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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 2037 1권 : 발렌시아의 인장
8-1장 푼토의 약속
이사벨라는 직감했다. 세바스티안은 결코 한 여자의 품에만 가둬둘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절정의 순간 그에게서 전해지는 은밀한 떨림은, 그가 언젠가 저 거대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할 운명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세바스티안은 이사벨라를 만날수록 무너져 갔다. 그 확신이 정확히 어디서 비롯된 건지, 이사벨라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와 자신 사이에는 처음부터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었고, 그녀에게는 그 거리가 두려움이 아니라 어떤 예감으로 읽혔다.
사실 그들의 엇갈림은 일 년 전인 2001년, 발렌시아에서 사라고사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빈자리가 많았음에도 홀린 듯 그녀의 옆자리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실례합니다. 혹시 이 자리에 사람이 있나요? 앉아도 될까요?"
"아니요, 없어요. 앉으세요."
세바스티안은 가슴이 뛰는 것을 진정시키며 정중하게 입을 뗐다.
“저는 세바스티안이라고 합니다. 발렌시아 대학교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있어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그쪽도 혹시 학생이신가요?”
“만나서 반가워요. 전 이사벨라라고 해요. 저도 같은 발렌시아 대학교예요. 고고학과라니, 정말 멋지네요! 저는 수학과예요. 몇 학년이에요?”
“1학년이요. 그쪽은요?”
“저도 1학년이에요.”
“아, 그러면 동기네요.”
“그러게요. 그런데 캠퍼스가 달라서 학교에서는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나 봐요.”
세바스티안은 화색을 띠며 자신의 여행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는 사라고사로 가고 있어요. 마침 화요일이 발렌시아의 날이잖아요. 월요일까지 학교가 쉬어서, 평소에 너무 가보고 싶었던 피레네 산맥에 혼자 3박 4일로 다녀오려고요. 사라고사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오르데사 국립공원까지 갈 생각입니다."
"와, 정말요? 사라고사에 가시는군요! 저는 마침 사라고사에 친구가 살아서 그 친구 집에 놀러 가기로 했어요. 친구랑 같이 시내 구경도 하고, 알하페리아 궁전도 보고, 필라르 대성당, 라 세오, 그리고 에브로 강가도 거닐면서 맛집 탐방을 할 계획이에요."
그 말을 들은 세바스티안은 눈을 반짝이며 박물관 방문을 권했다.
"그럼 사라고사에 가시면 박물관에 꼭 들러보세요. 거기 로마 시대 유적인 아우구스투스 두상을 꼭 봐야 해요. 정말 압도적이거든요."
하지만 이사벨라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흐음, 그런 고대 유적이나 돌덩이에는 별로 관심 없어요. 난 그냥 성당과 궁전 정도 구경하고 맛있는 거나 잔뜩 먹을래요."
그러자 세바스티안은 굴하지 않고 엉뚱한 제안을 던졌다.
"아, 그래요? 작년까지만 해도 근처 샤비난에서 파파 루나의 해골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탈취당해서 지금은 볼 수가 없어요. 형제단의 해골 탈취 사건 그것 엄청난 사건이었잖아요. 신문에도 연일 나왔는데. 몰랐어요?"
이사벨라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손사래를 쳤다.
"글쎄요, 처음 듣는 얘기네요. 그리고 난... 그게 아무리 중요해도 해골 같은 건 절대 보고 싶지 않아요. 정말 엉뚱하시네요."
세바스티안은 머쓱해진 것도 잠시, 다시 피레네 산맥에 대해 혼자 흥분하며 말을 쏟아냈다.
"이번에 오르데사 공원에 꼭 들를 거거든요. 거기 말꼬리 폭포가 진짜 절경이라고 하더라고요! 물줄기를 타고 수백 갈래로 쏟아지는데, 꼭 백마들이 떼 지어 갈기를 휘날리며 뛰어내리는 것 같대요. 상상만 해도 소름 돋지 않아요? 아, 근데 사실 제 진짜 목적은 따로 있어요. 글쎄 피레네 깊은 산속에 성배가 수백 년 동안 숨겨져 있었다는 비밀의 수도원이 있대요! 발렌시아 대학교 고고학과 학생이 그걸 직접 눈으로 확인 안 해보면 그게 말이 됩니까?"
