 익숙한 옥스퍼드 근처의 달링턴 홀 대문으로 쓸쓸히 돌아오는 상상을 해봅니다.
지독하게 냉소적인 블랙코미디의 무대 위에서, 정작 저는 그 텅 빈 해변을 걸으며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순정을 되새기고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모릅니다. 인생의 헛발질을 비웃는 작가의 품에 안겨, 기꺼이 그 기막힌 코미디의 주인공이 되어 나만의 쓸쓸하고도 낭만적인 한 페이지를 완성하고 싶어집니다.
* 추가사항
영화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의 실제 촬영지와 문학 여행 가이드를 상세히 다루고 있는 대표적인 해외 영화 로케이션 전문 사이트들과 문학 트레일 플랫폼들입니다.
1) Movie-Locations.com (The Remains of the Day 페이지):
영화 속 가상의 저택인 달링턴 홀의 외관으로 나온 글체스터셔의 다이햄 파크(Dyrham Park)부터 스티븐스가 머물렀던 펍, 그리고 미스 켄턴과 마지막 이별을 나누었던 웨스턴슈퍼메어(Weston-super-Mare, 영화 속 클리브던 배경) 해안가와 부두까지 실제 촬영 장소들의 주소와 상세한 비화가 안내되어 있습니다.
2) The Book Trail (The Remains of the Day 트레일):
가즈오 이시구로의 원작 소설 속 배경과 실제 영화 로케이션 지점을 엮어서 독자들이 직접 영국의 남서부 전원을 따라 자동차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코스를 분석하고 소개하는 대표적인 문학 여행 가이드 사이트입니다.
3) Reelstreets (The Remains of the Day 섹션):
영화 속 장면과 실제 영국의 도로, 건물들의 현재 모습을 대조하며 스티븐스가 차를 몰고 지나갔던 길목들을 세밀하게 추적해 2차 자료와 현장 사진을 함께 제공하는 마니아층의 필수 순례 코스 안내 사이트입니다.
4) 영화 촬영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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