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동물 : 연지벌레 - 우리는 매일 벌레를 바르고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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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동물 : 연지벌레 

우리는 매일 벌레를 바르고 마신다?

[발렌시아 대성당 천장화 - 산 레오카디오]

스페인 발렌시아 대성당의 주제단을 올려다보았을 때의 그 압도적인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르네상스의 거장 파올로 데 산 레오카디오가 남긴 천장화 속,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강렬한 붉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성스러운 악기를 연주하는 천사들의 모습은 가히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 찬란하고 거룩한 붉은빛의 화폭을 멍하니 바라보던 순간, 서늘한 진실 하나가 뇌리를 스쳤습니다.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정점에 선 저 붉은 물감의 밑바탕이 실상은 짓밟히고 갈려 나간 미물의 시체 가루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경 역사상 가장 거룩한 신의 성막을 물들이는 동시에, 제 몸을 짓깨뜨려 피를 흘려야만 했던 동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거대한 제물용 소나 양이 아닌, 바로 손톱보다 작은 ‘연지벌레(Cochineal)’입니다. 인간이 신을 만나기 위해 짜 올린 거룩한 성막의 덮개와 대제사장의 화려한 옷에 드리워진 ‘홍색 실’이, 사실은 수억 마리 미물의 배를 갈라 얻어낸 핏빛 즙이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성경은 이 보이지 않는 벌레의 죽음을 통해, 숭고함과 잔혹함이 교차하는 서늘한 구속의 비밀을 고발합니다.
출애굽기 26장 1절에서는 신의 거처인 성막을 지을 때 바쳐져야 할 정결하고 거룩한 재료를 이렇게 명령합니다.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놓아 만들지니" 성경 속에서 ‘홍색 실’은 결코 자연에서 절로 얻어지는 식물성 물감이 아니었습니다. 성경 히브리어 원문에서 홍색은 ‘토라아트 셰니(תּוֹלַעַת שָׁנִי, Tola'at Shani)’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토라아트(Tola'at)’의 원 뜻은 바로 ‘벌레(Worm/Bug)’이며, ‘셰니(Shani)’는 ‘진홍색(Scarlet) 또는 두 번 물들인 빛깔’을 의미합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홍색 실은 글자 그대로 ‘연지벌레로 물들인 붉은 실’을 뜻합니다.
사막의 가시 선인장에 기생하는 연지벌레 암컷이 알을 배어 몸이 붉게 부풀어 오를 때, 그 벌레를 손으로 일일이 긁어 모아 말린 뒤 짓개어 빻을 때 비로소 흘러나오는 피의 기호였습니다. 벌레가 제 몸을 완전히 터뜨려 붉은 진액을 쏟아내고 죽어가는 과정 없이는 결코 성막의 홍색 실을 만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선인장에 기생하는 연지벌레]

여리코 성의 기생 라합이 창문에 매달아 온 가족의 구원을 얻었던 그 홍색 줄, 그리고 후일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깨에 씌워졌던 기만과 수치, 그리고 구원의 ‘홍포(붉은 옷)’ 역시 이 미물의 피로 물든 직물이었습니다.

시편 22편 6절은 메시아의 참혹한 비하와 희생을 이 연지벌레의 원문 이름을 그대로 빌려 통렬하게 예언합니다.
 "나는 벌레(토라아트)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이처럼 연지벌레는 스스로를 완전히 부숴버림으로써 가장 거룩한 신의 성막을 물들이고, 가장 비참한 인간의 죄를 덮는 역설적인 희생의 대명사였습니다. 이 시선은 인류의 언어와 문화 구석구석에 짙게 투영되어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예로부터 "왕의 자색 옷과 제사장의 홍색 비단 밑에는 빻아진 벌레의 비명이 숨어있다"라며 권력과 아름다움의 이면에 숨겨진 잔혹한 희생을 경계했습니다. 인간이 겉으로 드러내는 화려함이 사실은 또 다른 생명의 파괴 위에서만 유지된다는 서늘한 진실을 비유하곤 했습니다.

