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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야기 : 당신을 규정하는 것은 당신의 질문이다.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를 먼저 묻는다. 하지만 어쩌면 한 사람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답이 아니라 그가 던지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같은 것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그냥 지나치고, 어떤 사람은 멈춰 선다. "왜 저럴까?" 그 한마디에서부터 사람의 생각이 갈라진다.
[피터 브뤼헐 -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예전에는 많이 아는 사람이 유리했다. 책을 많이 읽고, 많은 경험을 하고, 머릿속에 많은 지식을 쌓아놓은 사람이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지식의 양이 곧 능력처럼 여겨지던 시대였다. 그런데 이제 조금 이상한 시대가 되었다. 인공지능에게 물어보면 웬만한 것은 대답해 준다. 역사도 알고, 과학도 알고, 수학도 알고, 그림도 알고, 심지어 내가 평생 접해보지 못한 분야의 전문적인 내용까지 순식간에 설명한다. 말 그대로 거대한 도서관과 수많은 전문가를 한꺼번에 데리고 다니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 중요한 질문은 조금 달라졌다.
"무엇을 알고 있는가?"에서 "무엇을 물어볼 것인가?"로.
요즘 흔히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라는 말을 한다.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 질문을 정교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좋은 질문을 만드는 능력은 단순한 기술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질문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그림을 보고도 미술을 공부한 사람은 색과 구도를 묻고, 건축가는 구조를 묻고, 농부는 농사법을 묻고, 의사는 사람의 자세와 표정을 볼 것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 그 그림과 비슷한 일을 해본 사람은 전혀 다른 것을 묻는다. "저렇게 하면 실제로 일이 되나?" 질문 하나에는 그 사람이 무엇을 경험했는지, 무엇을 배웠는지, 무엇에 익숙한지, 무엇을 이상하게 느끼는지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래서 같은 도구를 사용해도,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된다.
나는 그림을 보다가 이상한 것이 있으면 묻는다. 특히 요즘 단원풍속도첩 해석을 하면서 내가 이미 아는 것이라도 재차 묻는다. "왜 저렇게 했을까?" "저 기구로 실제 작업이 가능할까?" "저 사람이 저 자세로 저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러면 답이 나온다. 그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읽다가 또 이상한 것이 생기면 다시 묻는다. "그런데 이건 앞뒤가 맞지 않는데?" 그러면 또 다른 답이 나온다. 어떨 때는 내 질문을 오해하고 엉뚱한 답이 나오기도 한다. 그 답을 다시 내 경험과 기억에 비춰본다. "내가 어릴 때 본 것은 이렇지 않았는데?" 그러면 또 질문이 생긴다.
질문이 답을 만들고, 답이 다시 질문을 만든다. 그렇게 대화를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면 처음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곳까지 가게 된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들도 사실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니다. 모르는 것은 묻고, 답을 듣고, 다시 의심하고, 내 경험과 기억에 비춰보고, 또 질문한다. 그 과정에서 나온 답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 소화하고 다시 내 언어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글 역시 혼자 머릿속에서 뚝 떨어진 생각은 아니다. 질문과 답을 수없이 주고받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생각이고, 그중에서 내가 받아들일 것과 버릴 것을 골라 다시 내 것으로 만든 결과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 우리가 지식을 다루는 새로운 방식인지도 모른다. 답을 얻는 것보다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 그리고 얻은 답 가운데 무엇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많은 답을 가지고 있어도, 어떤 답을 찾아야 하는지 결정하는 질문까지 대신해줄 수는 없다. 물론 질문 자체를 만들어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질문이 정말 나에게 중요한 질문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결국 내가 무엇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은 세상의 수많은 문을 열어줄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문 앞에서 멈춰 설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나에게도 그런 문이 하나 있었다. 발렌시아의 어느 성당 앞에 서 있던 평범한 청동문이었다. 나는 그 문에 새겨진 작은 부조 하나에 이상하게 마음이 붙잡혔다. 사진을 찍고도 그냥 지나가지 못했다.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일까?" 그 작은 질문 하나가 결국 자료를 찾아보게 했고, 이야기를 상상하게 했고, 마침내 《발렌시아의 인장》이라는 소설까지 쓰게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수백 년 된 성당 앞에 청동문 하나가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앞에서 멈춰 선 것은 나였다. 누군가 그 문을 대신 발견해 줄 수도 있고, 그 부조에 관한 자료를 찾아줄 수도 있고, 내가 던진 질문에 수많은 답을 내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것까지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그냥 지나갈 문 앞에서 누군가는 멈춰 선다.
그리고 그 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묻는다.
"왜?"
그 순간부터 그 사람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쩌면 한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답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닐지도 모른다.
무엇에 멈춰 섰는가.
무엇을 이상하게 여겼는가.
무엇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것에 대해 무엇을 질문했는가.
그 질문들이 쌓여 지금의 그 사람을 만든다.
당신을 규정하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질문하는가이다.
그리고 오늘 내가 던지는 질문은 어쩌면 내일의 나를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지금까지 던져온 질문들의 흔적이 바로 당신이다.
PS : 사진 선정 이유
피터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의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을 첨부한 이유입니다.
저 멀리 태양이 바다로 지고 있고, 쟁기를 끄는 농부와 양을 치는 목동, 낚시를 하는 어부가 각자의 일상에 몰두한 채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그 누구도 깃털을 흩뿌리며 하늘에서 떨어져 바다에 거꾸로 박히고 있는 이카루스의 비극적인 추락에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물결 위에 살짝 드러난 작은 두 다리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멈춰 서서 "저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라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만이 비로소 그 이면의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세상이 무심하게 지나치는 풍경 앞에서 홀로 걸음을 멈추고 질문을 던지는 것, 그리고 그 질문이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 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골라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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