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2037 1권 : 녹슨 비석의 고백, 견디는 자가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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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 2037 1권 : 발렌시아의 인장

녹슨 비석의 고백, 견디는 자가 이긴다

[[좌] 과거 프랑코 독재 시절의 기념비 / [우] 과거 기념비를 개조한 사군토 공원의 현 기념비]

사군토의 이름 없는 공원 한복판, 세바스티안은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앞에 멈춰 섰다. 주변의 평화로운 녹음과 어울리지 않는 그 기괴한 거대함은 과거 이 땅을 짓누르던 승리자들의 기념비가 남긴 흉터였다.

세바스티안의 눈은 비석의 거친 단면을 훑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그 중심에는 독재자 프랑코의 오만한 얼굴과 다섯 개의 화살을 옥죄는 강철 멍에가 군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육체를 가학적 소음 속에 가두고, 복종만을 강요하는 압제의 주파수를 내뿜던 인장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그 가학적인 형상을 거칠게 깎아냈다. 독수리의 발톱이 머물던 자리는 정에 정수리를 찍힌 듯 파헤쳐졌고, 프랑코의 얼굴이 있던 자리에는 차가운 무명의 철판이 덧대어졌다. 하지만 그 철판조차 완전한 침묵은 아니었다. 비석 하단에는 마치 참회하는 거인의 눈물처럼 붉은 녹물이 지저분한 궤적을 그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과거의 오만했던 권위가 시간의 부식 아래 녹아내려, 현재의 진실한 슬픔과 뒤섞인 채 흐르는 역사의 진액이었다.

세바스티안은 그 녹물 섞인 눈물을 보며, 사군토의 수학 선생님 디에고 페냐스를 떠올렸다. 이념의 화살이 난무하고 억압의 멍에가 어깨를 짓누르던 시절, 그는 이 이름 없는 공원의 침묵처럼 묵묵히 학생들의 곁을 지켰다. 토요일 밤의 재시험과 전화기 너머의 나지막한 음성. 그는 거창한 기념비 대신 제자의 가슴 속에 이해라는 이름의 인장을 남긴 스승이었다.

그 스승의 기억은 자연스레 첫사랑 이사벨라의 잔상으로 이어졌다. 모든 방랑의 시작점이었던 그녀와의 기억 또한, 이 비석처럼 시간의 정에 깎여나가고 녹물 같은 그리움을 흘리고 있었다. 스승이 가르쳐준 수학의 수식들이 세상의 소음을 정제하는 법이었다면, 이사벨라가 남긴 사랑의 파동은 그 정제된 침묵 속에 흐르는 유일한 선율이었다.

비석의 차가운 철판 위, 음각으로 깊게 새겨진 후안 네그린의 단 한 문장이 세바스티안의 심장을 깊숙이 찔렀다.

“Resistir es vencer (견디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세바스티안은 손끝에 닿는 차가운 철판의 감촉을 느끼며 올리비아를 향해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올리비아, 한때 공포를 각인했던 저 흉측한 얼굴을 깎아낸 자리에서, 이제는 붉은 녹물이 눈물처럼 흐르고 있소. 그 지저분한 흔적이 역설적이게도 나에게는 세상을 정화하는 가장 낮은 주파수로 들리는구려. 저 거대한 돌덩어리조차 스스로의 이름을 지워내며 견뎌내고 있는데, 고작 현장의 소음 따위가 어찌 나의 방주를 흔들 수 있겠소."

공원의 정적을 깨고 들려온 것은 가죽 구두의 차가운 발소리였다. 세바스티안은 비석의 녹슨 철판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짙은 회색 수트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이 공원과 어울리지 않는 정제된 악취, 즉 권력의 소음을 풍기고 있었다.

"아직도 이런 버려진 돌덩어리에서 답을 찾으려 하는 건가, 세바스티안?"

남자의 목소리는 금속성 불협화음처럼 공기의 파동을 찢으며 다가왔다. 그는 비석에 새겨진 문구를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았다.

"Resistir? 견디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그건 패배자들이 자위하며 내뱉는 비겁한 변명일 뿐이야. 진짜 승리는 견디는 게 아니라 짓밟고 올라서는 것이지. 이 비석의 원래 주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세바스티안의 눈이 비석의 깎여나간 단면을 향했다. 정으로 파헤쳐진 독수리의 발톱 자국, 그리고 그 위를 덮은 투박한 철판. 남자는 그 흔적들을 조롱하듯 말을 이었다.

