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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 2037 1권 : 발렌시아의 인장
8-6장 끝내 열리지 못한 300개의 문
어느 한적한 일요일 늦은 오후, 세바스티안은 비베로스 정원(Jardines del Real)의 구 왕궁터 앞에 다시 섰다. 오전에 동료들과 이곳을 지나쳤지만, 왁자지껄한 관광객들의 소음 속에 묻혀버린 폐허의 안타까운 풍경이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탓이었다. 해가 낮게 내려앉아 정원의 나무 그늘이 길게 늘어질 때가 되어서야 그는 홀로 이곳을 다시 찾았다.
소로야가 캔버스 위로 길어 올렸던 지중해의 찬란한 빛은 오후의 끝자락에서도 여전히 눈부셨으나, 발치에 흩어져 굴러다니는 돌덩이들은 200년 전의 비명을 머금은 채 정적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궁전을 ‘300개의 열쇠를 가진 집(Palacio de las 300 Llaves)’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 앞, 그 화려함과 권위를 오랑캐의 손에 내어주느니 차라리 스스로 무너뜨리는 쪽을 택했던 비극적인 선택의 현장. 세바스티안은 1810년 궁전의 파괴령을 이행하며 마지막으로 성을 떠나던 이름 없는 관리인의 손을 떠올렸다. 문을 열어 불청객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전의 모든 방과 비밀을 영원한 어둠 속에 닫아걸기 위해 녹슨 열쇠 뭉치를 거칠게 움켜쥐었던 그 떨리던 손끝을.
“형체는 사라졌으나…… 열려야 할 문들은 여전히 이곳에 갇혀 있군.”
세바스티안이 2009년 발굴 조사를 통해 세상에 겨우 얼개를 드러낸 차가운 기초석 위에 손을 올렸다. 손끝을 타고 서늘한 진동이 밀려왔다. 그것은 1,700년의 세월을 견딘 빈첸시오의 팔이 내뿜던 묵직한 정적과 같았고, 소로야의 그림 속 지중해 바다 위에서 흔들리던 은빛 비늘의 서늘한 반사와도 닮아 있었다.
그 순간, 손가락 끝에 닿은 흙먼지 속에서 오래된 철제 경첩 조각 하나가 걸려 나왔다. 200년 가까이 매립되어 있었음에도 표면에는 마지막 화염이 지나간 자리처럼 검은 그을음과 폭발의 흔적이 선명했다. 그것을 움켜쥐자 온몸의 신경이 가늘게 떨려왔다. 마치 오랫동안 임자를 기다리던 쇠붙이가, 그의 몸을 열쇠로 오인하고 응답하듯.
세바스티안은 궁전의 잔해를 그러모아 만든 엘리오 장군의 인공 언덕(Muntanyeta d'Elio)을 향해 천천히 발을 뗐다. 비극의 조각들을 덮어 만든 그 기묘한 언덕은, 죽은 어부의 이름 대신 적힌 장부의 숫자처럼 비정해 보였으나 동시에 파괴된 역사를 껴안고 솟아오른 숭고한 무덤이었다.
[파괴되기 전 발렌시아 왕궁(Palacio Real)] 출처 : Wikipedia
언덕 정상의 붉은 벽돌 바닥을 밟았을 때, 세바스티안은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은 이곳을 그저 바람이 잘 통하는 전망대라 부르며 정원의 초록을 감상했지만, 그의 발바닥에는 300개의 문이 한꺼번에 부서지며 내뱉은 마지막 파동이 애처로운 온기가 되어 전해지고 있었다.
화려했던 궁전의 대리석 기둥과 금색 문고리들은 이제 흙먼지가 되어 이 언덕의 뼈대가 되었다. 볼 것이 없는 게 아니었다. 세상이 너무 많은 것을 덮어버렸기에, 오직 인장을 가진 자만이 이 부재의 무게를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세바스티안은 그 텅 빈 공간을 바라보며, 1810년 궁전을 폭파하고 마지막 열쇠를 품은 채 돌아서던 관리인의 뒤로, 2,200년 전 불길 속으로 뛰어들던 사군툼 용사들의 환영을 겹쳐보았다. 두 사건 사이의 거대한 시간차를 넘어, 이 땅에는 치욕보다 죽음을 선택해서라도 존엄을 지키려 했던 거룩한 저항의 기억이 핏줄처럼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끝내 열리지 못한 300개의 문은 실패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봉인이었다.
