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권 발렌시아의 인장 : 9-4장 우연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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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 2037 1권 : 발렌시아의 인장
9-4장 우연한 만남

발렌시아의 야외 테라스 레스토랑은 밤이 깊어질수록 타파스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와 와인 잔의 울림으로 아늑한 밤의 합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세바스티안의 맞은편에는 오랜 세월 그의 삶을 지켜준 안전한 방주, 아내 올리비아가 샐러드를 집어 들며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울림 사이로 오래전 기억의 잔상을 닮은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테라스 구석, 고풍스러운 기둥 옆 오른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중년의 커플. 처음에는 그저 낯이 익다는 정도였으나 시선은 자꾸만 그 여인에게로 되돌아갔다. 아담한 체격, 밤의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며 어깨너머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구불구불한 긴 갈색 머리. 조명에 닿은 턱선과 와인 잔을 쥔 손가락의 각도까지…. 세월이 지워냈을 것이라 믿었던 흔적들이 하나씩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러다 문득, 묻어 두었던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이사벨라. 삼십 년의 세월 속에서도 한 번도 희미해지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 순간 그녀 역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둘 다 입을 열지 않았다.

"올리비아,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세바스티안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 끝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자 거울 너머로 그녀의 시선이 스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바스티안은 접어 두었던 와인 냅킨을 대리석 위에 조용히 내려놓고 돌아섰다. 스쳐 지나가던 이사벨라가 그것을 집어 들었고, 그녀의 손끝에 잠시 머물던 냅킨 한 장이 같은 자리에 남겨졌다. 말 한마디 없는 교환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세바스티안은 무릎 아래에서 냅킨을 펼쳤다. 숨이 멎었다. 삼십 년 전과 똑같은 단정한 필체로 단 일곱 글자가 적혀 있었다. 『테루엘이 그립다.』 세바스티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역시 같은 일곱 글자를 남겼었다.

"세바스티안? 어디 아파?" 올리비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손을 잡았다. 세바스티안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스치며 애써 웃었다. "아니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

와인 잔 너머로 시선을 옮기자, 이사벨라 역시 남편이 어깨를 감싸 안을 때 눈꼬리를 조용히 누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두 사람은 각자의 작은 거짓말 뒤에 숨어, 서로가 울지 않으려 애쓰는 얼굴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세바스티안은 냅킨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덮었다.

[에드워드 호퍼 – Nighthawks]

 

세월이 흘러, 『사군토 : 잊혀진 제국의 주파수』가 세상에 나온 어느 날, 발렌시아 구시가지의 오래된 서점에서는 고고학자이자 작가가 된 세바스티안의 출간 기념 사인회가 열리고 있었다. 수백 명의 독자와 연구자들이 긴 줄을 이루었고, 작가는 무뎌진 손목으로 기계처럼 사인을 이어가고 있었다.

"Para quién?"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물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Isabella."

순간 작가의 손이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삼십 년 가까운 시간이 조용히 내려앉은 얼굴이 보였다. 레스토랑의 아늑한 소란 속에서 눈가를 감추던 그 눈빛 그대로, 이사벨라가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작가는 펜을 내려놓았다. 입술 끝까지 올라온 수많은 말은 끝내 소리가 되지 못했다. 그는 행사요원을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잠시 쉬겠습니다."

전용 휴게실 깊숙한 장식장 안에는 금박 인장이 새겨진 슬립케이스 하나가 조용히 놓여 있었다. 50부만 존재하는 H.C. 판본. 그러나 그중에서도 아직 주인을 만나지 않은 유일한 한 권이었다. 그는 가장 아끼던 만년필을 꺼내 슬립케이스 안쪽에 H.C.라는 글자 뒤 비어 있는 공간에 정갈한 필기체로 이렇게 짧게 적었다.

H.C. — À Isabella

그리고 수년 전 발렌시아의 레스토랑에서 조용히 챙겨 온 낡은 와인 냅킨 한 장을 속표지 사이에 끼워 넣었다.

다시 사인회장으로 돌아온 작가는 아무 말 없이 슬립케이스를 그녀의 두 손 위에 올려놓았다. 카메라 셔터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사벨라의 시선이 필기체로 적힌 H.C. — À Isabella라는 글자 위에 오래 머물렀고,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이어 속표지 사이에 끼워진 낡은 냅킨의 모서리를 발견한 그녀는 그 얇은 종이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만으로도 두 사람은 삼십 년 전 테루엘의 밤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녀는 책을 가슴에 꼭 안고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서점 밖 햇살 속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작가는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다가 조용히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세상은 그것을 책이라 불렀지만, 두 사람에게 그것은 끝내 꺼지지 않은 하나의 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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