동양의 오랜 통찰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는 물을 들일 수 없다(無血不染)"는 야사(野史)의 구절이나, "뼈를 깎고 살을 깎아내는 고통을 지나야 빛을 본다"는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깊은 이면처럼, 숭고한 가치는 반드시 누군가의 살이 찢기고 뼈가 빻아지는 희생의 통로를 거쳐야만 얻어짐을 고발했습니다.
일상의 언어 속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인간이 붉은 입술을 만들며 "핏빛처럼 영롱하다"라고 자조적으로 읊조릴 때, 그 언어의 깊은 바닥에는 미(美)를 얻기 위해 타자의 생명을 무감각하게 으깨어 바르는 인간 본연의 지독한 탐욕과 자괴감이 배어 있습니다.
 
심지어 현대 식료품과 화장품 성분표에 쓰이는 '카민'이나 '코치닐 색소'라는 매끄러운 단어 뒤에는 충격적인 숫자가 숨어 있습니다. 단 1kg의 붉은 색소를 얻기 위해 무려 15만 마리가 넘는 연지벌레를 말려 맷돌에 넣고 갈아버려야 한다는 기괴하고 서늘한 유래처럼, 우리는 날마다 미생물의 시체를 얼굴에 바르고 입으로 삼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미물의 이면에는 인간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생경하고 기괴한 욕망의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은 권력의 우월함과 아름다움을 증명하기 위해 이 으스스한 도축과 착색의 문화를 공유해 왔습니다.
 
대항해시대 스페인 제국은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한 뒤 금과 은보다 더 은밀하고 비싸게 이 연지벌레를 유럽으로 실어 날라 부를 축적했고, 유럽의 왕족과 대사제들은 수억 마리의 벌레를 빻은 피로 물들인 붉은 비단을 걸치며 오컬트적인 권위와 거룩함을 과시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이한 잔혹함과 무감각함은 멀리 있는 역사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성화(聖畫)를 완성하기 위해 화가들은 연지벌레의 말린 시체 가루를 기름에 짓개어 붓끝에 묻혔습니다. 거룩함을 표현하는 화폭의 밑바탕이 실상은 짓밟힌 벌레의 피라는 사실이 오싹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더 오싹한 것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가장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식탁에서 현재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달콤하고 무해해 보이는 그 붉은 딸기우유나, 붉은 색의 디저트, 그리고 립스틱의 붉은 빛깔이, 사실은 사막의 선인장에서 수확되어 뜨거운 솥에 삶겨 말려진 뒤 가루가 된 수천 마리 벌레의 몸통이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더 서늘한 것은, 우리 모두가 매일 립스틱을 바르고 붉은 음료를 마시면서도 제 입술에 묻은 것이 으깨진 미물의 피라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무감각해진 일상 속에서 타자의 파괴를 매끄러운 포장지로 덮어버린 채 미소 짓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경이 경고하는 영적 장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겉으로는 '천연 첨가물', '고급 화장품'라는 번듯한 간판으로 간판갈이를 마쳤지만, 그 은밀하게 가려진 포장지 너머를 유심히 들여다본 적이 있으십니까? 거짓된 상표는 속일 수 있어도, 짓개어진 피의 본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스페인 발렌시아의 거룩한 천장화를 그린 파올로 데 산 레오카디오의 붓끝을 떠올려 봅니다. 천장의 빛나는 영광을 물들이기 위해 자신의 껍질을 깨부수고 붉은 즙이 되어 사라진 저 미물은, 어쩌면 나라는 존재의 허물을 덮기 위해 십자가에서 완전히 부서지셔야 했던 구원자의 초상이자, 그 은혜를 받아먹고도 무감각하게 타인의 희생을 삼키며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적나라한 초상입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순결하고 고상한 표정을 지은 채 거룩함을 논하지만, 돌아서면 자신의 욕망과 미(美)를 위해 수많은 생명의 희생을 무감각하게 삼켜버리는 연지벌레의 소비자는 아닙니까? 스스로의 거짓된 가식의 간판을 비워내십시오.
세상이라는 시장판에서 겉모습을 매끄럽게 포장하려 애쓰는 기만을 내려놓고, 나를 직면하게 만드는 설계자의 시선 앞에 가식 없이 부서진 본모습을 서늘하게 꺼내놓으시길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은 인류를 향해 값으로 치러진 숭고한 희생의 본질을 명확히 경고합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세상이 그어놓은 화려함과 부패함의 경계선 위에서, 마침내 내 안의 숨겨진 욕망을 직면하고 나를 위해 부서진 핏빛 은혜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썩지 않는 신의 은혜와 진리의 말씀이 찾아와 우리를 가장 거룩한 성막의 실로 온전히 다시 빚어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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