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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의 글쓰기: 관찰하고, 저장하고, 완성한다
나는 쓸 글이 너무 많다. 가만히 있어도 머릿속에서는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풀려 나온다. 문제는 시간이 모자라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AI에게 구술한다. 조금 중복되거나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있어도, AI는 그것을 잘 정리해 말끔한 문장으로 되돌려 준다. 엔지니어가 복잡한 회로를 기능별로 나누듯, 나도 하나의 글감을 관찰·저장·정리·완성이라는 작은 모듈로 나누어 다룬다. 덕분에 글쓰기가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나의 글은 언제나 거창한 사유나 하얀 백지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길을 걷다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새 한 마리, 물가의 물고기, 길가에 핀 들꽃 한 송이에서 시작된다. 미술관에서 그림 한 점을 바라보다가 영감을 얻기도 하고, 아내가 정성껏 차려 준 밥상 위의 반찬 하나에서 글이 싹트기도 한다. 주말 텃밭의 작물들도, 책 속의 문장 하나도 각기 다른 이야기를 건넨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스마트폰이 내 손에 쥐여 있다. 언제든 사진을 찍을 준비를 하고 다닌다. 가족이나 지인과 동행할 때면 사진을 찍느라 자꾸 멈춰 서게 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 찰나의 사진 한 장, 무심코 누른 열 초짜리 동영상 하나가 곧 한 편의 글이 되기 때문이다. 보통은 20미터 거리도 가까이 다가가기 어렵고, 인적이 드문 곳이면 50미터 밖에서도 경계하며 날아오르는 게 왜가리다. 예컨대 오늘 탄천에서, 숨소리마저 삼키며 4미터 초근접 거리까지 다가가 담아낸 왜가리의 놀라운 비상처럼 말이다.
실제로 나에게는 제목이 정해진 글감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몇 해 이어 온 성경 통독에서도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평소 동물과 식물에 관심이 많은 탓에 성경에 등장하는 동식물을 모두 글로 풀어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동물과 식물 관련 글을 각각 매주 하나씩 써도 두 해 남짓 걸리는, 210여 개의 목록이 나를 기다린다.
여기에 꾸준히 찍어 종류별로 분류해 둔 천여 종의 꽃 사진 중 계절별로 묶어 낼 120편, 그리고 국민학교 6학년 때 쓴 일기를 지금의 시선으로 돌아보는 'Stanley의 유년 시절' 약 100편을 더하면, 지금 당장 제목이 정해진 글감만 430개에 이른다.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시키는 일도 아니다. 그저 내가 좋아서 벌여 놓은 일이라, 시간이 날 때마다 오늘은 어떤 글감을 꺼낼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로는 지인들과의 만남이 조금 줄었다. 친구들과의 시간도 좋지만, 이제는 혼자 앉아 하나의 글감을 다듬는 시간이 더 끌린다. 완성된 한 편이 블로그에 남고, 그때 찾아오는 성취감은 생각보다 크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면 일상은 지루할 틈이 없다. 왜 저런 모양일까 궁금해서 들여다보면 새로운 것을 알게 되고, 그 발견이 가슴에 오래 남는다. 그 소중한 배움을 흘려보내기 아까워 글로 남긴다.
아직 내 글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도 이 기록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언젠가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달콤한 기대를 품어 본다. 그러고 보면 글쓰기란 어린 시절 하루를 마무리하며 쓰던 그림일기와 별다르지 않다. 오늘도 카메라 앨범에 담아 온 선명한 조각들과 빛바랜 옛 기억을 꺼내어, 세상에서 가장 쉽고 재미있는 나만의 일기를 써 내려간다.
오늘 찍은 4m 초근접 왜가리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ruCCCkIxr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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