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동물 :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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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동물 : 개

[프란시스코 고야 - 개]

성경 역사상 가장 경멸받고 부정하게 여겨졌던 동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스러운 눈망울로 우리 곁을 지키는 반려견의 조상, 바로 ‘개(Dog)’입니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친구라 불리는 개가, 사실 성경 속에서는 시체를 홀짝이고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가장 부정하고 탐욕스러운 죄인의 대명사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성경은 이 네발 달린 짐승을 통해 인간의 적나라한 본성을 서늘하게 고발합니다.

열왕기상 21장 23절에서는 악의 대명사였던 이세벨의 최후를 이렇게 예언합니다.

"개들이 이세벨의 성벽 곁에서 그 시체를 먹으리라."

성경 속에서 개는 오늘날의 따뜻한 가족이 아닙니다. 광야의 변두리를 기웃거리며 버려진 피와 오물을 핥고, 거룩한 성문 밖으로 쫓겨난 자들을 뜻하는 차가운 기호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5절 역시 마지막 때의 영적 실상을 경고합니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심지어 잠언 26장 11절과 베드로후서 2장 22절은 인간의 미련함과 죄악의 반복을 개의 습성에 빗대어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개가 그 토했던 것이로 돌아가는 것 같이 미련한 것은 그 미련한 것을 도로 행하느니라."

이처럼 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좋지 않은 것, 부정함과 기만, 그리고 비참함의 대명사였습니다. 이 시선은 인류의 언어와 문화 구석구석에 짙게 투영되어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주리는 개는 주인을 물고, 배부른 개는 도둑을 안 짖는다(A hungry dog bites even its master, and a full dog doesn't bark at a thief)"라며 본능과 욕망에 지배당하는 개의 서늘한 간사함을 경계했습니다. 또한 "죽은 개를 발로 차는 사람은 없다(No one kicks a dead dog)"라며 비열한 인간 본성의 이면을 개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동양의 속담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개 꼬리 삼 년 두어도 황모(黃毛) 못 된다"라는 말처럼 인간 내부의 본원적인 죄성과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음을 고발했고, "죽 쒀서 개 준다"나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처럼 부정한 욕망에 사로잡혀 거룩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인간의 미련함을 꼬집었습니다.

일상의 언어 속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조적으로 뱉어내는 "개 같은 내 인생"이라는 속어 속에는, 거룩함을 상실한 채 오직 생존을 위해 바닥을 기어다니는 인간의 비참함과 처절한 자괴감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처지를 비하할 때 부르는 이름은 언제나 '개'였습니다.

심지어 하늘에서 비가 미친 듯이 퍼붓는 억수 같은 폭우를 두고 서양에서는 "It's raining cats and dogs(개와 고양이가 비처럼 쏟아진다)"라고 표현합니다. 옛 유럽의 위생 사정이 끔찍했던 시절, 폭우가 쏟아지면 길거리에 방치되어 있던 개와 고양이의 시체들이 흙탕물에 휩쓸려 내려오던 기괴하고 서늘한 풍경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을 만큼, '개'는 날씨와 삶의 막장 속에서도 끔찍하고 오컬트적인 기호로 쓰여 왔습니다.

이 부정함의 이면에는 인간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생경하고 기괴한 욕망의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은 기근과 전쟁, 혹은 기묘한 제의의 순간마다 이 충격적인 식용 문화를 공유해 왔습니다.

1870년 봉쇄된 파리의 거리에서는 시민들이 개와 고양이를 도축해 식탁에 올렸고, 고대 로마에서는 '루페르칼리아' 축제나 재앙을 막는 신성한 액막이 제물로 개를 목 졸라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나누는 으스스한 오컬트적 제의를 치렀습니다. 19세기 중반 유럽의 특정 지역에서는 개의 기름이 결핵을 치료하고 악귀를 쫓는 영약으로 암암리에 거래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이한 잔혹함은 멀리 있는 역사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저 역시 삶의 마디마다 이 짐승과 인간이 맺고 있는 기이하고 생경한 경계를 목격하곤 했습니다.

대학 시절, 여름방학 동안 동구릉 근처의 한 보신탕집에서 숙식하며 알바를 했던 한 달 남짓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보신탕집은 여름에 잘되기에 여름에 집중적으로 알바생을 뽑았습니다. 한국에는 '복날'이라는 문화가 있어 특히 복날에 몸보신된다고 알려진 개고기나 삼계탕을 먹는 문화가 있습니다.

