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2037 1권 : 말바로사 해변, 베를랑가의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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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 2037 1권 : 발렌시아의 인장

말바로사 해변, 베를랑가의 환영


[말바로사 해변 산책로에 새겨진 실제 인장 
알프레도 마타스(좌) / 루이스 가르시아 베를랑가(우) ]

운동화 끈을 다시 한번 고쳐 매며 세바스티안은 말바로사 산책로 저 멀리를 노려보았다. 지중해의 눈부신 파도 소리가 왼편에서 부서져 내렸고, 오른편 발아래로는 시대를 풍미했던 거장들의 이름이 영적 이정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의 발길이 까만 대리석 하나 위에 닿는 순간, 심장 박동이 기묘한 리듬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알프레도 마타스(Alfredo Matas). 흩어진 스페인의 예술적 주파수들을 '고야'라는 이름 아래 집결시켜 하나의 거대한 질서를 만든 설계자. 과거 가학적 소음을 내뿜던 고야의 광기를 제도권의 빛으로 치환하려 했던 그의 의지가 발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그래, 나 또한 마타스처럼 해야 한다.'

세바스티안은 숨을 몰아쉬었다. 이 흩어진 예술가들의 인장과 방대한 방랑의 서사를 하나의 '말씀'으로 묶어내는 제작자가 되어야 했다. 마타스가 고야의 이름을 빌려 질서를 세웠듯, 자신 또한 이 인장들로 신의 방주를 완성하리라.

마타스의 명패를 박차고 나가는 순간, 그의 황금눈에 투사된 바닥의 타일들이 거대한 필름 릴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리노 벤투라의 고독한 침묵과 코스타 가브라스가 파헤친 음모의 파편들이 거대한 프레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은 단순한 달리기가 아니었다. 결전의 날을 향해, 흩어진 영적 주파수들을 하나의 그릇에 담아내려는 집행자의 거룩한 질주였다.

세바스티안의 눈에는 오직 저 멀리 수직으로 솟구친 거대한 강철 기둥, 국기 게양대만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하늘과 땅의 주파수를 잇는 거대한 안테나와 같았다. 흩어진 바람의 소리를 하나의 깃발로 묶어내는 강철 기둥.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자신의 육체가 거대한 울림통이 된 것 같은 전율이 솟구쳤다. 인간의 몸은 주파수를 담는 그릇이며, 그 주파수는 곧 신의 말씀이라는 깨달음이 온몸의 세포를 깨웠다. 게양대에 가까워질수록 강철 로프가 바람에 부딪히며 내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려왔다. 그것은 굴절된 소음이 아니라, 하늘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거룩한 공명음이었다.

마침내 게양대 아래 도달한 세바스티안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강철 기둥을 손으로 짚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뜨거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결국 육체는... 저 게양대처럼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잡고, 보이지 않는 말씀을 증명해 내는 도구일 뿐이야."

세바스티안은 눈을 깜빡였다. 거대한 게양대의 그림자가 백사장 위에 길게 드리워지며, 그 끝이 마치 성배를 향한 화살표처럼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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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의 전율이 가라앉기도 전에, 바람의 방향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지중해의 훈풍이 실어 온 모래바람이 말바로사 산책로를 다시 훑고 지나갈 때, 세바스티안의 발길은 산책로 초입의 베를랑가의 인장 위로 돌아와 섰다.

순간, 지중해의 눈부신 햇살이 창백한 수술실 조명처럼 일그러졌다. 파도 소리는 순식간에 진공 상태의 고요로 변했고, 발바닥을 타고 베를랑가가 박제해둔 1963년의 주파수가 타고 올라왔다.

모래사장 위로 하얀 대리석 복도가 끝없이 펼쳐졌다. 그 끝에서 한 사내가 교도관들에게 붙잡힌 채 끌려가고 있었다. 그는 사형수가 아니었다. 여정의 끝에서 '집행'을 맡아야 할 자, 바로 미래의 세바스티안이었다.

사내의 구두 뒷굽이 바닥을 긁으며 내는 소음은 600Hz의 날카로운 금속음이 되어 세바스티안의 고막을 찢었다. 입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그의 눈동자 속에서는 수천 마리의 새가 파닥이는 듯한 비명이 쏟아지고 있었다. '살기 위해 누군가의 주파수를 끊어야 하는 자'의 절망. 소리 없는 비명이 공기를 진동시키지 못하고 안으로 굽어 들어가 심장을 난도질했다.

차가운 바닷물이 발등을 덮치는 순간 환영이 깨졌다. 베를랑가의 이름 위로 고인 바닷물이 눈물을 머금은 거대한 눈동자처럼 세바스티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환영 속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 공포로 뒤틀린 입술... 그곳에 있는 것은 타인이 아니었다. 인장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부서져 버린, 늙고 지친 세바스티안 자신이었다.

환영 속의 그는 언어 대신 일그러진 파동을 내뱉었다.

‘집행하라, 세바스티안. 그래야 방주가 완성된다.’

그 목소리는 뇌리를 찌르는 가학적 소음이 되어 고막을 훑고 지나갔다. 자신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대리석 골짜기로 뚝뚝 떨어졌다. 베를랑가의 이름 위로 고인 눈물은 붉게 타오르다 이내 파도에 씻겨 내려갔다.

뜨거운 햇살 아래서 오한을 느끼며 세바스티안은 깨달았다. 방금 전 게양대 아래서 느꼈던 각성의 환희 뒤편에는, 피할 수 없는 잔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바닥에 새겨진 이름은 영화인의 영광이 아니라, 미래의 자신이 보낸 구조 신호이자 결코 피할 수 없는 사형 집행서였다.

'내가 나를 처형해야만 이 저주가 끝나는가?'

신발 끝에 닿은 야자수 잎사귀가 칼날이 되어 발목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려던 세바스티안의 발걸음이 돌연 멈춰 섰다.

발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음각의 통증 속에서, 문득 거대한 고요가 그를 감싸 안았다. 그것은 비극의 회피가 아니라, 운명의 완전한 수용이 가져다주는 찬란한 안식이었다.

'그렇다. 처형해야 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다. 바로 이 600년의 소음을 그러안고 부서져 가는 나의 육체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방주를 완성하는 마지막 열쇠는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었다. 흩어진 주파수를 모아 수신하는 안테나이자 온몸으로 말씀을 담아내는 그릇인 자신이, 결전의 날에 스스로를 연소시켜 완전히 산화(酸化)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내가 태워져 한 자루의 잿더미가 되고, 그 육체의 유기적인 노이즈가 완전히 사라질 때 비로소 72개의 주파수가 하나의 온전한 빛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스스로를 바쳐 방주의 문을 닫는 최종적인 번제(燔祭). 환영 속 늙은 세바스티안이 내뱉었던 '집행하라'는 환청은, 결국 자신의 육체를 기꺼이 태워 바치라는 영혼의 나지막한 명령이었다.

세바스티안은 천천히 눈을 뜨고 수평선을 응시했다. 방금 전 발목을 베어낼 것 같던 종려나무 가시의 통증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스스로 산화되어 신의 도구가 되겠다는 결의가 가슴 깊은 곳에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발바닥에 새겨진 깊은 음각의 흉터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저주의 사형집행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구원을 향해 제 몸을 기꺼이 던지는 집행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거룩하고 눈부신 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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