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야기 : 불타는 6월과 잠자는 아리아드네, 당신의 선택은?

그림 이야기 :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의 그 밤은 언제였을까?

그림 이야기 :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의 그 밤은 언제였을까?


[빈센트 반 고흐 - 별이 빛나는 밤]


[초승달 문양이 들어간 16개국의 국기]

우리가 밤하늘에 떠 있는 눈썹달을 마주할 때,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단연 '초승달'이다. 저녁놀이 사그라드는 서쪽 하늘, 어둠이 밀려오기 직전 살짝 고개를 내민 그 가느다란 달은 늘 새로운 시작과 설렘을 상징한다.

하지만 인류가 사랑해 온 그 매혹적인 눈썹달의 정체에 대해 천문학적 진실을 파헤쳐 보면 묘한 반전이 숨어 있다. 이슬람의 상징인 튀르키예 국기에 새겨진 달도, 빈센트 반 고흐가 새벽녘의 캔버스에 담아낸 <별이 빛나는 밤> 속 그 달도, 알고 보면 초승달이 아니라 해 뜨기 직전 가장 어두운 새벽에 뜨는 '그믐달'에 가깝다. 투르크메니스탄 국기의 달만 초승달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애초에 초승달은 해가 진 직후 서쪽 하늘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달이기에, 새벽녘에는 물리적으로 결코 볼 수가 없다. 새벽에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마주하는 눈썹달은 생명이 저물어가는 소멸의 달, 즉 그믐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학적 엄밀함과 예술적 허용, 그리고 인간의 시각적 착시가 빚어낸 이 흥미로운 아이러니의 전말을 풀어보려 한다.

1. 이슬람 국가들의 국기에 왜 초승달 대신 그믐달을 택했는가?

튀르키예(오스만 제국의 직계 후예)의 국기를 보면 붉은 바탕에 하얀 초승달과 별이 그려져 있다. 상징학적으로 이들은 이를 새로운 시작과 이슬람의 번영으로 해석하지만, 천문학적인 관점에서 그 형태를 살펴보면 저녁의 초승달보다는 새벽의 그믐달을 연상시킨다. 왜 그들은 하필 저녁의 초승달을 두고 새벽의 그믐달처럼 보이는 형태를 택했을까? 나는 여기에 세 가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첫째, 디자인의 완성과 시각적 균형

국기의 모서리에 요소를 배치할 때, 공간적 안정감과 여백의 미를 살리려면 현재의 그믐달 형태가 훨씬 세련되고 균형 잡힌 조형미를 선사한다. 만약 천문학적 진실만을 고집해 진짜 초승달 모양을 정직하게 넣었다면 시각적으로 뭔가 어색하고 불안정한 구도가 되었을 것이다. 대중에게 각인되는 상징은 과학적 팩트보다 직관적인 아름다움이 먼저 작동하기 때문이다.

둘째, 새벽의 짙은 어둠 속, 해 뜨기 직전의 희망

저녁놀과 함께 서쪽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초승달은 왠지 아쉽고 쓸쓸한 작별의 느낌을 준다. 하지만 해 뜨기 직전, 가장 어두운 새벽 동쪽 하늘에 희미하게 걸린 그믐달은 곧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는 강렬한 예고이자 새로운 시작을 향한 묵직한 희망을 품고 있다. '끝'을 의미하는 그믐의 형태가 오히려 '새로운 아침'의 전령이 되는 역설적 상징성이다.

셋째, 대중의 무관심과 '우리가 아는 초승달'의 착시

사실 세상 그 누가 밤하늘에 뜬 달을 보며 초승달인지 그믐달인지 정밀하게 각도를 재고 있겠는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반달에서 조금 더 줄어든 그 곡선의 형태 자체가 '초승달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 형태가 주는 시각적 기호만 소비할 뿐 천문학적 진실에는 크게 관심이 없기에, 디자인적 매력과 새벽의 정서만 충족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대중적 허점 속에서 이 상징은 고유의 생명력을 얻었다.

2.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의 그 밤은 언제였을까?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은 수많은 이들의 영혼을 흔들어놓은 명작이다. 하지만 이 찬란한 소용돌이 속에서 화가가 마주했던 '그 밤'이 언제였는지를 두고는 오랜 세월 동안 미술사와 천문학계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져 왔다. 후대의 연구자들이 남겨놓은 파편적인 기록과 최첨단 시뮬레이션 사이에서, 과연 우리는 빈센트가 붓을 든 그 찰나의 진실에 얼마나 다가가 있을까?

인터넷과 대중적인 미술 역사 커뮤니티에서는 이 위대한 작품의 탄생 시기를 두고 몇 가지 가설이 정설처럼 떠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전통적인 미술사학계가 주장하는 1889년 6월 18일경이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의 수발신 흐름과 요양원 입소 후의 제작 주기를 역추적하여 얻어낸 잠정적 결론이다. 반면, 화폭에 담긴 천문 현상에 주목한 천문학 평론가들은 7월 22일경이 진짜 제작 시기라고 맞선다.

