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야기 : 호안 미로의 자화상, 23년의 시간이 선물한 비움

 

그림 이야기 : 호안 미로의 자화상

23년의 시간이 선물한 비움: 호안 미로의 숙성된 시간을 마주하며

[호안 미로, 자화상]

바르셀로나의 미로 미술관을 다 보고 나오는 길, 매점의 엽서로 된 한 작품 앞에서 발길이 완전히 묶여버렸다. 바로 호안 미로의 <자화상>이다. '그런데 왜 난 전시실에서 이 그림을 못 봤지? 내가 그냥 지나쳤나, 아니면 그 당시에만 걸려 있지 않았나?' 하는 의문과 함께 엽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배경에 정교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오랜 에칭의 흔적들, 그리고 그 위를 아무런 주저함 없이 가로지르는 굵고 검은 선. 이 한 점의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무려 23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가슴속으로 묵직한 울림이 밀려왔다.

이 작품의 하단에는 독특하게도 '1937-1960'이라는 긴 세월의 간극이 적혀 있다. 작가의 생몰연도가 아닌, 오롯이 하나의 캔버스 위에 흐른 시간의 궤적이다. 미로는 스페인 내전의 포화 속에서 절박하게 자신을 응시하며 정밀하게 묘사해 냈던 1937년의 세밀한 자화상 위에, 무려 23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1960년에 이르러서야 그 고집스럽고 복잡했던 과거를 덮어버리듯 아주 거칠고 단순한 검은 선을 덧그려 이 자화상을 완성했다.

23년이라는 시간. 그 긴 세월은 결코 과거와 현재가 치열하게 싸워온 전쟁터가 아니었다. 오히려 밑바닥에 잔잔히 깔린 젊은 날의 고뇌와 복잡한 흔적들 위로,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은은하게 발효된 작가의 '숙성된 시간'이 겹겹이 쌓여 이루어낸 아름다운 화해에 가까웠다.

그림 속 붉은 원으로 둘러싸인 짝짝이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것은 오랜 방랑과 관조 끝에, 마침내 세상의 소음을 걷어내고 본질을 꿰뚫어 보게 된 관찰자의 단단하고도 유연한 시선이었다. 복잡한 배경을 단칼에 정리하듯 얹어진 단순한 기호들과 몇 가지의 원색들은,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깨달음의 불꽃처럼 자유롭게 숨 쉬고 있었다.

젊은 날의 치열했던 흔적들이 밑바닥에서 묵묵히 버텨주고 있기에, 그 위에 그어진 단순한 선 하나가 이토록 당당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리라. 과거의 정교한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품어 안고, 마침내 도달한 단순함의 미학. 청년 미로의 치열함 위에 노년 미로의 자유분방함이 겹쳐진 이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가 평생을 걸쳐 덜어내고자 했던 비움의 여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파이프를 문 남자의 유쾌함에서 시작해 청동 조각의 오묘한 위트를 지나, 마침내 도달한 이 자화상의 묵직한 여백까지. 아등바등 채우려고만 했던 삶의 곁가지들을 다 쳐내고, 진짜 중요한 본질만 남긴 위대한 비움의 미학이 그곳에 있었다.

작품을 한참 바라보며 문득 나 스스로에게 나지막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나 역시 시간이 흐를수록 이 작품처럼 멋지게 숙성되어, 마침내 맑게 비워내고 단순해진 삶을 살 수 있을까?'

비워낸다는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허무가 아니라, 무엇이 진짜 소중한지 알기에 주변의 소음을 스스로 걷어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이다. 내가 지나온, 그리고 지금 지나고 있는 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시간들도 결국 나만의 고유한 빛깔을 만들어가는 숙성의 과정일 것이다.

미로의 저 거침없는 붓질처럼, 언젠가 내 삶도 한결 가벼워지고 명확해지기를. 호안 미로가 던진 질문들은 이번 여정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내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남길 것 같다. 23년의 세월이 건네는 깊은 위로를 품고, 조금 더 단순하고 자유로운 내일을 향해 걸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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