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기 : 배추농사는 어려워2

아이들의 인장 : 아무 냄새도 안 나

['아이들의 인장' 연재를 희망하며]

2037 발렌시아의 방주를 짓고 있던 작가 Stanley의 눈에,
갑자기 잿빛 물길을 묵묵히 걷는 동물 가면의 아이들이 들어왔습니다.

어제 이기훈 작가라는 분을 전시회 소개글을 보고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독특한 이력도 그렇고 독특한 그림도 그렇고, 직접 보고 싶어 설레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당장 구의역으로 달려갔습니다.

저에게는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미래의 어느 초등학생이 쓴 일기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전시 소감을 그림일기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적어 봅니다.
이기훈 작가님께서 허락만 한다면 모든 작품을 이야기로 풀어보고 싶습니다.


대홍수가 휩쓸고 간 뒤의 세계.

어른들의 오만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곳에서 아이들은 저마다의 인장을 갖고 살아갑니다.
불완전한 몸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서로를 밧줄로 묶고 함께 길을 찾습니다.

이 기록은 2050년 물에 잠긴 어느 곳에서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이 보내온 1년의 기록이자 우리가 마주하게 될 내일의 풍경입니다.


2050년 7월 6일 수요일, 날씨 잿빛 안개

'아무 냄새도 안 나'


[이기훈 -〈가면놀이(Masquerade)〉연작 중]

허리에 묶은 밧줄이 뒤쪽으로 툭 당겨졌다.
세 가닥으로 꼰 질긴 줄이다.
바로 뒤를 따르던 곰이 울퉁불퉁 솟은 젖은 암벽에 발이 걸린 모양이다.
철탑 아래 고인 7월의 물웅덩이에서 미지근하고 끈적한 물이 튄다.
발목을 적시는 거친 물길과 흙탕물 사이에서 희미한 김이 피어오른다.
붉은빛 안개가 자욱하게 번져 앞이 통 보이지 않는다.
옛날에는 비가 오면 물이 잘 빠지라고 이랑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긴 온통 거친 바위와 물바다다.
물이 빠져나갈 구멍 같은 건 애초에 없다.
물이 안 빠지면 우리가 물 위로 바위를 딛고, 줄을 잇고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시뻘건 하늘 위로 거대한 쇠 철탑 꼭대기만 삐죽 솟아 있다.
어른들은 바닷가 발전소들이 물에 잠기기 전에 저 탑들이 전기를 날랐다고 했다.
하늘에 번개를 마음대로 부리려다 세상을 다 빠뜨렸다고 했다.
시커먼 재를 퍼뜨린 어른들의 잘못이 저 녹슨 철탑과 닿아 있다고 한다.
공장 지대 주변 옛날 장독대에 묻던 시멘트 가루와는 다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서운 불의 가루가 탑을 타고 세상을 덮쳤다.

저 한참 앞, 비탈진 바위 언덕 너머로 돼지와 소의 뒷모습이 가물거린다.
녀석들은 물길을 잘 건너고 있을까.
내 바로 앞에서는 악어가 등딱지처럼 단단한 가면을 곧추세우고 조심스레 돌밭을 짚어 나간다.
나는 멈춰 서서 뒤쪽으로 이어진 밧줄을 세 번 가볍게 털었다.
"천천히 와. 바위 사이 물웅덩이가 미끄러워."

뒤를 따르는 곰은 두 눈이 몹시 흐릿하게 태어났다.
녀석은 눈구멍 자리에 두꺼운 유리알을 덧댄 둥근 곰 가면을 쓰고 배낭을 멘 채 걸음을 옮긴다.
곰이 더듬거리며 손을 뻗어 내 머리 위로 길게 솟은 토끼 귀를 만졌다.
"토끼야?"
"응, 나야."
"바위틈에 뾰족한 쇠붙이가 튀어나왔어."
 "왼쪽으로 두 뼘만 돌아와."

내 진짜 이름은 집 신발장 구석에 버려두고 왔다.
난 아빠가 누구인지 모른다.
세상에 있기는 한 건지도 모른다.
태어날 때부터 엄마랑 둘뿐이었다.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을 때, 엄마는 물에 잠긴 가게에서 주워온 하얗고 단단한 토끼 가면을 주셨다.
속에 말린 스펀지와 헝겊을 두툼하게 덧댄 가면이었다.
내 머리꼭지는 아직 뼈가 덜 굳어 말랑말랑하다.
다치지 않게 끈을 꽉 묶어주며 엄마는 이제부터 내 이름이 토끼라고 했다.

곰의 뭉툭한 손가락이 내 토끼 귀를 더듬으면 마음이 놓인다.
눈이 흐린 녀석한테 내 머리는 물렁거리는 상처가 아니다.
언제든 손을 뻗어 길을 찾을 수 있는 단단하고 길쭉한 길잡이 귀일 뿐이다.

더운 바람이 거친 물길을 타고 훅 불어왔다.
앞서 바위를 넘던 악어가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른들은 물속에 가라앉은 것들이 썩어 들어가 코를 찌른다고 난리다.
원래 토끼는 코를 실룩거리며 작은 풀잎 냄새도 다 맡는다고 배웠다.
하지만 나는 아무 냄새도 못 맡는다.
물에 잠긴 채 녹슬어가는 철탑 밑바닥에서 뭐가 문드러져도 모른다.
내 코로는 그냥 덥고 축축한 바람만 훅훅 들어올 뿐이다.
어차피 라일락 꽃잎 같은 건 이제 세상에 없다.
비 온 뒤 흙에서 피어오르던 싱그러운 풀냄새도 없다.
그런 건 옛날 책에나 나오는 먼 이야기다.
좋은 냄새가 싹 사라진 세상이라면,
고약한 냄새를 맡지 못하는 내 코가 차라리 제일 쓸모 있다.

앞서가던 악어가 턱을 삐죽이며 물었다.
"토끼야, 여기서 무슨 냄새 안 나?"
어깨에 걸린 배낭 끈과 허리의 줄을 질끈 고쳐 메었다.
"아무 냄새도 안 나."
"깨끗해."
"가자."




※ 정확히 70년 전, 제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80년 7월 6일의 실제 일기입니다.

1980년 7월 6일 일요일, 날씨 맑음
일어난 시각: 오전 5시 35분
잠자는 시각: 오후 9시 50분

제목: 이랑 만들기

점심 때는 들에 나가서 수수밭에 이랑을 만들었다. 
남들은 수수밭에 이랑이 없는데 우리는 왜 이랑을 만드는지 궁금해서 어머니께 여쭈어 보았더니 비가 오면 물이 잘 안 빠지기 때문에 물이 잘 빠지라고 만든다고 하셨다.

이랑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었기 때문에 40분쯤 하니까 다하고 말았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