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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테오반고흐]《감자 먹는 사람들》— 붉은 인장과 테오의 눈물
[빈센트 반 고흐 : 감자 먹는 사람들]
1장: 밤의 스케치
1885년 4월 17일 밤, 네덜란드 뉘넨의 차가운 밤공기가 오두막 문틈을 타고 들어왔다.
빈센트는 등불 아래서 굵은 잉크 펜을 쥐고 있었다. 낮 동안 농가에서 매연과 감자 김을 뒤집어쓰며 대형 캔버스에 매달렸던 손마디는 퉁퉁 부어올라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을 신부가 그를 '농가 처녀 고르디나를 임신시킨 색마'라며 낙인찍고, 농민들에게 그의 모델이 되지 말라 엄금한 뒤였다. 세상은 그를 더러운 침입자라 손가락질했으나, 빈센트의 눈에 보인 고르디나와 농부들은 육욕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낸 가장 가난하고도 숭고한 흙빛의 성자들이었다.
빈센트는 편지지 오른쪽 아래에 굵은 선으로 캔버스의 구도를 빠르게 그려 넣기 시작했다. 거친 손으로 감자를 나누는 다섯 사람. 그 왼쪽에는 수십 번이고 그렸던 고르디나의 두건 쓴 모습이 뚜렷하게 자리를 잡았다.
사랑하는 테오에게,
이번에는 네가 보낸 편지에 아주 짧게나마 답장을 보낼 수 있게 되어 다행이구나. 네가 요즘 참 많이 바빴던 것 같네. 바쁜 와중에도 내 생각을 해 주어 고맙다. 그 마음을 나도 잘 이해하고 있어.
날이 이미 많이 늦었다. 하지만 내가 최근에 새로 시작한 농민들의 그림, 즉 '감자 먹는 사람들'의 새로운 습작에 대해 너에게 꼭 다시 이야기하고 싶구나.
보아라, 구도가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나는 이것을 아주 커다란 대형 캔버스에 유화로 그렸단다. 나는 방금 전에도 농가의 집에서 작업을 하다 돌아오는 길이야. 그리고 지금 이 밤, 등불 아래에서 이 편지 속 스케치를 마무리하고 있지. 물론 낮 동안에는 그 커다란 캔버스 위에서 아주 치열하게 매달렸던 그림이란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그림 안에는 진짜 살아있는 무언가, 어떤 생명력이 분명히 담겨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 그림이 완벽하다거나 결점이 전혀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야. 나 자신도 이 작품에 어떤 부족함과 한계가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오, 테오야. 우리 스스로가 가진 단점과 한계, 부족함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하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사람들과 이 그림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 보고 싶구나. 이 '감자 먹는 사람들'의 구상과 크기가 과연 그들에게 어떤 인상을 줄 수 있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 될 거야.
따뜻한 악수를 보내며,
너의 빈센트 (Vincent)
2장: 흙냄새와 대작의 확신
열흘 뒤인 4월 30일, 마침내 캔버스 위에 어두운 브라운과 진흙 빛깔의 유화 물감이 두껍게 얹어졌다. 빈센트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채 다시 펜을 들었다.
사랑하는 테오에게.
네게 보낼 스케치와 함께 몇 가지 말을 덧붙이고 싶구나. 내가 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는 이 사람들을 그리면서, 접시에 내민 그들의 손이야말로 스스로 땅을 판 손이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애썼다는 것을 네가 이해해 주길 바란다.
이 그림은 손노동을, 그리고 그들이 직접 정당하게 번 음식을 표현하고 있단다. 나는 문명화된 사람들이 행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을 말하고 싶었어. 그러니 누군가가 이 그림을 그저 시골 풍경이라거나 그저 그런 화풍으로 보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시골 사람을 그릴 때는 그들에게서 들판의 흙냄새, 베이컨 연기, 감자 김이 나는 듯해야 한다.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지. 농가에 라벤더 향이나 미끈한 도시의 향수가 나는 것은 전혀 시골스럽지 못하니까.
나는 이 그림이 진짜 시골 사람들의 그림이 되기를 바란다. 들판의 일에 익숙한 사람들의 거친 손과 찌든 얼굴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산이다. 문명화된 매끄러운 그림들과는 전혀 다른, 내 영혼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첫 번째 대작(Masterpiece)이 될 거라 확신한다.
내게 아직 물감이 더 필요하구나. 네가 보내줄 물감을 기다리며, 나는 오두막의 어둠 속에서 계속 붓을 잡을 것이다.
3장: 파리에서 날아온 거짓말
파리 부시 가의 작고 어두운 화랑 사무실. 테오는 뉘넨에서 날아온 편지 두 장과 스케치를 펼쳐놓고 멍하니 서 있었다.
