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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자라를 만난다 : 잘 안다는 것의 함정
오늘도 자라를 만난다 : 잘 안다는 것의 함정
1. 청둥오리, 쉬운 줄 알았는데
사진을 몇 번 보고 실물도 한두 번 봤다면 청둥오리 암수 구분은 어렵지 않다. 흰뺨검둥오리와의 차이도 금방 찾는다. 수컷의 특징은 이렇다. 햇빛을 받으면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짙은 청록색 머리, 머리와 가슴 사이의 선명한 흰 목테, 밤색 가슴, 흰 배, 노란 부리.
그런데 탄천에서 만난 일부 수컷들은 이 설명과 달랐다. 머리가 하얀 녀석도 있고, 가슴털이 밤색이 아니라 흰색인 녀석도 있다. 전체적으로 수컷의 특징은 보이는데 배가 희지 않고 온통 짙은 갈색인 녀석도 있다. 돌연변이 개체이거나 집오리와 섞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일반적인 것을 봤다고 그 지식이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다. 나는 대부분은 맞출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어렵다고 말하게 된다.
2. 혈액형이라는 상식
이런 일은 오리에게만 있지 않다. 사람 사이에서는 때로 비극이 된다.
AB형 부모에게서 O형 아이가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은 학교에서 배운 유전 법칙이다.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기면 부부 사이에 의심이 싹튼다. 하지만 시스-AB형처럼 일반적이지 않은 유전자를 가진 경우에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단편적인 지식만 믿고 아내를 의심하다가 가정이 무너진 사례가 알려져 있다. 반대로 정밀 검사를 해 보니 병원에서 신생아가 바뀐 의료 사고였던 경우도 있다. 반만 안다는 것은 위험하다.
세상 이치가 내 좁은 상식 안에 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쉽게 타인에게 돌을 던진다.
3. 성경의 난제
성경에도 보면 동일 사건을 다르게 기술한 사례가 다수 있다. 분명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린 것 같은데 왜 다른가? 동일한 내용이라도 저자에 따라, 또 저자가 어떤 의도로 기술했는지에 따라 다르게 쓸 수가 있기에 흑백논리로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리다고 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면 사무엘상 6장에는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았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대목이 있다. 개역개정은 그 수를 "오만 칠십 명"이라고 적는다. 그런데 사본에 따라서는 칠십 명으로 되어 있기도 한다. 작은 성읍에서 5만 명이 죽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필사 과정에서 숫자가 덧붙었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맞는가? 학자들도 확정 짓지 못한다. 하지만 일견 말이 안되는 것 같아 보이는 숫자이지만 그걸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필사한 것이 있기에 우리가 이것을 묵상하면 좀 더 진실을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많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지 않던가. 주변에는 전문가랍시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내가 최고"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반인에 비해 전문가인 것은 맞지만, 내 눈에는 진정한 전문가로 보이지 않는다. 진정한 전문가는 확실치 않은 것을 모른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4. 나의 은사님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전문가가 한 분 있다. 대학 시절 재료역학을 가르치신 노교수님이다. 그 당시 이미 은퇴를 앞두셨고, 당시 국내 재료역학 분야를 대표하는 학자셨다. 교재는 티모셴코의 영어 원서였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응용역학자 스티븐 티모셴코는 현대 응용역학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이 책은 전 세계 공대생이 보는 바이블이다.
그 책에는 장이 끝날 때마다 한두개의 예제 문제와 답이 있었는데 예제의 정답이 아무리 봐도 틀려 보였다.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교수님께 확인을 부탁드렸고, 당연히 그 자리에서 맞다 틀리다를 말씀해 주실 줄 알았다. 그런데 교수님은 바로 답하지 않으셨다. 잊을 만할 때쯤에야 답을 주셨는데, 그 답이 기가 막혔다.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 저자 쪽에 편지를 보내셨고, 회신도 받으셨는데 저자가 이미 돌아가셔서 답을 드릴 수 없다는 회신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티모셴코는 1972년에 세상을 떠났고, 내가 질문한 때는 1987년이다. 저자가 15년 전에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끝까지 확인하신 것이다. 제자의 사소한 질문을 흘려보내지 않고, 받은 답을 있는 그대로 전해 주신 분. 나는 그분을 진정한 학자라고 생각한다.
교수님은 은퇴 후에 장수하셔서 100세 가까이 사셨다. 돌봐 주시는 분과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고, 졸업하고 수십 년이 지났지만 장례식에도 갔다. 돌아가시기 한두 해 전에는 전주로 가서 뵙기로 했다가 건강이 나빠져 임박해서 취소되었다. 졸업 후 한 번도 뵙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만나 뵈면 그 책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 문제의 정답은 찾으셨는지도 여쭙고 싶었다. 이제는 영원히 확인할 길이 없다. 그 판본의 책이 아직 있다면 AI에게 물어보면 금방 답을 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냥 이대로 가슴속에 묻어 두려고 한다.
"어쩌면 그때 틀린 쪽은 책이 아니라 나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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