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야기 : 불타는 6월과 잠자는 아리아드네, 당신의 선택은?

성경의 동물 : 소 — 골수와 희생


[부다페스트에서 마주한 비워진 통뼈와 골수]

오래전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출장을 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법인장이 백 년이 훌쩍 넘었다는 유서 깊은 전통 레스토랑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접시 위에 놓인 것은 정갈하게 손질된 흔한 스테이크가 아니었다. 노릇하게 구워진 거대한 소의 통뼈 하나가 아무것도 감추지 않은 채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살코기는 이미 발라내어 흔적도 없었다. 대신 그 뼈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어둡고 깊은 구멍 속으로, 차갑고 기다란 쇠꼬챙이 하나가 꽂혀 있었다. 종업원은 그 길쭉한 도구로 뼈 속 깊은 곳을 긁어내어 먹으라고 일러주었다. 쇠꼬챙이가 뼈의 안벽을 긁을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맑은 노란 기름과 함께 녹아내린 골수가 덩어리져 접시 바닥으로 흘러나왔다.

버터처럼 부드럽고 기름진 그 골수를 혀 위에 얹는 순간, 형언하기 힘든 서늘한 전율이 스쳤다. 흥미롭고 이색적인 미식의 경험이기는 했으나, 솔직히 자주 찾아가 먹고 싶다는 생각은 결코 들지 않았다. 단순히 맛을 즐기기에는 눈앞의 정경이 주는 심리적 무게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정갈하게 포장된 살코기를 먹으며 그 짐승의 죽음을 적당히 망각한다. 식탁 위의 고기는 편리한 식재료로 정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앞에 놓인 거대한 뼈의 공동(空洞)과 쇠꼬챙이는 속일 수 없는 생명의 실체를 폭로하고 있었다. 성경은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다고 선언한다(레위기 17장 11절). 그 붉은 피와 생명의 기운이 머물렀을 뼈의 가장 깊숙한 중심부까지 남김없이 긁어내어 먹고 있다는 사실이, 살아 숨 쉬며 대지를 딛던 한 존재가 마침내 하얗게 비워진 껍데기만 남긴 모습과 겹쳐 보이는 순간이었다.

이 오싹하고도 숭고한 식탁의 광경은 구약성경 레위기 1장에 기록된 번제(燔祭)의 제단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레위기 1장 6-8절)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제사 가운데 번제는 유독 철저하다. 화목제처럼 사람이 고기를 나누어 먹거나, 속죄제처럼 제사장이 고기를 취하는 법이 없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소를 잡으면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린다. 이어 드리는 사람이 손수 가죽을 벗기고 사지의 관절을 따라 각을 뜨면, 제사장은 머리와 기름까지 남은 몸의 전부를 제단 위에 벌여 놓는다. 벗겨낸 가죽만이 제사장의 몫이 될 뿐, 제단 위의 모든 것은 불을 놓아 온전히 태운다. 완전한 소진이다. 제물로서의 소는 가죽을 제외한 뼈와 살점까지 남김없이 불태워져 하나님을 향한 향기로운 냄새로 사라진다.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드렸다는 일천 번제(열왕기상 3장 4절)의 무게도 여기에 있다. 천 마리의 번제물이 제단 위에서 차례로 드려지며 그 수많은 뼈와 기름이 불꽃 속에서 재가 되어 갈 때, 산당을 가득 채웠을 막대한 피와 연기는 양적인 과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때 자신의 모든 주권과 생명, 뼈 속 깊은 곳까지 송두리째 내어놓아야 한다는 절대적인 복종의 부피였다.

이 제단 위의 칼날은 신약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과 겹쳐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브리서 4장 12절)

제물의 관절을 가르고 뼈를 쪼개어 그 중심을 제단에 바치듯,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위선과 껍데기를 가르고 들어와 영혼의 가장 은밀한 실체를 파헤친다.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는 것은, 존재의 밑바닥까지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열어젖히는 일이다. 지난 글에서 살펴본 예수의 온유한 쉼 역시, 이처럼 자아의 껍질이 깨어지고 중심이 비워지는 자리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식사를 마치고, 골수를 파먹고 남은 빈 통뼈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소는 살아 있는 동안 멍에를 얹고 묵묵히 밭을 갈아 인간의 곡식을 일구어 주었다. 그리고 생을 다한 뒤에는 제단의 제물이 되고 식탁의 양식이 되어, 뼈의 가장 깊은 골수까지 내어주었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밭을 갈아 곡식을 얻게 해 준 것도 소였고, 그 곡식을 팔아 내가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해 준 것도 소였다. 뼈 속 기름진 골수까지 내어주어 내 배를 불려 준 것도 결국 소였다. 한 생명이 남김없이 부서져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오늘도 내 밥그릇을 채우고 내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저녁마다 가마솥에 소죽을 끓여 먹이던 소년은, 어느새 그 소가 내어준 것으로 살아가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살아서는 온몸으로 땅을 갈고, 죽어서는 뼈와 골수까지 비워낸 소를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과연 세상과 이웃을 향해 무엇을 내어줄 수 있을까. 내어주기는커녕, 살아생전 다 누려보지도 못할 한 움큼의 재물과 자존심을 움켜쥐겠다고 오늘도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식탁 위에서 마주한 텅 빈 소뼈는 생명을 바쳐 나를 먹여 살린 거룩한 희생을 향한 경외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서늘하게 묻고 있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위해 내 영혼의 골수를 태우며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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