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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 라이프] 수수께끼 가득한 돌의 요새, 보카이렌트
이번에 소개할 곳은 스페인의 작은 마을, 보카이렌트입니다. 이곳은 독특한 역사와 풍경으로 가득한 곳인데요, 특히 거대한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 유적인 '무어인의 동굴(Covetes dels Moros)'로 유명합니다. 보카이렌트의 대표 명소인 이곳은 현지인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오랫동안 미스터리로 남아있던 독특한 공간입니다. 아들이 추천해 준 이곳을 방문하면서, 저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이 동굴은 10세기~11세기 무렵 안달루스(이슬람 스페인) 시대에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베르베르족(Berber) 출신의 이슬람 농민 공동체가 조성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제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바위산에 뚫려 있는 수많은 구멍이었습니다. 무언가를 보관하거나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동굴 입구들이 절벽 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입출구는 단 두 곳뿐입니다.
동굴 내부로 들어가 보니, 좁고 복잡한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옆이나 위아래로 이동하려면 몸을 숙여 기어 다녀야 할 정도로 협소하고 다채로운 구조였죠.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구조가 거대한 돌을 하나하나 손으로 깎아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옛 사람들의 엄청난 노력과 집념이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동굴 내부를 탐험하다 보니 벽면에 새겨진 십자가 모양의 각인도 볼 수 있었습니다. 무어인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도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들은 과연 크리스천이었을까요? 아니면 후대의 사람들이 만든 흔적일까요?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가장 큰 의문은 바로 이렇게 접근하기 불편한 곳을 왜 만들어 두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살기에는 너무나 협소하고 복잡한 구조입니다. 중간 위층에 있는 동굴은 여러 집을 거치고 거쳐, 좁은 통로를 힘겹게 기어 올라가야만 접근할 수 있어 도저히 평상시 주거 공간으로는 보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내부에서 불을 피우는 것도 곤란하고, 물과 음식은 어차피 외부에서 따로 구해 와야 합니다. 실제 내부에 들어가 보니 매연이나 불을 피운 흔적이 없이 매우 깨끗했습니다.
식량 저장용으로 보기에도, 가장 안쪽 큰 동굴에 저장고 3개가 마련된 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너무 작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각 실마다 동일한 규격의 창을 설치한 것을 보면 단순 식량 보관을 넘어 비상시 사람이 피신하기 위한 용도 같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전쟁을 대비한 비상 식량 저장고 겸 대피소였을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커다란 공간 한두 개를 만들면 될 것을, 왜 굳이 몇 사람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공간을 수십 개나 나란히 만들었을까요? 참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동굴이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동굴의 구조와 역사에 대해 조금 더 찾아보니 비로소 궁금증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본래 이 동굴은 처음부터 내부가 서로 연결된 복잡한 미로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초기에는 각 창문(방)들이 독립된 형태였으며, 마을의 각 가구마다 개별 창고를 하나씩 할당받아 사용했습니다. 창문 틀에는 문을 달았던 홈이 남아 있고, 절벽 위에서 밧줄을 타고 오르내리며 물건을 넣고 뺐다고 합니다.
중세의 혼란스러웠던 시기, 외부의 약탈로부터 소중한 곡물과 식량을 지켜내기 위한 지혜로운 방어 수단이었던 셈입니다. 지금처럼 기어 다녀야 하는 복잡한 내부 통로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전쟁이나 비상 상황 시 사람들이 서로 이동하며 피신할 수 있도록 벽을 뚫어 연결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벽면에 새겨진 십자가 음각은 이슬람교도였던 무어인들이 정복당하거나 쫓겨난 이후, 13세기 재정복 운동(레콘키스타)을 통해 들어온 기독교인들이 이 공간을 점유하고 재활용하면서 남긴 흔적이었습니다.
보카이렌트는 세월의 흔적과 인간의 생존 지혜가 공존하는 매력적인 장소입니다. 좁은 동굴 속을 직접 기어 다니며 과거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 볼 수 있었고, 거대한 암벽을 손으로 파내어 만든 정성에 절로 감탄이 나왔습니다.
스페인 여행을 계획 중이시라면, 이 고요하고 수수께끼로 가득한 보카이렌트의 동굴을 꼭 한번 방문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옛 사람들이 돌 속에 숨겨둔 깊은 이야기를 직접 느껴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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