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권 발렌시아의 인장 : 8-1장 푼토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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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 2037 1권 : 발렌시아의 인장
8-1장 푼토의 약속

이사벨라는 직감했다. 세바스티안은 결코 한 여자의 품에만 가둬둘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절정의 순간 그에게서 전해지는 은밀한 떨림은, 그가 언젠가 저 거대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할 운명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세바스티안은 이사벨라를 만날수록 무너져 갔다. 학업도, 친구도, 미래도 모두 뒷전이었다. 그에게는 이사벨라라는 작은 안식처가 세상의 전부였고, 매일 그 좁은 품 안으로 침몰하며 그녀와의 아슬아슬한 스킨십에만 매달릴 뿐이었다. 이대로 두면 그는 자신이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서 시들어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발렌시아 미술관에서 보았던 호아킨 소로야의 대형 그림을 떠올렸다. 화면 가득 예수가 설교하며 뿜어내던 압도적인 빛과 위엄. 세바스티안 역시 그 그림 속 주인공처럼 세상을 향해 돛을 올리고 나아가야 했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는 지독한 이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사벨라는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가 자신의 진짜 삶을 찾을 때까지 그를 떠나보내기로 결심했다.

6월의 더운 바람이 부는 날, 이사벨라는 도서관 앞 역삼각형 사면체로 이루어진, 그녀의 언어로는 '점'인 그 푼토(Punto) 조형물 앞에서 세바스티안을 만났다. 마지막이 될 줄 모르는 그에게, 그녀는 소로야의 그림 속 빛처럼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이별을 통보했다.

"우리 1년 뒤 산 후안의 밤, 우리의 추억이 담긴 여기 푼토 조형물 앞에서 만나."

세바스티안은 이사벨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절규했다.

"우리 사랑한 거 아니야? 아니, 난 분명 네가 날 사랑하는 걸 알아. 내 몸이, 내 심장이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헤어지자고? 내가 너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어떻게 이래!"

그의 목소리는  바람 속으로 부서져 나갔고, 이사벨라는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를 제 손으로 거친 바다로 밀어 넣어야 하는, 가슴 아픈 진수식이었다.

이사벨라가 떠난 뒤, 홀로 남겨진 세바스티안은 그 푼토 조형물을 멍하니 응시했다. 더운 6월의 가로등 불빛 아래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더 이상 단정한 예술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면을 뚫고 올라온 거대한 짐승의 뿔처럼 뒤틀려 있었고, 세바스티안의 발목을 낚아채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듯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발렌시아대학교의 푼토 조형물]

그림자가 덮쳐오는 순간, 세바스티안의 귓가에는 머리가 쪼개질 듯한 날카로운 이명이 솟구쳐 올랐다. 이사벨라라는 유일한 안식처가 사라지자, 세상의 모든 소음과 가학적인 진동이 여과 없이 그의 뇌리를 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생전 처음 겪는 영적 공포에 사로잡혀 숨을 쉬지 못했다.

세바스티안은 이 불길한 비명을 떨쳐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발렌시아 미술관으로 달렸다. 폐관 직전의 미술관, 정적만이 흐르는 복도를 지나 그는 다시 호아킨 소로야의 대작 앞에 섰다.

화면 가득 빛을 뿜어내는 예수의 형상을 마주하는 순간, 조각상의 그림자가 주었던 기괴한 공포는 거짓말처럼 서서히 잦아들었다. 소로야가 박제해 둔 장엄한 백색 광채는 세상을 구원하려는 거대한 장막이자, 그를 보호해 주는 유일한 안식이었다. 세바스티안은 비로소 깨달았다. 방금 전 자신이 내지른 비명은 나약함 때문이 아니라, 거대한 운명을 맞이하기 위해 영혼이 스스로를 깨뜨리며 내는 진통이었음을.

미술관을 나서는 그의 등 뒤로 차갑고 끈적한 시선이 머물렀지만, 세바스티안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이사벨라가 남긴 1년 뒤의 약속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그것은 영원한 상실이자 끝이었다. 그는 안젤라 수녀가 건네준 낡은 돌 조각을 꽉 쥔 채, 이해할 수 없는 형벌과도 같은 고독한 방랑의 길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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