세바스티안은 주머니 속 경첩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언덕을 내려와, 지금은 왕궁의 영토를 대체하고 있는 평화로운 현실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궁전이 사라진 자리에는 이제 아이들이 뛰어놀고 분수대가 물줄기를 뿜어내는 비베로스 정원의 울창한 수목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옆, 왕궁의 옛 열대 정원터와 맞닿은 곳에는 발렌시아 자연과학 박물관(Museu de Ciències Naturals)이 조용히 서 있었다. 왕들의 권력이 스러진 터 위에, 지구의 까마득한 태고적 기억을 담은 공룡의 골격과 화석들이 들어서 있다는 사실은 기묘한 운명처럼 느껴졌다. 인간의 300년 역사조차 수백만 년을 견뎌낸 바위와 뼈의 시간 앞에서는 한 자락 바람에 불과하다는 듯이.
이제 서서히 비베로스 정원에는 해가 지고 서늘한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세바스티안은 울창한 녹음 사이에서 마치 박제된 비명처럼 서 있는 대리석 조각상, '엘 이돌로(El Ídolo)' 앞에 멈춰 섰다.
사람들은 이것을 '우상'이라 부르며 그 매끄러운 피부의 곡선에 찬탄을 보냈지만, 세바스티안에게 그것은 전혀 다른 형상으로 읽혔다. 바르셀로나에서 보았던 리모나의 여인이 고통에 짓눌려 온몸을 웅크린 '소음의 흡수자'였다면, 카푸스의 이 여인은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들어 온몸으로 주파수를 받아내는 '열린 안테나'에 가까웠다.
세바스티안은 그렇게 느꼈다. 1911년 로마의 작업실에서 조각가 호세 카푸스(José Capuz)가 마주했던 것은 단순히 매끄러운 육체의 아름다움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빛보다 더 근원적인 무언가, 즉 태초부터 존재하는 신의 말씀(주파수)을 담아낼 투명한 그릇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옷은 노이즈다. 가식도 소음이다."
조각가의 해묵은 문장 같기도, 혹은 세바스티안 자신의 뇌리 속 깊은 곳에서 깨어난 확신 같기도 한 환청이 귓가를 때렸다. 여인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두 손을 살며시 펼쳐 귀를 감싸고 있었다. 두 눈을 감은 여인의 표정은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 존재를 향해 열려 있는 모습이었다. 여인의 대리석 피부는 정원의 미세한 바람을 안테나처럼 수신하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호세 카푸스 - 엘 이돌로]
그 순간 세바스티안은 깨달았다. 이 조각상이 '우상'이라 불린 이유는, 사람들이 그녀가 수신하는 본질이 아니라 그 본질을 담는 '그릇(육체)'의 아름다움만을 숭배했기 때문임을. 본질을 잃어버린 형상은 언제나 우상이 된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여인의 무릎 아래 새겨진 차가운 인장을 어루만졌다.
손가락이 돌의 표면에 닿았을 때, 정원의 미세한 소음들이 순간적으로 아득해지며 세바스티안의 지문을 타고 서늘한 진동이 번져나갔다. 그것은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망막 위로 선명하게 부상하는 기이한 숫자의 잔상이었다.
"54"
여인의 대리석 손등에서 시작된 미세한 떨림이 그 숫자를 반복적으로 타전하고 있었다. 그 순간, 여인의 감긴 눈꺼풀 너머로 또 다른 숫자가 겹쳐졌다.
"86"
그 숫자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경고하고 있는지, 어떤 운명과 연결되어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대리석 지각 아래서 솟구쳐 오르는 아득한 불협화음과 함께, 여인이 100년의 시간을 뚫고 자신에게 무언가 거대한 경고를 타전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명백했다.
"아직 늦지 않았어."
환청이었을까. 세바스티안은 조각상의 무릎에서 손을 떼었지만, 손바닥에는 마치 오래 눌러 찍힌 인장처럼 두 숫자의 아릿한 감각만이 남아 있었다.
박물관 유리창에 반사되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그는 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었다. 주머니 속 쇠붙이가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진동했다.
폐허와 그 주변을 둘러싼 자연의 시간 모두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아직 열릴 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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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집필 중인 『PROJECT 2037』의 작업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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