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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2037 #발렌시아 #발렌시아의인장 #1권 #빈첸시오 #팔
PROJECT 2037 1권 : 발렌시아의 인장
4-5장 성 빈첸시오의 팔:
유리관 안의 조도는 낮았다. 세바스티안은 그 앞에서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도, 몸통도 없이 팔 하나만이 그곳에 있었다. 어깨가 잘린 단면부터 손목까지, 청동보다 더 어두운 빛깔로 굳어버린
살과 뼈. 1,700년이라는 시간은 보통 뼈를 가루로 되돌리는 시간이지만, 이 팔만은 예외였다. 부패가 그를 비껴간 것이 아니라, 그가 부패를 거부한 것처럼 보였다. 손가락은 마지막까지 무언가를
놓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지금도 살짝 구부러져 있었다.
몸통은 사라지고 팔 하나만 남은 성인, 빈첸시오.
세바스티안은 대성당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마에야와 고야가 그린 보르하의 일생을 응시하다, 다시 그 제단 유리관 속의 팔로 시선을 옮겼다. 지독한 역설이 그를
압도했다. 보르하를 회심시켰던 이사벨 황후의 잘난 육체는 불과 며칠 만에 썩어 흙으로 돌아갔으나, 1,700년 전 순교한 빈첸시오의 팔은 머리조차 없이도 썩지 않은 채 이 침묵 속을 지키고 있었다. 몸통이 찢기고 목이 잘려나가는 순간까지도 신앙이든, 마지막 기도든, 혹은 마지막 숨이든 무언가를 끝까지 붙들고 있었을 팔. 그리고 그
붙듦의 자세 그대로, 시간의 부패마저 거부해낸 굳건함이었다.
“이사벨 황후는 부패를 통해 죽음을 말했지만, 성 빈첸시오의 팔은 침묵을 통해 영원을 말하고 있구나.”
[발렌시아
대성당 – 성 빈첸시오의 팔]
그때, 세바스티안의 눈앞에 얼마 전 발렌시아 신문에 나온 그림이 겹쳐
떠올랐다. 알라메다 산책로 한복판, 14톤의 청동으로 앉아
책을 읽던 리포예스의 거인상. 하늘을 향해 안테나처럼 뻗어 있던 그 기괴한 팔들 중 하나가 지중해의
강풍을 견디지 못하고 통째로 꺾여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모습이었다. 부러진 손의 위치나 모습까지 성 빈첸시오의 팔과 너무나 흡사해서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며칠 뒤 현장에 가서 직접 보았을 때는 그 손은 사라지고 없었다.
언론은 노후한 접합부와 돌풍으로 인한 단순 사고라 썼지만, 세바스티안에게
그 기사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했다. 거인은 책을 펼친 채 사유하는 자세로 수십 년을 버텼지만, 그 거창한 생각은 스스로를 지켜주지 못했다. 사유는 비대해질수록
무거워졌고, 무거워질수록 그 무게를 감당할 팔은 가늘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팔을 지성의 상징이라 불렀지만, 그 팔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붙잡아 본 적이 없었다. 허공을 향해 장식되어 있던 그 팔은 바람이라는 하찮은 힘 앞에서 무너졌다. 부러지기
전부터 이미 죽어 있었던 것이다.
사유하는 거인의 팔은 부러졌고, 끝까지 붙든 순교자의 팔은 견뎌냈다.
[발렌시아
알라메다 거리의 부러진 거인의 팔]
사유만으로는 팔을 지킬 수 없었다. 행동을 잃은 사유는 바람 앞에서도
무너졌다. 인간의 육체는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릇이 되기도 하고 껍데기가 되기도 한다. 허영을 담으면 썩고, 진실을 담으면 시간을 견딘다.
세바스티안은 유리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차가운 표면 너머로 구부러진
성인의 손가락 실루엣이 흐릿하게 비쳤다.
"머리가 없어도 붙들 수 있다면.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 손 하나만으로도 진실은 살아남을 수 있다면."
2037년이라는 숫자가 머릿속에서 처음으로 또렷한 형태를 갖췄다. 사유로 무장한 문명이 스스로의 무게에 짓눌려 팔을 잃어가는 동안, 어딘가에는
반드시 성 빈첸시오처럼 침묵 속에서 끝까지 놓지 않는 손이 있어야 한다는 확신. 거인의 부러진 팔은 알라메다의
잔해 속에서 치워지겠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파수꾼의 뼈를
찾으러 온 것이 아니라, 아직 부러지지 않은 팔을 찾으러 온 것이었으니까.
세바스티안은 유리관에 얹은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그의 깊은 침묵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안젤라 수녀가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차가운 유리창에
감돌던 공명이 비로소 세바스티안의 손목을 따라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세바스티안이 돌아서며 물었다.
"수녀님, 보르하가
가고일의 미간을 꿰뚫을 때 썼던 기사의 힘... 그 600년의
저주를 끊어낸 믿음의 검이 톨레도에 있습니까?"
안젤라 수녀는 십자가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대성당의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경외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
"보르하 성인이 버린 것은 권력이었지 기사의 기백이 아니었습니다, 세바스티안. 그 힘은 이미 검이라는 형체를 넘어 하나의 공명으로
남아 있지요."
수녀는 품 안에서 낡은 가죽에 감싸인 묵직한 물건을 꺼냈다. 세바스티안은
말없이 그 가죽 뭉치를 바라보았다. 톨레도의 대장장이 루시아노가 대대로 지켜온, 차갑고도 날카로운 금속의 파편이었다.
"톨레도의 타구스 강물이 바위를 깎는 소리, 대장간의 망치가 달궈진 무쇠를 두드리는 그 진동 속에 당신이 찾는 답이 있을 겁니다. 보르하가 가고일을 무찔렀던 그 물리적 실체, 바로 톨레도의 인장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가죽 뭉치가 세바스티안의 손에 닿는 순간, 손목의 인장이 격렬하게
반응하며 낮은 기계음 같은 진동을 내뿜었다. 발렌시아의 시작이 끝나고,
이제 뼈를 흔드는 진실의 공명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가십시오, 세바스티안. 썩지 않는 팔의 축복이 당신의 그릇을 지켜줄 것입니다."
대성당의 육중한 문이 닫히고, 세바스티안은 안개 낀 발렌시아의 밤거리로
걸어 나왔다. 끝내 환상에서 깨어나 마주해야 할 최종적인 현실을 향해,
그리고 뼈를 흔드는 공명이 기다리는 다음 여정을 향해 그는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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