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야기 : 불타는 6월과 잠자는 아리아드네, 당신의 선택은?

그림이야기 : 탄천에서 마주한 하종현의 접합(Conjunction)

그림이야기 : 탄천에서 마주한 하종현의 접합(Conjunction)


[하종현 화백 - Conjunction 시리즈]

하종현(河鍾賢) 화백은 한국 단색화를 세계적 반열에 올려놓은 대표적인 거장입니다. 1959년 홍익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1969년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창립을 주도하며 전통적인 회화의 틀을 깨는 실험 미술의 선봉에 섰습니다. 이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장과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을 역임하며 교육자이자 행정가로서도 굵직한 자취를 남겼습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마대와 배압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습니다. 1970년대, 그는 전통적인 캔버스 대신 구호물자를 담아 나르던 거친 마대자루에 주목했습니다. 캔버스 앞면에 붓으로 형상을 얹는 오랜 고정관념을 전복시킨 것입니다. 마대 뒷면에 두텁게 물감을 얹은 뒤 주걱이나 칼로 밀어내어, 올이 성긴 틈 사이로 물감이 배어 나오게 하는 기법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작업은 평면적인 그림이라기보다 때로는 조각을 연상시킵니다. 마대 뒷면에서 밀어낸 물감이 성긴 틈을 통과해 앞면에 모습을 드러내고, 작가는 도구를 이용해 그 흔적을 조정하며 화면을 만들어 갑니다. 물론 그 경계를 따지는 일이 현대회화에서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처럼 독창적인 기법을 묵묵히 밀어붙여 일가를 이룬 대가의 궤적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는 1974년부터 《접합(Conjunction)》 연작을 전개했으며, 이후 《Post-Conjunction》으로 작업의 지평을 넓혀 왔습니다. 마포와 물감, 그리고 이를 밀어내고 다듬는 신체의 물리적 행위가 만나 하나의 화면을 이루는 과정은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본질입니다.

다리 위에서 무심코 내려다본 탄천의 수면은 겉보기엔 그저 맑고 잔잔한 하나의 평면처럼 보였습니다.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 그 표면 위에 어른거리는 하늘과 다리의 그림자. 하지만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수면 아래로 깊숙이 내려놓는 순간, 겉으로 드러난 평면 뒤에 숨겨진 입체적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찰나, 회사 회의실 벽면에 걸려 있던 하종현 화백의 《Conjunction 22-60》이 머릿속에 겹쳐졌습니다.

하 화백의 작업은 앞면의 붓질에만 의존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뒷면의 압력으로 표면을 완성합니다. 뒷면에서 가해진 힘이 마포의 성긴 틈을 통과해 앞면에 물감의 흔적으로 드러나고, 뒤에서 밀어내는 힘과 마포의 억센 결이 만나는 자리에서 비로소 화면이 탄생합니다.

탄천의 물속 풍경을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자연 또한 바로 이 배압법처럼 스스로의 화면을 빚어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리 위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수면이라는 표면일 뿐이지만, 시선을 물속으로 옮기면 그 잔잔한 표면 아래에 모래와 물고기들이 층층이 어우러진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가장 깊은 바닥에는 물살에 실려 온 자잘한 모래가 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위에 몸을 납작 엎드린 모래무지들은 바닥의 거친 결과 어우러져 그곳만의 보이지 않는 질서를 형성합니다. 그 위, 맑은 물이 흐르는 중간 층위에서는 은빛 피라미들이 쉼 없는 지느러미질로 물살의 저항을 이겨내며 적당한 간격을 맞춘 채 떠 있습니다.

만약 탄천의 물속이 하종현 화백의 거친 마포라면, 그 안에 자리 잡은 모래와 모래무지, 그리고 유영하는 피라미들은 마포의 틈 사이로 드러난 물감의 흔적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햇빛이 모래바닥에 새겨 놓은 굴곡과 물고기들의 짙은 흔적이 어우러져, 탄천은 스스로 하나의 추상화를 그려 내고 있었습니다.

하 화백의 작품에서 마포와 물감, 그리고 이를 밀어내고 다듬는 행위가 하나의 화면을 이루듯, 탄천에서도 모래와 물고기들이 저마다의 높이에서 만나 조용한 생명의 접합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제 회의실에서 《접합》 앞에 설 때마다, 나는 그 두터운 물감 덩어리 너머에서 물살에 정면으로 맞서며 모래 위에 납작 엎드려 있던 탄천의 모래무지와 그 위를 유영하던 피라미들을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하종현 화백의 작품]

[하종현 화백의 작품]


[하종현 화백의 작품]
[단색화를 닮은 탄천의 물고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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