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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일, 날씨 맑음
오늘도 점심을 후딱 먹고 여느 때처럼 탄천에 자라를 보러 갔다. 다리 위에서 맑은 물속을 유유히 누비는 생전처음 보는 무늬가 없는 가물치가 신기해서 최대한 줌을 당겨 렌즈에 담고 있는데, 근처에 있던 왜가리 한 마리가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낮게 날아 오르더니 저만치 날아간다. 내가 너무 가까이 서 있어 위협을 느낀 모양이다.
녀석이 사뿐히 내려앉은 곳은 다름 아니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냥감을 노리던 순백의 중대백로 바로 코앞이다.
처음에는 둘 사이에 팽팽하고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명당을 차지하고 있던 중대백로는 상황 파악이 덜 된 것인지, 아니면 자리 욕심에 짐짓 모른 척하는 것인지 미동도 없이 버틴다. 그러자 왜가리가 목을 꼿꼿이 세우며 특유의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듯 노골적인 눈치를 준다.
'어이, 좋은 말로 할 때 저리 가시지.'
그 서슬 퍼런 무언의 압박에 기가 질린 중대백로는 그제야 꼬리를 내린다. '알았어, 가면 될 거 아냐…' 투덜거리듯 마지못해 날개를 반쯤 펴고 총총걸음으로 자리를 비켜선다. 다툼이나 요란한 날갯짓의 충돌은 없었지만, 서열과 기세가 만들어낸 심리전 한 판으로 왜가리는 가장 좋은 낚시 포인트를 손쉽게 독차지한다.
자리를 빼앗긴 중대백로의 쭈뼛거리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지만, 탄천의 물길을 조금만 넓게 바라보면 그 수면 위아래로 뚜렷한 계급과 권력의 사슬이 드러난다.
내 눈에 비친 탄천 서열의 최정점에는 단연 민물가마우지가 군림한다. 지상과 물속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탁월한 잠수 실력도 위협적이지만, 진짜 무서운 것은 무리의 힘이다.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동네를 주름잡는 골목대장처럼, 수십 마리가 편대를 지어 물속을 휘젓고 물고기를 싹쓸이할 때면 하천 전체가 숨을 죽인다.
내가 바라본 탄천의 서열에서, 그 가마우지 떼 바로 아래가 왜가리다. 왜가리는 키가 크고 날개폭이 넓어 우뚝 서 있어도 위풍당당하지만, 혼자 움직이는 고독한 사냥꾼이다. 제 힘만으로는 떼 지어 몰려다니는 가마우지를 감당할 수 없기에, 왜가리는 자존심을 구기지 않는 선에서 아예 가마우지 무리 곁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커다란 풍채를 앞세워 일대일의 자리싸움에서 다른 새들을 가볍게 제압하며 여울목의 독점자로 남는다.
그 왜가리의 그림자에 밀려난 존재가 바로 3위인 중대백로다. 길쭉하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지만 체구와 기세에서 왜가리를 넘어서기는 어렵다. 가마우지 떼에 치이고 왜가리에게 쫓겨난 중대백로는 그 억울함과 울분을 어디에 풀까. 기가 막히게도 그 화풀이는 고스란히 서열 4위인 쇠백로를 향한다. 얕은 여울에서 부지런히 발을 놀리며 먹이를 찾던 작은 쇠백로는, 덩치 큰 중대백로가 날아와 텃세를 부릴 때마다 자리를 뺏기고 가장자리로 쫓겨난다. 저 위쪽의 가마우지나 왜가리보다, 제 바로 위에서 분풀이를 일삼는 같은 가문의 중대백로야말로 쇠백로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얄밉고 원망스러운 존재다.
이토록 치열한 탄천 새들의 4단계 서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묘한 생태적 아이러니가 겹쳐진다.
