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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을 만나다 : 월하정인(月下情人) - 달마저 삼켜버린 사랑
〈월하정인(月下情人)〉은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에 실린 풍속화로, 달빛 아래 몰래 만나는 연인을 그린 작품입니다. 작품을 보면 깊은 밤 담 모퉁이에서 붉은색 초롱을 든 남자와 장옷을 쓴 여인이 마주 서 있습니다. 남자가 여인을 이끄는 듯하고, 여인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모습입니다. 둘 다 선남선녀입니다. 남자는 지금의 아이돌 못지않고, 여인의 모습도 장옷으로 가려져 있지만 초승달 모양의 눈썹과 오똑한 코, 앵두 같은 입술이 딱 봐도 미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헤어질 시간이 넘었지만 차마 헤어지기 아쉬운 듯 남정네의 발은 가야 할 곳으로 향하는데 눈길은 여성에게서 떼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여성도 차마 따라가지도 못하고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지만 발은 남정네를 따라가고 싶어서 그쪽을 향해 있습니다.남정네는 왼손으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어 주려고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뭘 주려는 걸까요? 아마도 사랑의 증표나 다음에 만날 때 필요한 물건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월침침 야삼경(月沈沈 夜三更)
양인심사 양인지(兩人心思 兩人知)
"달도 기운 깊은 밤 삼경, 두 사람 속은 두 사람만 알겠지"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멋진 시입니다. 두 사람 속은 당연히 두 사람만 알겠죠?
삼경은 밤 11시~새벽 1시 무렵입니다. 하늘에는 가는 달이 걸려 있고,
배경은 담장과 어둠뿐입니다. 은밀한 정을 절제된 표정으로 보여 줍니다.
그런데 잘 보면 달의 모양이 어딘가 이상합니다. 우리가 보통 보던 모양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평소 보는 초승달이나 그믐달에서는 나타나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달의 빛나는 면이 향하는 각도는 태양과 달, 그리고 지구가 빚어내는 엄정한 천문학적 법칙의 소산입니다. 서울의 위도 아래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밤하늘의 달은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위의 그림을 보면 달이 상당히 누워 있습니다. 초승달 기준으로는 가장 누워 있는 달이 봄인 3월경이고, 그믐달 기준으로는 가을인 9~10월입니다.
<월하정인>의 달 모양과 비교 시, 달의 모양 자체는 가을 음력 25일 무렵의 그믐달과 비슷하지만, 밝은 부분의 방향이 아래위가 뒤집혀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평상시 볼 수 없는 모양입니다. 화가가 이 달 모양을 몰라서 이렇게 그렸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야금모행〉만 보더라도 달의 모양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야금모행의 달 모양으로 계절과 날짜까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는데 달을 본대로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라면 음력 9월이나 10월 정도이고 날짜로는 음력 26~27일 정도입니다. 양력으로는 대략 10월말~12월중순 정도가 됩니다. 그럼 이런 달 모양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보름 무렵에 일어나는 월식이라면 이런 모양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럼 진짜 월식이 일어난 걸까요? 놀랍게도 신윤복이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월식 기록이 존재하며, 천체 현상을 시뮬레이션해 보면 그림 속 달과 유사한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중 유력한 후보가 2개 있습니다. 첫째는 1784년 8월 30일입니다. 이 때는 부분 월식인데 서울 기상 기록상 3일 연속 비가 내려 실제 관측 가능성이 매우 낮습니다. 관측을 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실제 관측했다고 기록한 날은 1793년 8월 21일 밤에 일어난 부분월식입니다.
조선 시대 기록을 보면 1793년(정조 17년) 음력 7월 15일(양력 8월 21일)의 월식이 조선시대 매일의 국정 상황과 천문 현상을 상세히 기록해 둔 《승정원일기》에 실제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 내용: 《승정원일기》 제1719책에는 "7월 병오(15일) 밤 2경에서 4경까지 월식이 있었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3경(오후 11시~오전 1시)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기상 상황과 의의: 이날 서울 지역은 오후에 비가 그치면서 날씨가 개어, 밤하늘에 떠오른 보름달이 지구 그림자에 가려지는 부분월식 현상을 실제로 또렷하게 관측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승정원일기 기록과 천문학적 분석이 맞물려, 신윤복이 이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고 〈월하정인〉 화폭에 담아냈다는 주장이 큰 설득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때 신윤복의 나이는 35세였습니다.