고향에서 들려오는 음해와 소문들은 이미 테오의 가슴을 들집어놓은 상태였다. 세상은 형을 '농가 처녀를 탐하고 교회에서 쫓겨난 광인'이라 불렀지만, 스케치 속에 담긴 고르디나의 두건과 농부들의 손은 거룩할 정도로 서럽고 투명했다. 형은 욕망에 굶주린 게 아니었다. 하나님이 지으신 가장 순수한 노동의 영혼에 목말라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차가웠다. 파리의 화려한 귀족들과 컬렉터들은 매끄러운 누드화와 미끈한 인상주의 풍경화만을 찾았다. 칙칙하고 어두운 감자 껍질 색깔의 이 그림을 내미는 순간, 화상들은 "오물 같은 찌꺼기"라며 침을 뱉을 것이 뻔했다.
테오는 입술을 깨물며 펜을 들었다. 그리고 가슴을 쥐어짜며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사랑하는 형 빈센트에게.
형이 보낸 스케치와 편지를 받고 나의 가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깊게 요동쳤어. 램프 불빛 아래서 거친 손으로 감자를 집어 드는 그 농부들의 얼굴에는 파리의 그 어떤 화려한 화랑에서도 볼 수 없는 압도적인 생명력과 숭고함이 들어있더군.
형이 말한 대로야. 이건 틀림없이 형의 영혼이 완성해 낸 첫 번째 대작이야. 아일랜드 오두막의 그 어두운 램프 불빛 속에서 형이 찾아낸 그 숭고한 빛을, 파리의 사람들도 곧 알아보고 감탄하게 될 거라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아.
형의 그림은 세상을 바꾸는 진짜 노동과 삶의 가치를 담고 있어. 파리의 수집가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줄 날이 너무나 기다려진다. 물감과 생활비가 부족하더라도 결코 용기를 잃지 마.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필요한 물감과 돈을 마련해서 보낼 테니까.
형의 그 눈부신 빛은 결코 이 어둠 속에 묻히지 않을 거야. 나를 믿고 그곳에서 오직 그림에만 전념해 줘.
4장: 붉은 인장과 통곡의 기도
편지를 다 쓴 테오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촛불 위에 붉은 밀초를 녹여 떨어뜨린 뒤, 도장을 깊게 눌렀다.
‘툭-’
붉은 인장이 봉투 위에 찍혀 단단하게 굳어지는 순간, 테오는 참았던 숨을 하얗게 토해내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짓말이었다.
베테랑 화상인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거대한 거짓말. 단 한 명의 소장가에게도 보여줄 용기가 없는 그림.
‘우리 스스로가 가진 단점과 한계, 부족함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
형이 밤늦게 스케치를 밀어 넣으며 적었던 그 편지 구절이 테오의 귓가를 환청처럼 때렸다. 형은 온 동네의 비웃음과 스캔들 속에서도 영혼을 쥐어짜 내어 대작을 만들었다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형에게 거짓 위로나 던지는 비겁한 화상일 뿐이었다.
테오는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자갈처럼 굴러떨어졌다.
"하나님..."
테오는 어두운 골방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사랑하는 형에게 감당할 수 없는 거짓 희망을 적어 보낸 자신이 너무나 가증스럽고 죄스러웠다.
"하나님... 저를 용서하십시오. 오늘도 형에게 거짓을 적어 보냈습니다. 팔리지도 않을 그림을 향해 대작이라 거짓 찬사를 보내고, 세상이 외면할 빛이라 거짓 위로를 건넸습니다."
테오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차가운 바닥에 이마를 짓찧었다.
"하나님... 그러나 저의 이 가증스러운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제발 제가 적어 보낸 이 거짓말 같은 편지대로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
제가 보낸 이 거친 거짓말이, 먼 훗날 정말로 사실이 되게 해주십시오. 제 형 빈센트가 저 어두운 오두막에서 손가락 마디가 터져라 그려낸 그 거친 손들이... 정말로 세상을 구원하는 위대한 빛이 되게 해주십시오."
테오는 바닥에 엎드린 채 하나님을 향해 오열했다.
"세상이 형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더러운 오명을 씌운다면, 그 모든 비웃음과 모욕은 제가 다 받겠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낮고 비굴한 을이 되어 그 독화살을 다 맞을 테니... 제발 형의 영혼만큼은 저 램프 불빛처럼 거룩하게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밤이 깊어 가도록, 파리의 작은 골방에서는 형의 편지를 가슴에 품은 동생의 통곡과 기도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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