혼자서 열을 올리며 신나게 떠들어대는 세바스티안을 보며, 이사벨라는 자기도 모르게 까르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는 새로운 세계를 마주한 아이처럼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와, 정말요? 성배를 숨겼던 수도원이라니... 들을수록 진짜 모험가 같네요. 폭포 이야기도 너무 생생해서 벌써 거기에 가 있는 것 같아요!"
그녀의 따뜻하고 반짝이는 호응에 세바스티안은 더욱 신이 나서 자신이 발굴하고 싶어 하는 유물들과 산악 지형에 대해 열정을 토해냈다.
하지만 반대로, 이사벨라가 좋아하는 철학자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칼 융, 니체 등을 얘기하면서 칼 융의 꿈 얘기라든가 또한 본인은 플라토닉한 사랑을 하고 싶다고 얘기할 때는 뭔 얘긴가 싶어 그저 형식적으로 "아, 그러시군요" 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다 문득 수학의 추상성과 세상의 근원적인 이치, 특히 정수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할 때는 분위기가 더욱 달라졌다.
"세바스티안, 숫자 중에서 가장 이상한 게 뭔지 알아요?"
"뭔데요?"
"소수요.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누어지는 수."
"그게 뭐가 특별해요?"
이사벨라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특별한 건, 소수가 끝없이 이어진다는 거예요. 아무리 큰 수를 찾아도 또 다른 소수가 나타나죠. 수학자들은 소수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 뒤에는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질서가 있다고 믿어요. 그리고 어떤 숫자가 반복되고, 어떤 숫자가 사라지는지 보면 그 안에 이야기가 보여요."
당시 세바스티안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사벨라가 진지한 눈빛으로 수의 비밀에 대해 사유의 깊은 속내를 꺼내놓을 때마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 대화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그녀의 말들은 그에게 찬란한 별빛 같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겉돌기만 했다. 가벼운 인사로 시작된 대화는 때로는 놀라울 만큼 잘 맞았고, 때로는 서로의 언어조차 닿지 않는 평행선을 달렸다. 그런 온도차는 사라고사로 향하는 4시간 내내 이어졌다.
시간이 흘러 캠퍼스에서 재회하고 연인으로 발전했음에도, 그 어긋남은 메워지지 않았다. 이사벨라가 문득 세상의 이치나 수의 비밀을 꺼낼 때마다 세바스티안은 바보처럼 멍해졌다. 그녀의 눈빛은 언제나 지평선 너머를 향하고 있는데, 자신은 그저 그녀의 발치에 머무는 작은 돌멩이조차 되지 못한다는 지독한 자괴감. 자신이 아는 유물과 역사 따위는 그녀의 거대한 사유 앞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무력감이 그를 갉아먹었다.
이사벨라는 그런 그를 볼 때마다 이상한 확신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닿지 못하는 그의 어떤 부분—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폭포와 성배 이야기에 온몸으로 열광하던 그 순진한 열정—이야말로, 자신보다 훨씬 큰 무언가를 향해 뻗어 있는 것이라고. 그녀가 처음 그에게서 느꼈던 그 은밀한 떨림은, 어쩌면 이 어긋남과 같은 자리에서 태어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학업도 친구도 뒷전인 채 이사벨라라는 작은 세계 안으로 침몰해 가던 세바스티안을 살리기 위해, 그녀는 지독한 이별을 결심했다. 이사벨라는 미술관에서 보았던 호아킨 소로야의 대형 그림 속 예수의 빛처럼, 그를 거친 세상으로 밀어 넣어야 했다. 사랑하는 이를 제 손으로 거친 바다로 밀어 넣어야 하는, 가슴 아픈 진수식이었다.
7월의 더운 바람이 부는 날, 도서관 앞 역삼각형 사면체의 푼토(Punto) 조형물 앞에서 그녀는 차갑고 단호하게 이별을 통보했다.
"우리 일 년 뒤 산 후안의 밤, 우리의 추억이 담긴 여기 푼토 조형물 앞에서 만나."
"우리 사랑한 거 아니야? 아니, 난 분명 네가 날 사랑하는 걸 알아. 내 몸이, 내 심장이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헤어지자고? 내가 너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어떻게 이래!"