그림 속 두 남녀가 밀회를 즐긴 날은 달이 밥그릇처럼 비스듬히 기울어진 초승달이나 그믐달이 아니라, 세상을 대낮처럼 폭로하는 만월의 보름달이었습니다. 천문 기록을 통해 당시의 풍경을 정확한 날짜와 시간까지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통행금지의 울타리 속에서 숨어들어야 할 연인들의 머리 위로 이토록 둥글고 환한 보름달이 떠 있던 날, 하늘은 도리어 월식을 통해 이들 연인을 위해 잠시 어둠을 만들어 준 것이 아닐까요?
그럼 이번에는 이와 대비되는 서양화 한 점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소개할 작품은 로코코 미술의 거장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사랑의 진행: 만남》이라는 작품입니다. 남들 보는 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연인이 이른 저녁 또는 밤이지만 보름달이 밝은 구름 아래서 비쳐주고 있어 혹시나 남들이 볼까 전전긍긍하며 만나고 있는 장면으로 보입니다. 달은 보이지 않지만 밝은 구름 속에 달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여성을 보면 눈은 혹시나 누가 볼까 여기저기 살피고 있지만, 손은 연인에게 어서 잡아 달라는 듯이 뻗고 있습니다. 남성은 그런 여성을 어서 만나려고 겉옷을 벗어 버린채 막 담을 넘고 있습니다.
연인들 위에서는 비너스로 보이는 나체의 여인 조각과 사랑의 신 큐피드가 이들 연인을 내려다 보는 듯한 묘한 느낌을 줍니다. 이들이 만나서 어떤 일을 할지 암시해 주는 것 같습니다. 《월하정인》이 만남의 끝자락에서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절제된 감정을 보여준다면, 프라고나르의 그림은 담을 넘는 남자의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금지된 사랑의 긴장감을 훨씬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들 남녀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금지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저는 여기서 문득 스페인 테루엘의 전설, 디에고와 이사벨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두 연인이 겪었던 절망의 시간을 헤아려 보면, 〈월하정인〉에 걸린 그 달,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달의 의미가 한층 깊게 다가옵니다.
가난한 청년 디에고는 이사벨 부모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두 사람은 월하정인의 남녀처럼 몰래 만나며 사랑을 키워 갔지만, 부자가 되지 않고서는 결혼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디에고는 큰 결심을 하고 5년의 시간을 청했습니다. 그동안 부자가 되어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길을 떠났습니다. 전장을 누빈 끝에 정말로 큰 부를 쌓았지만, 그가 돌아온 날 이사벨은 이미 결혼식을 막 마친 상태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버렸습니다.
디에고는 신방에 몰래 들어가 마지막 입맞춤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남의 부인이 된 이사벨은 그 청을 거절했고, 디에고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장례식장 관 앞에서 자신의 거절을 뒤늦게 후회하던 이사벨은 끝내 그의 곁에서 숨을 거둡니다. 사랑이 끝나고 매몰찬 거절이 지나간 뒤에야, 두 사람의 인연은 죽음을 넘어 영원으로 이어지는 매듭이 되었습니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사랑의 진행: 만남》처럼,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만남은 언제나 거절과 절망의 벼랑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피어납니다.
결국 신윤복이 그려낸 그날 밤의 달은 희귀하지만 천문의 순리에 따른 현상이었습니다. 엄혹한 규율과 통금이 지배하는 조선의 한복판에서, 혹은 테루엘의 차가운 관 앞에서, 오직 사랑이라는 불가능한 도박을 감행한 연인들을 향해 화가와 신이 일부러 하늘의 달을 가려 그들의 사랑을 더 절절하게 만들어 준 것은 아닐까요?
보름달의 대부분이 지구 그림자에 가려지고 밝은 부분만 가느다랗게 남은 순간, 두 연인은 잠시 어둠을 틈타 서로에게 더욱 집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둠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달은 다시 밝아지고, 비밀은 언젠가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그 짧은 어둠을 향해 기꺼이 발걸음을 내디딘 두 사람. 어쩌면 《월하정인》의 달이 오래도록 우리 마음에 남는 것은, 그 달이 단순히 희귀한 천문 현상이어서가 아니라 밝아질 것을 알면서도 어둠 속으로 들어간 두 사람의 마음을 비추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





월식날의 두 연인 만남. 극적입니다.
답글삭제디에고의 사랑 얘기 기슴 아파요
테루엘의 연인 얘기 참 가슴 아프죠. 조만간 테루엘에 가서 직접 본 얘기 올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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