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발렌시아의 인장 1권 : 4-13장 푸이그의 성모

소설 발렌시아의 인장 1권 : 7-3장 어둠의 두 갈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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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 2037 1권 : 발렌시아의 인장
 7-3장 어둠의 두 갈래 길


발렌시아의 깊은 밤, 프란시스코 리발타의 화실은 창틈으로 새어드는 달빛조차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암흑에 잠겨 있었다. 공기 중에는 쏘는 듯한 테레빈유 향과 굳어가는 안료 냄새,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이 피부를 찔렀다. 리발타는 촛불 하나 켜지 않은 채 어둠 그 자체를 직시하며, 두 제자 앞에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태초의 인장'을 조용히 꺼내 놓았다.

"보아라. 이 어둠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리발타의 목소리가 바닥재를 타고 낮게 울렸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내기 위한 정결한 그릇이자 침묵이다. 너희는 이 인장을 지켜낼 준비가 되었느냐?"

사위인 카스텔로는 경건하게 무릎을 꿇으며 스승의 붓을 떨리는 두 손으로 받들었다. 반면, 열아홉의 리베라는 무릎을 꿇는 대신 거친 손끝에 맺힌 굳은살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눈은 스승이 말한 정결한 어둠이 아니라, 그 어둠 밑바닥에 숨겨진 날카롭고 참혹한 고통의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


스승의 걸음소리가 복도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리베라는 촛불을 켜지도 않은 채 붓을 움켜쥐었다. 팔레트 위 납유리 안료가 굳은 피처럼 불길한 붉은빛을 뿜었다. 리베라는 캔버스 천을 찢을 듯 강하게 붓을 문질러 가며 기괴하게 비틀린 성인의 얼굴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거친 돼지털 붓이 말라붙은 마포천을 긁어낼 때마다, 팽팽하게 당겨진 비올라의 중저음 현이 쇳소리를 내듯 칼칼한 마찰음이 화실 안을 울렸다. 성인의 눈동자는 구원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극심한 공포로 번뜩였고, 피부의 주름은 마치 가뭄에 대지가 갈라지듯 비틀렸다.

옆에서 후안 데 후아네스의 성화 도면을 정밀 컴퍼스로 측정하던 카스텔로의 손이 딱 멈춰 섰다. 붓질 소리가 정갈한 도식의 정적을 사정없이 짓밟고 있었다.

카스텔로는 컴퍼스를 든 채 성큼성큼 다가가 리베라의 붓을 쥐고 있던 손목을 세게 잡아챘다. 뚝, 하고 붉은 안료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만둬라!" 카스텔로의 목소리가 떨렸다. "스승님께서 맡기신 건 가문의 명예이자 거룩한 질서다. 이런 핏빛 도륙은 그저 네 일탈이고 광기일 뿐이야!"

리베라는 손목이 잡힌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십대 특유의 오만함과 깊은 허기가 번들거렸다. 그는 카스텔로가 손에 쥐고 있는 정교한 황동 컴퍼스를 흘겨보았다.

"질서요? 컴퍼스?"

리베라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잡힌 손목을 비틀어 털어냈다. 안료가 번진 손가락으로 카스텔로의 가슴팍을 툭 치며 바짝 다가섰다.

"그 잘난 비율 속에 신이 있어요? 손가락 하나 안 찢겨본 성인이... 매질 한번 안 당해본 그림이... 진짜 우리를 구원합니까?"

리베라는 캔버스 위의 비틀린 얼굴을 붓끝으로 찍어 누르며 말을 짓씹었다. 안료가 자국을 남기며 뭉개졌다.

"전 안 그려요. 그따위 깨끗한 화실용 신은. 진짜는... 살점이 찢어지는 바닥에 있어. 난 이탈리아든 지옥이든 가서, 그 진짜를 볼 겁니다."

카스텔로는 차갑게 식어버린 눈으로 리베라를 밀쳐내며 쏘아붙였다.

"착각하지 마라, 주세페. 폭력을 쫓는 자는 결국 자기가 만든 어둠에 먹히는 법이다."

리베서는 대답 대신 코웃음을 치며 안료 범벅이 된 붓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가 화실 문을 차고 나가자, 차가운 밤바람이 밀려들어 카스텔로의 도면들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카스텔로의 정교한 도식과, 리베라가 남긴 난폭한 붓질의 흔적만이 상처처럼 남아 있었다.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세바스티안은 발렌시아 미술관의 차가운 상설 전시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리발타와 카스텔로가 남긴 고요하고 정갈한 성화들 사이, 묵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리베라의 <성 이레네의 간호를 받는 성 세바스티안>은 차가운 복도 전체를 칼날 같은 이질감으로 진동시키고 있었다.

세바스티안의 시선이 캔버스 중심에 멈췄다. 허공을 향해 두 손이 묶인 채, 살점이 찢겨 나가는 고통 속에서 사경을 헤매는 성 세바스티안의 비틀린 육체. 몸통을 관통한 화살을 조심스레 뽑아내는 여인의 손길과 팽팽하게 당겨진 성인의 근육은 마치 찢어지기 직전까지 당겨진 비올라의 현과도 같았다.

그 순간, 세바스티안은 자신의 팔에 돋아나는 서늘한 소름을 느꼈다.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캔버스 속 성인의 난도질당한 육체. 400년 전 열아홉의 리베라가 붓끝으로 찍어 눌렀던 그 참혹한 고통의 결이, 단단하게 굳은 안료 표면을 타고 세바스티안 자신의 신경마디로 직접 번져왔다.

"살점이 찢어지는 바닥이라..."


[주세페 리베라 - 성 이레네의 간호를 받는 성 세바스티안]


세바스티안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자신의 손통을 움켜쥐었다. 400년 전 카스텔로가 던졌던 경고—폭력을 신성시하는 자는 구원이 아닌 사악한 욕망의 껍데기에 삼켜질 뿐이라는 그 서늘한 통찰—가 세바스티안의 귓가를 울렸다.

그러나 정갈한 질서 속에서 박제되기를 거부하고, 찢겨나간 살점과 비명 속으로 제 발로 뛰어든 리베라의 방랑. 그것은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뒤로한 채 거친 역사와 사명의 궤적 속으로 자신을 던져 넣은 세바스티안 자신의 삶과 기괴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캔버스 속 성인처럼 사경을 헤매면서도 끝내 치유와 구원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세바스티안 자신이 짊어진 가혹한 저주이자 사명이었다.

그림 옆, 발렌시아 미술관이 오랜 시간 지켜온 벽면에 걸린 벨라스케스의 자화상 속 깊은 눈동자가 시공간을 초월해 이 모든 고통과 방랑의 역사를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캔버스 속 목격자의 시선이 세바스티안의 등을 서늘하게 찌르는 순간, 귓가로 아득한 태초의 잔향이 밀려들었다.

리베라가 캔버스에 남긴 상처는 단순한 광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거친 세상의 소음 속에서 진짜 구원의 그릇을 찾아내라고 세바스티안의 육체를 뒤흔드는 첫 번째 신호였다. 세바스티안은 어깨에 지워진 사명의 무게를 느끼며, 묵직해진 발걸음을 다음 전시실로 옮겼다.

댓글

  1. ※ 이 글은 집필 중인 『PROJECT 2037』의 작업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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