보신탕집에는 메뉴판 한쪽에 삼계탕이 적혀 있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 대부분은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개고기 보신탕을 찾았습니다. 어릴 적 집에서 키우던 개로 어머니가 해주신 개고기 요리를 접한 적이 없지 않았으나, 내가 정을 주던 짐승의 뼈와 살이 요리가 되어 내 눈앞에 놓이는 광경은 결코 유쾌한 기억이 아니었습니다.

혈기 왕성하고 늘 허기지던 나이였음에도, 보신탕집 손님들이 개고기 수육을 시켜놓고 손도 대지 않은 채 남기고 떠날 때에도 상을 치우면서 저는 그 고기에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저녁마다 손님상에 나가지 못하고 남은 부스러기 개고기로 알바생을 포함한 직원들을 위한 요리가 자주 나왔는데 그 요리로 끼니를 때우면서, 예전 어릴 적 느꼈던 그 서늘한 경계선 위에 서 있는 듯한 기이한 중압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나 더 끔찍하고 오컬트적인 공포는 훗날 고향 집에서 찾아왔습니다.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결혼한 아내 올리비아와 함께 찾았던 고향 집. 뜰 한쪽 구석에 묶여 있던 개의 목을 본 순간, 저희는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강아지 시절 묶어두었던 목줄을 그대로 방치한 탓에, 자라난 개의 목살을 낡은 줄이 칼날처럼 파고들어 가죽이 두 동강 나 있었습니다.

벌어진 붉은 살점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개는 밥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한 채 먹을 때마다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올리비아는 지금도 그 끔찍하고 기형적인 광경을 잊지 못합니다. 서둘러 헐겁게 줄을 풀어주며 소름이 돋았던 건, 나이가 드셨다지만 매일 밥을 주셨던 어머니조차 짐승의 목이 잘려 나가는 그 기괴한 상태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무감각해진 일상 속에서 생명이 부패하고 찢겨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는 눈, 그것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영적 장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불과 10년 전만 해도 성남 모란시장 같은 곳에서는 철장 속에 갇힌 살아있는 개가 사람들의 손가락 끝에 즉석에서 목숨을 잃고 고기로 환원되곤 했습니다. 오늘날 생존을 위한 생포 및 도축 표지판은 법의 테두리 뒤로 사라졌고, 겉으로는 '흑염소'라는 번듯한 간판으로 간판갈이를 마쳤죠.

그러나 은밀하게 거래되는 철장 너머를 유심히 들여다본 적이 있으십니까? 거짓된 표지판은 속일 수 있어도, 짐승의 신체는 속일 수 없습니다. 땅을 딛고 서 있는 발 형태만 보아도 단번에 명확해집니다. 반으로 갈라진 염소의 날카로운 굽과, 은밀히 숨겨진 개 발바닥의 발톱은 누구나 가려낼 수 있습니다. 눈가림 뒤에 숨겨진 기만과 은폐의 레이어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음습한 경계선 위에 남아 있습니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 <개>를 떠올려 봅니다. 텅 빈 황토색 아득한 허공, 흙더미에 파묻혀 오직 머리만 내민 채 구원을 갈망하듯 위를 향해 눈을 굴리는 저 개는 바로 우리 자신의 초상입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순결하고 무해한 표정을 지은 채 타인을 대하지만, 돌아서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피와 허물을 홀짝이는 성경 속 개의 속성을 그대로 닮아있지는 않습니까? 붉은 살점이 찢겨 나가는 줄도 모른 채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고향 집의 개처럼, 혹은 염소의 탈을 쓰고 거룩한 척 흉내 내지만 발끝에는 거친 욕망의 발톱을 숨긴 모란시장의 은폐된 철장처럼 살아가지 않나요?

스스로의 거짓된 간판을 비워내십시오. 세상이라는 시장판에서 겉모습을 은폐하려 애쓰는 기만을 내려놓고, 나를 직면하게 만드는 설계자의 시선 앞에 가식 없는 본모습을 서늘하게 꺼내놓으시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7장 6절은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라고 경고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세상이 그어놓은 거룩함과 부정함의 경계선 위에서, 마침내 내 안의 숨겨진 욕망과 죄성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썩지 않는 신의 은혜와 진리의 말씀이 찾아와 우리를 가장 거룩한 존재로 온전히 다시 빚어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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