그러나 이 대중적인 가설들은 저마다 치명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전통적인 6월 중순설을 살펴보면 편지 묶음의 순서 맞추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실제 하늘의 천문 데이터와 화폭 속 구도가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6월 18일은 음력 20일로 보름보다 약간 일그러진 달이기에 달 모양이 전혀 맞지 않는다.  반대로 7월 22일설은 음력 25일로 달의 모양은 비슷하나 천문학적 수치의 완벽성에만 매몰된 나머지, 고흐의 요양원 내 생활 기록이나 편지 기록상 고흐의 편지 내용과 배치된다. 특히 아래 편지가 작성될 무렵, 고흐는 이미 이 별이 빛나는 밤의 습작을 완성해 두고 있었다. 6월 18일이나 7월 22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문헌적 추정에만 갇히거나 천문 계산값에만 눈이 멀어, 예술가의 숨결과 물리적 현실 사이의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1889년 6월 18일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 번호 782의 내용이다. (이 편지는 동생 테오가 6월 16일에 보낸 편지에 대한 답변이기에 빈센트가 편지를 받자마자 답장을 썼다고 하면 6월 18일 정도가 적정하다고 할 수 있다.)

"마침내 나는 올리브 나무가 있는 풍경화 한 점과, 별이 빛나는 하늘에 대한 새로운 습작 한 점을 갖게 되었다. 비록 고갱이나 베르나르의 가장 최근 캔버스들을 보지 못했으나, 내가 이야기한 이 두 점의 습작이 그들과 감정적으로 일치할 것이라고 나는 꽤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기존 학계의 추정과 천문학자들의 주장의 맹점을 넘어, 나는 모순되지 않으면서도 이 작품에 부합하는 날짜를 추정해 본다. 작품에서 달의 모양으로 보면 음력 25일 정도로 보인다. 그리고 달의 각도와 달과 금성의 거리나 각도 등을 비교해 보면 아래 3가지 날짜, 즉 5월 24일, 6월 23일, 7월 22일 중에 종합적으로 5월 24일이 가장 근사함을 알 수 있다. 천문학자들이 주장한 7월 22일은 달과 금성의 각도도 너무 가파르고 거리도 너무 가깝다. 7월 22일 기준이면 또한 달 자체의 기울어진 각도도 실제 작품에 비해 너무 누워 있다. 고흐가 관찰한 그 별이 빛나는 밤은 바로 1889년 5월 24일 새벽이라는 시점으로 볼 수 있다. 시간도 새벽 3시 반으로 가정해 본다. 


[1889년 5월에서 7월까지의 음력 25일 달과 금성 위치 비교]

이 날짜가 지니는 설득력은 우선 시간적 맥락의 자연스러움에 있다. 고흐가 생레미의  생폴 드 모졸 요양원에 입소한 것이 1889년 5월 8일이므로, 낯선 환경에 적응하며 내면의 격렬한 흔들림을 캔버스에 쏟아내기 시작한 시기는 6월이나 7월이 아니라 5월 중하순부터가 훨씬 자연스럽다. 더욱이 천문학적으로도 이 가설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림 속 금성으로 추정되는 사이프러스 바로 우측의 밝은 점과 달의 위치를 보면 월출 후 약 1~2시간 사이로 보인다. 그러면 좀 더 정확성을 갖고 가정해 본다면 음력은 같은 날짜라도 그때그때 약간씩 크기가 다르기에 음력 24일, 25일, 26일 즉 양력으로는 5월 23일, 24일, 25일을 각각 살펴보자. 


[1889년 5월 23, 24, 25일,  음력 24, 25, 26일 달과 금성 위치 비교]

5월 23일의 경우는 월출 후 1시간이 아닌 1시간 반 시각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월출 후 1시간에는 금성이 아직 수평선 위로 충분히 떠오르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는 금성과 달의 각도가 화폭의 구도와 조금 어긋나며, 달의 모양 역시 실제 작품보다 너무 통통해 보인다. 반면 5월 24일을 살펴보면 금성과 달의 상대적 각도가 작품과 정확히 일치하며 달의 위상 또한 거의 흡사하다. 다만 월출 직후인 1시간 시점에는 금성이 수평선에 너무 붙어 있어, 실제 구도와 부합하는 정밀한 시각은 월출 후 1시간 10분이 지난 무렵이 된다. 이에 비해 5월 25일은 달과 금성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고 달의 모양도 너무 가늘어진다. 따라서 화폭 속 상황과 가장 밀접한 날짜를 순서대로 꼽는다면 5월 24일(음력 25일), 5월 23일(음력 24일), 5월 25일(음력 26일)의 순이 된다.

