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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꽃과 만난다 : 에필로그 - 오래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에필로그 - 오래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2026.09.27 이른 아침 탄천에서 만난 달맞이꽃]

세상의 일은 결국 얼마나 오랫동안 다정하게 눈을 맞추었느냐에 따라 그 깊이가 완전히 달라진다.

물가에 무심히 핀 달맞이꽃 하나만 하더라도 그렇다. 목적지를 향해 바삐 걷는 사람에게는 그저 천변에 흔한 노란 들꽃 한 송이에 불과하지만, 어둠 속에서 모기에 물리고 팔이 저려오는 시간을 견뎌낸 사람에게는 꽃술 하나 꿈틀하는 작은 움직임조차 놓칠 수 없는 경이가 된다. 꽃잎은 이미 간밤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피어났지만, 진짜 신비는 새벽빛이 밝아온 후에 이어지고 있었다. 꽃잎이 열린 뒤 수술이 먼저 고개를 들고, 밤을 지나 아침 햇살이 닿을 때까지 암술이 시차를 두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그 은밀한 시간차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요즘 매일 걷는 탄천의 물길 위에서도 같은 원리를 배운다. 최근에는 거의 매일 바위 위에 올라앉아 볕을 쬐고 있는 자라를 만났다. 물살이 거세게 흐르고 세상의 온갖 분주함이 양옆으로 질주하는 동안에도, 녀석은 미동조차 없이 단단한 등딱지를 볕에 내맡기고 앞발을 기도하듯 높이 든 채 하늘을 올려다본다. 적당한 거리는 괜찮지만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가려 들면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자취를 감추고 만다. 녀석의 호흡을 방해하지 않고 그 자리에 묵묵히 멈춰 서서 물결과 함께 시선을 낮출 때, 그제야 그 작은 몸통에 깃든 견고한 평화가 내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성경이 끊임없이 속삭이는 믿음의 언어도 결국 기다림과 시선의 문제였다. 광야를 걷던 시간, 보이지 않는 응답 앞에서도 그 자리를 지켜내야 했던 침묵의 순간들. 말씀은 조급한 손길로 책장을 넘긴다고 해서 온전히 읽히지 않는다. 멈추어 서서 그 구절에 머물고, 내 삶의 곤고함과 의심을 다 통과하며 오래도록 곱씹을 때, 글자 뒤에 숨은 참된 위로와 뜻이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대상이 스스로를 온전히 드러낼 때까지 내 마음의 조급함을 끄고 기꺼이 그 자리에 서 있어 주는 거룩한 인내일 것이다.

사랑도, 사람이 살아가는 수많은 과정도 똑같은 이치에서 움직이는 것 같다.

돌아보면 나 역시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한다고 믿으면서도, 왜 상대는 내 마음만큼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느냐며 서운해하고 원망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내가 사랑한다고 착각했던 많은 순간들이, 실은 내 조급한 감정의 속도를 일방적으로 쏟아부은 것에 불과했음을.

달맞이꽃의 꽃잎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그 마음으로, 자라가 안심하고 볕을 쬘 수 있도록 숨을 죽이던 그 마음으로, 나는 그 사람을 기다려 주었던가. 오히려 내 속도에 맞춰 상대가 반응하기만을 재촉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애정이란 결국 대상을 향해 나의 시간을 온전히, 기꺼이 내어 주는 일이다. 내 기준의 조급함을 내려놓고 그 사람이 스스로 마음을 열 때까지 곁을 지켜 주는 그 축적된 시간만이, 비로소 사랑이라는 신비의 문을 열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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