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아의 식탁 - 샐러드, 치아바타빵

소설 1권 발렌시아의 인장 : 9-2장 파테르나 스페인벽

PROJECT 2037 1권 : 발렌시아의 인장

9-2장 파테르나 스페인벽

뜨거운 5월의 햇살 아래, 세바스티안은 발렌시아의 또 다른 침묵 앞에 서 있었다. 푸른 하늘 아래 대지는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지만, 파테르나의 ‘스페인의 벽’에서 스쳐 오는 바람만큼은 지층 깊숙이 갇힌 비명을 품은 듯 서늘했다.

에릭 교수와 세바스티안은 까르푸 입구의 번잡함을 뒤로하고 먼지 날리는 길을 걸어 '스페인의 벽' 앞에 다다랐다. 5월의 해는 벽 너머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리베라가 화폭에 담았던 어둠처럼, 빛이 사라지는 자리마다 벽면의 잔혹한 윤곽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파테르나 스페인벽]

그 벽 아래, 한 동양인 여행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주변의 흙더미 속에서 손바닥만 한 돌멩이들을 하나씩 골라내어 작은 탑을 쌓는 중이었다. 동양의 산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 익숙한 의식이 이곳 스페인의 형장 위에서 조용히 재현되고 있었다.

"보게, 세바스티안." 에릭 교수가 걸음을 멈추며 나직이 말했다. "저 이방인이 쌓는 돌들을 보라고."

여행자는 흰 손수건으로 돌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며 돌을 올렸다. 첫 번째 돌은 이름 없이 쓰러져간 이들을 위해, 두 번째 돌은 벽 너머를 바라보며 울었을 가족들을 위해, 그리고 세 번째 돌은 여전히 이 차가운 땅속에 잠들어 있을 영혼들을 위한 것이었다.

마지막 작은 돌을 꼭대기에 얹었을 때, 여행자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마른 바람 사이로 낯선 음절들이 흘러나왔다. 에릭 교수는 그 문장의 뜻을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이 슬픔을 담은 동양의 언어라는 것, 그리고 그 짧은 음성 속에 무거운 생의 무게가 실려 있음을 직감했다.

에릭 교수는 천천히 다가가 그의 곁에 섰다. 그리고 손을 올려 여행자의 어깨를 가볍게 짚으며 스페인어로 물었다.

"...한국에서 오셨습니까?"

여행자가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훔쳤다. 하얀 천 위로 번진 흙먼지 얼룩은 마치 벽이 흘리는 피처럼 보였다. 그가 서툰 스페인어와 영어를 섞어 나직이 답했다.

"이곳의 흙을 보러 왔습니다. ...우리도 이런 벽을 가진 나라입니다. 5월 18일이 되면, 항상 이 흙의 무게가 떠오릅니다."

대사는 길지 않았고, 문장 사이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에릭 교수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그는 세바스티안을 돌아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세바스티안, 이것이 두엔데(Duende)일세. 언어는 다르지만 땅이 기억하는 고통을 알아채는 공명이지."

여행자는 다시 벽을 향해 잠시 고개를 숙였다.

"당신들의 숨결은 잊히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오랜 세월 굳게 닫혀 있던 벽의 정적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듯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찾아온 이방인이 건넨 나직한 온기 때문이었을까.

여행자는 에릭 교수를 향해 목례를 건넨 뒤, 먼지 묻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통성명도, 기약도 없었다. 에릭 교수와 세바스티안은 그 이방인의 뒷모습이 긴 그림자에 잠겨 사라질 때까지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저 멀리 공동묘지 쪽에서 군악대가 연주하는 '임노 데 리에고(Himno de Riego)'의 낮은 금관악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울림은 공중으로 퍼지지 않고 지표면을 따라 낮게 깔렸다. 에릭 교수는 그 소리가 단지 귀로 들리는 음악이 아니라, 발밑 대지를 흔드는 규칙적인 파동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Himno de Riego - Anthem of Second Spanish Republic_slow_tempo

=> https://youtu.be/Q97Y2shc4UY?si=F-YKelrUm6IDYxrD

5월의 노을이 돌탑 위에 붉게 내려앉고 있었지만, 두 지성인은 마치 돌탑의 일부가 된 듯 묵직한 정적 속에서 멀어지는 이방인을 배웅했다. 그곳엔 더 이상 이방인도, 학자도 없었다. 그날 붉은 벽 앞에는 아무 이름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는 기억했고, 누군가는 그 기억에 대답했다. 시간이 지나도 그날의 침묵은 하나의 인장으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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