만약 5월 24일 새벽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날 월출 시각은 오전 2시 21분이었다. 만약 월출 후 2시간이 지난 시점이라면 오전 4시 21분이 되는데, 당일 일출 시각이 오전 4시 25분경(서머타임 미적용 기준)이므로 이 시간대라면 이미 하늘이 밝아와 그림 속과 같은 깊은 밤의 정취를 마주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1889년 5월 24일, 월출 후 1시간 조금 지난 새벽 3시 30분이야말로 고흐가 마주했던 가장 유력한 시각이다. 이날 생레미의 동쪽 하늘을 시뮬레이션해 보면 금성과 달의 배치뿐만 아니라, 새벽 동쪽 하늘에서 왼쪽이 볼록하게 찬 그믐 무렵의 달 모양이 상당히 일치한다.

흥미롭게도 이탈리아 국립천체물리학연구소(INAF) 소속의 에드비제 코르벨리(Edvige Corbelli) 연구원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5월 23일에 그림을 구상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루 전인 5월 23일은 달이 조금 더 통통하고 26분 정도 일찍 뜬다는 점을 제외하면 24일과 큰 차이가 없어 이 역시 배제할 수 없는 가설이다. 하지만 달의 형태적 완성도와 금성의 위치를 종합할 때 양력으로는 5월 24일이 더 유력해 보인다. 

반면, 프랑스의 천체물리학자 장피에르 뤼미네는 1995년 천문 소프트웨어를 통해 생폴 드 모졸 요양원의 창밖 동쪽 하늘을 계산한 뒤, 1889년 5월 25일 오전 4시 40분에 그림과 부합하는 배치가 나타난다고 발표했다. 그는 고흐가 불면증 속에서 철창 너머 이 하늘을 보고 실제 관측과 기억, 상상을 결합해 그려냈다고 보았다. (관련 기사: blogs.futura-sciences) 국내 언론에서도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 역시 이와 유사하게 5월 25일 새벽 5시 무렵의 하늘로 추정하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관련 기사: ent.sbs.co)

그러나 이 5월 25일설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존재한다. 당일 일출 시각이 오전 4시 25분경임에도 그들이 제시한 시각은 모두 해가 뜬 이후(오전 4시 40분, 오전 5시)이기 때문이다. 이미 사방이 훤하게 밝아오는 낮에 별빛이 초롱초롱 빛날 리 만만치 않으니, 이를 '밤'의 풍경이라 부르기엔 어폐가 있다. 현대의 유럽에서 주로 사용하는 서머타임을 대입해 맞춘 결과라 말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후대 학자들이 편지 소인 몇 장이나 단순한 계산값에 의존해 꿰맞춘 작위적인 가설들은 진짜 예술의 진실을 담아내지 못한다. 생레미 요양원의 차가운 철창 너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생명력으로 빛나던 새벽 3시 30분, 내가 추정한 그 밤의 하늘은 바로 1889년 5월 24일 새벽이었으며, 빈센트가 마주한 달빛은 환각이 아니라 차가운 공기 속에서 빛나던 고독하고도 찬란한 그믐달, 정확히는 음력 25일 무렵의 진실된 우주였다.

그리고 고흐는 말년에 이르러 밤하늘과 천문 현상들을 대단히 정밀하고 사실적으로 관찰하여 화폭에 담아냈다. 에드비제 코르벨리 연구원의 논문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그의 작품 속에는 1889년의 월식이나 1890년 수성과 금성의 근접 현상, 그리고 달과 행성들의 정교한 위치 관계가 경이로울 정도로 녹아들어 있다. 그러므로 고흐의 작품을 해석할 때는 기본적으로 고흐가 실제 하늘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그 모습을 사실에 근거해 그렸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바른 방법일 것이다.

참고 논문 링크: 에드비제 코르벨리(Edvige Corbelli) 연구원 논문 원문 (INAF)

3. 크루아상은 과연 초승달일까?

오븐에서 노릇하게 구워져 나온 크루아상의 곡선 형태는 밤하늘에 떠 있는 눈썹달의 모양을 그대로 닮아 있다. 그런데 이 크루아상은 초승달을 의미하는 걸까 아니면 그믐달을 의미하는 걸까? 
오스만 제국이 국기에 넣었던 달은 앞서 살펴본 대로 새벽의 그믐달을 연상시키는 형태다. 그렇다면 오스만 군대의 상징을 베어 물며 승리를 자축했다는 전설 속 크루아상의 원형 역시, 초승달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믐달이었던 셈이 된다.
결국 밤하늘의 달이 과학적 진실(그믐달)을 감춘 채 대중의 로망(초승달)으로 소비되듯, 크루아상 역시 전쟁의 상징에서 출발했다는 전설을 품고 있으나 오늘날 우리에게는 가장 달콤한 아침의 판타지로 소비되고 있다. 가장 어두운 새벽을 깨우기 위해 동쪽 하늘에 걸리는 그믐달이든, 저녁놀 속에서 보이는 초승달이든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늘 달의 곡선에서 저마다의 희망과 이야기를 읽어내며 살아왔으니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