사실 왜가리와 백로류에는 봄에 찾아와 번식하고 찬 바람이 불면 남쪽으로 떠나던 여름철새가 많았고, 민물가마우지는 북쪽에서 날아와 겨울을 나던 대표적인 겨울철새였다. 하지만 기후 변화와 함께 겨울에도 얼지 않는 도심 하천이 늘고 풍부한 먹잇감이 이어지면서, 굳이 먼 거리를 이동할 이유가 희미해졌다. 떠나야 할 계절에도 떠나지 않고 눌러앉아 살아가는 개체가 늘면서, 각기 다른 계절의 나그네였던 철새들이 이 땅의 텃새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내륙 하천 곳곳에 번식 집단을 형성하며 자리 잡은 가마우지의 변화는 가장 극적이다. 엄청난 잠수 실력과 먹성으로 물고기의 씨를 말리고, 많은 배설물이 쉼터와 숲에 쌓이면서 강변의 나무들이 하얗게 뒤덮여 결국 말라 죽는 피해까지 낳았다. 마침내 환경부는 민물가마우지를 유해야생동물로 지정했고, 피해 지역에서는 공포탄 등을 이용한 퇴치와 포획 허가를 통해 개체 수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떠돌던 이들이 머물러 앉고, 머물러 앉은 좁은 자리에서는 필연적으로 날카로운 경계와 텃세가 싹튼다. 떼거리의 위세에 밀린 왜가리가 고독하게 중대백로를 눈빛으로 밀어내고, 밀려난 중대백로는 더 작은 쇠백로의 등을 거칠게 떠민다.
철새가 텃새가 되고, 텃새가 되어 텃세를 부리던 끝에 맨 위의 가마우지는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되어 내몰리는 풍경. 인간이 바꾸어 놓은 환경의 틈바구니에서 본래의 계절 감각을 잃고 얽혀버린 새들의 텃세 사슬은, 버티던 백로를 쏘아보며 끝내 밀어내는 왜가리의 서늘한 눈빛 속에 씁쓸하고 묵직한 잔상을 남긴다.
인간 세상이나 동물 세상이나 서열 속에 살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문득 탄천의 물길에서 시선을 돌려, 회사와 가정 속 나의 자리는 어디쯤인지 되돌아본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꽤 높은 계단 위에 올라서 있는 것 같다가도, 위를 보면 아직 몇 계단이나 더 남아 있다. 위로는 치이고 아래로는 떠밀어야 하는 저 중대백로의 낀 처지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관련 영상 1:
관련 영상 2:
오늘의 탄천 영어 노트
Migratory bird: 철새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새)
Resident bird: 텃새 (한곳에 사계절 내내 머무는 새)
Territorial behavior: 텃세, 영역 행동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행동)
생태 용어인 Resident bird의 Resident는 주민, 거주자처럼 한자리에 온전히 머물러 정착했다는 의미다.
반면 조류의 종류인 텃새와 발음이 비슷한 우리말 텃세는 '터'와 기세의 '세(勢)'가 합쳐져, 먼저 자리 잡은 쪽이 자기 영역을 지키며 우위를 내세우는 행동을 뜻한다.
이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은 영토나 구역을 뜻하는 Territory에서 파생된 Territorial behavior 또는 Territoriality다.
철새가 텃새가 되어 이제는 영역까지 지키려 든다는 탄천의 아이러니를 영어로는 A migrant turned resident, now acting territorial처럼 명확하게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한마디 영어 표현: 철새의 정착과 텃세
Thanks to ice-free city streams and plentiful food, these migratory birds have become year-round residents.
(얼지 않는 도심 하천과 풍부한 먹이 덕분에 이 철새들은 사계절 텃새가 되었다.)
The grey heron acted territorial, staring down the egret to take the best fishing spot.
(왜가리는 텃세를 부리며 눈빛으로 백로를 밀어내고 가장 좋은 낚시 명당을 차지했다.)
Once a seasonal visitor, the cormorant is now fiercely claiming its turf along the stream.
(한때 계절 나그네였던 가마우지가 이제는 하천 곳곳을 제 영역으로 삼고 맹렬하게 텃세를 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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