세바스티안은 절규했지만, 이사벨라는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홀로 남겨진 세바스티안이 푼토 조형물을 멍하니 응시하는 순간, 더운 가로등 불빛 아래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괴물의 뿔처럼 뒤틀려 그의 발목을 낚아채 어둠 속으로 끌고 가듯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머리가 쪼개질 듯한 이명이 솟구치고, 이별 당일 저녁 그는 그 불길한 비명을 견디지 못해 폐관 직전의 발렌시아 미술관으로 달렸다. 정적만이 흐르는 복도를 지나 다시 마주한 호아킨 소로야의 대작. 화면 가득 예수가 설교하며 뿜어내는 압도적인 백색 광채는 푼토 조형물이 드리웠던 지독한 어둠을 막아주는 거대한 장막이자 유일한 안식이었다. 소로야가 박제해 둔 장엄한 빛 앞에서야 그의 호흡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하지만 그날의 안정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이별의 원인을 자신의 무지 탓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추구하던 플라토닉한 사랑과 자신이 갈구하던 육체적 사랑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었고, 칼 융이 말한 꿈과 무의식의 세계 역시 자신에게는 너무 먼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세바스티안에게 꿈은 그저 이사벨라뿐이었다. 그는 도서관 구석 자리에 틀어박혀 철학의 고전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플라톤의 『국가』, 칼 융의 『인간과 상징』과 『기억, 꿈, 사상』, 그리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비극의 탄생』을 파고들었다.
이어 이사벨라가 남긴 잔상을 쫓아 수학 서가에서 낡은 정수론 개론서를 집어 들었다. 책장을 넘기며 소수(Prime Number)의 규칙성과 수들이 얽히고 설킨 거대한 격자 구조를 마주하는 순간, 세바스티안은 벼락을 맞은 듯 멈춰 섰다.
그는 처음으로 숫자를 바라보는 법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소수와 약수, 배수와 나눗셈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가 있었다. 하나의 숫자가 다른 숫자를 설명하고, 또 다른 숫자가 그 관계를 반복해서 드러냈다. 숫자는 단순히 세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남긴 흔적일지도 몰랐다. 그 순간 세바스티안은 버스 안에서 이사벨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떤 숫자가 반복되고, 어떤 숫자가 사라지는지 보면 그 안에 이야기가 보여요."
수학의 공리와 철학의 논리가 하나로 연결되고, 그 끝에서 종교의 문턱까지 닿는 순간 그는 온몸이 전율하는 것을 느꼈다. 푼토가 지면에 드리웠던 기괴한 그림자 역시, 그가 평생 외면해 온 현실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미술관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세바스티안은 일 년 뒤의 약속조차 잊은 채,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미로를 향해 고독한 길로 걸어 나갔다.
#PROJECT2037 #발렌시아 #발렌시아의인장 #푼토의약속 #푼토
댓글
꽃잎 숫자가 소수이라는 말을 들은게 생각이 나네요.
답글삭제'남겨진 나날'의 그 자기합리화에 급급하고 찌질해 보이는 스티븐스를 세바스티안에 투영해 좀더 다듬어 보았습니다. 특히 '남겨진 나날'에서 책 갖고 티격태격하는 씬이 명장인데 여기서는 그것을 오마쥬하여 이사벨라가 얘기한 철학이나 칼 융의 꿈 얘기를 자신의 낮은 지적 능력과 자신의 야망이 작아서 떠나간 것으로 이해하고 철학책과 꿈을 키우기 위해 칼융의 책을 열심히 파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집사로서의 역활을 제대로 하기 위해 농담을 열심히 준비하는 마지막 장면과도 연상되게 했습니다.
삭제많은 꽃잎의 수가 2, 3, 5, 13개 등 소수에 해당하지만, 이는 소수 규칙이 아니라 '피보나치 수열(Fibonacci Sequence)'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피보나치 수열의 앞부분에 소수가 많이 포함되어 있어 생긴 흥미로운 오해라고... 꽃잎이 8개인 것도 많습니다. (예:코스모스)
세바스티안은
삭제"그녀의 말을 오해해서 그녀를 잃었고,
그 오해 때문에 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 엉뚱한 독서 때문에 실제로 성장했으며,
그 성장 끝에 결국 그녀가 말했던 세계에 조금씩 가까워졌습니다."
스티븐스가 켄튼양이 말하는 그 반대말 표현을 미리 알았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을 생각해 봅니다.
"벤이 저한테 청혼했어요. 제가 결혼할지도 몰라요."
-> 진짜 의미는 "당신이 저한테 청혼해 주세요. 당신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그런데 스티븐스의 반응은 "그렇다면 축하드릴 일입니다." 였지. 아우 답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