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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 2037 1권 : 발렌시아의 인장
파테르나 스페인벽
2026년 5월 18일의 발렌시아는 잔인할 만큼 눈부신 푸른 하늘 아래에서 뜨거운 지열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파테르나의 ‘스페인의 벽’에서 스쳐 나오는 바람만은 지층 깊숙이 갇힌 비명을 품은 듯 기이하리만치 서늘했다.
에릭 교수와 세바스티안은 까르푸 입구의 번잡함을 뒤로하고 흙먼지 날리는 길을 걸어 '스페인의 벽' 앞에 다다랐다. 5월의 해는 벌써 벽 너머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거장 리베라가 화폭에 담았던 지독하고도 아름다운 명암의 대비, 그 테네브리즘의 어둠이 해가 기울수록 더 짙어지듯 벽면을 잠식해 들어갔다.
그 벽 아래, 한 동양인 여행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주변의 붉은 흙더미 속에서 손바닥만 한 돌멩이들을 하나씩 골라내어 탑을 쌓는 중이었다. 동양의 산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 익숙하고도 경건한 의식이 이곳 스페인의 형장 위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보게, 세바스티안." 에릭 교수가 걸음을 멈추며 나직이 말했다. "저 이방인이 쌓는 돌들을 보라고."
여행자는 흰 손수건으로 돌에 묻은 붉은 먼지를 닦아내며 정성껏 탑을 올렸다. 첫 번째 돌은 이름 없이 쓰러져간 젊은 예술가를 위해. 두 번째 돌은 아이를 빼앗기고 평생 벽 너머를 바라보며 울었을 어머니를 위해. 그리고 세 번째 돌은 여전히 이 차가운 흙 속에 잠들어 있을 수천 명의 영혼을 위한 것이었다.
마지막 작은 돌을 꼭대기에 얹었을 때, 여행자의 어깨가 크게 들썩이며 참았던 울음이 파테르나의 마른 바람에 실려 나갔다. 흐느끼는 입술 사이로 낯선 언어가 흘러나왔다. 에릭 교수는 그 문장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고고학자로서 접했던 동양 언어의 음운을 떠올리며 그것이 한국말임을 직감했다. 동시에 그 짧은 언어 속에 응축된, 지독하게 무거운 생의 무게 또한 온몸으로 느껴졌다.
에릭 교수는 천천히 다가가 그의 곁에 섰다. 그리고 따뜻한 손을 여행자의 어깨에 얹으며 스페인어로 물었다. "우리 땅의 아픔을 이방인이 이렇게 이해하다니… 한국에서 오셨습니까?"
이방인이 붉은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훔치며 영어가 섞인 나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얀 천 위로 번진 붉은 얼룩은 마치 파테르나의 벽이 흘리는 피처럼 보였다. "먼 동방의 반도에서 온 나조차 당신들의 비명을 듣는다고... 이 붉은 흙의 무게를 안다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우리도 당신들과 같은 벽 앞에서 울어본 민족입니다. 46년 전 5월 18일, 피로 물든 광장의 붉은 흙은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했으니까요.”
그 말을 전해 들은 에릭 교수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그는 세바스티안을 돌아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세바스티안, 이것이 바로 두엔데(Duende)일세. 언어는 다르지만 흙의 무게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자의 공명이지. 저 이방인이 바치는 위로는 80년도 더 된 시간 저 벽 앞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을 이들의 비명에 대한 가장 고결한 대답이야."
여행자가 다시 벽을 향해 읊조렸다.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로 울지만, 흙의 무게는 다르지 않습니다. 당신들의 죽음은 망각이라는 무덤 속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오랜 세월 굳게 닫혀 있던 벽의 침묵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억눌려온 슬픔의 메아리이자,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이방인의 온기에 대한 처절한 응답이었다.
여행자는 에릭 교수를 향해 짧게 목례를 건넨 뒤, 붉은 흙이 묻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고는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아무런 통성명도, 기약도 없었다. 에릭 교수와 세바스티안은 그 이방인의 뒷모습이 긴 그림자에 잠겨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저 멀리 공동묘지 쪽에서는 군악대가 연주하는 '임노 데 리에고(Himno de Riego)'가 처량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 낮은 금관악기의 울림은 기이하게도 지표면을 따라 낮게 깔렸고, 에릭 교수는 그것이 단순한 음악이 아닌, 대지를 흔드는 600Hz의 규칙적인 파동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Himno de Riego - Anthem of Second Spanish Republic_slow_tempo => https://drive.google.com/file/d/1ZfN74-sozDmEVp6kQlAUoax3mh2URUrv/view?usp=drive_link
5월의 노을이 돌탑 위에 붉게 내려앉고 있었지만, 두 지성인은 마치 돌탑의 일부가 된 듯 묵직한 정적 속에서 멀어지는 이방인을 배웅했다. 그곳엔 더 이상 이방인도, 학자도 없었다. 오직 아픔을 알아본 인간과, 오랜 세월 만에 그 온기를 전해 받은 영혼들의 고요한 만남만이 붉은 벽 앞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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