"이 비석이 왜 이토록 거대한지 아나? 이건 공포의 크기야. 사람들을 한꺼번에 묶어버리는 저 멍에와 화살의 무게였다고. 그런데 자네들은 그 위대한 얼굴을 깎아내고 고작 이런 초라한 문장을 박아 넣었지. 이건 역사가 아니라 수치야."

세바스티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남자가 내뿜는 소음을 압도하는 단단한 주파수를 머금고 있었다.

"당신은 이 비석 아래로 흐르는 녹물을 보지 못하는군. 이건 당신들이 찬양하던 그 '위대한 얼굴'이 녹아내린 눈물이야. 억압의 인장을 깎아낸 자리에서 비로소 인간의 언어가 시작된 거지."

세바스티안의 머릿속에 디에고 페냐스 선생님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1980년, 시의회에서 모두가 눈치를 보던 시절에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향한 동의안을 던졌던 그 단호한 용기. 학생들이 수학을 포기하지 않도록 토요일 밤까지 전화를 붙들고 있던 그 끈질긴 인내. 그것은 남자가 말하는 '짓밟는 승리'보다 훨씬 더 강한 '견딤의 승리'였다.

"당신들이 멍에와 화살로 사람들을 묶을 때, 디에고 선생님은 수학이라는 수식으로 우리를 해방시켰소. 당신들이 화살을 쏠 때, 그는 전화기 너머로 우리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불렀지. 그게 바로 당신들이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진짜 인장이오."

세바스티안은 비석의 문구를 손바닥으로 힘껏 눌렀다. 차가운 철판의 냉기가 심장까지 전달되었다.

"이 공원이 이름 없는 이유를 이제 알겠군. 이름조차 필요 없는 가장 밑바닥의 진실이 이곳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야. 당신의 그 화려한 수트보다, 이 비석에서 흐르는 지저분한 녹물이 나에게는 훨씬 더 거룩하게 들리오."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주변을 감싸던 가학적인 소음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바스티안은 더 이상 그를 보지 않았다. 비석의 거친 질감을 느끼며, 그는 이사벨라의 아련한 파동과 올리비아의 기도가 이 녹슨 철판 위에서 하나의 방주로 완성되고 있음을 확신했다.

폭군의 기념비는 이제 더 이상 군림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오늘을 견디는 자들만이 올라탈 수 있는, 가장 단단하고 고요한 방주였다.

남자가 내뿜던 불협화음이 사라진 공원에는 다시금 적막한 주파수가 흘렀다. 세바스티안은 비석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돌려 바로 옆에 우뚝 솟은 거대한 강철 구조물을 올려다보았다. 사군토의 번영을 이끌었던, 그러나 이제는 텅 빈 가슴으로 바닷바람을 맞고 있는 옛 용광로였다.

한때 쇳물을 끓여내던 그 뜨거운 심장은 멈췄지만, 녹슨 외벽은 저무는 태양빛을 받아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세바스티안은 그 기괴하고도 숭고한 산업의 유산 곁을 천천히 걸어 해안가로 향했다.

용광로의 거대한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바다에 닿을 무렵, 지평선 너머로 사군토의 노을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석 하단에 흐르던 녹물보다 더 진하고, 이사벨라의 첫사랑보다 더 뜨거운 선혈 같은 빛이었다.

세바스티안은 용광로의 차가운 철골에 몸을 기대고 수평선을 응시했다. 거대한 용광로가 철을 녹여 세상을 지탱하는 골조를 만들었듯, 디에고 선생님은 헌신이라는 열기로 제자들의 뼈대를 세웠고, 이사벨라는 기억이라는 불꽃으로 그의 영혼을 단련시켰다.

"결국 모든 것은 녹아내리고, 오직 견디는 것만이 형상을 갖추는 법이지."

그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가볍게 쥐었다. 이제 올리비아에게 보내는 기도는 전파를 타지 않아도 좋았다. 침묵 속에 타오르는 저 노을 자체가 이미 그녀에게 닿는 가장 선명한 주파수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옛 용광로의 녹슨 틈 사이로 소금기 섞인 지중해의 바람이 불어와 비파 소리 같은 울림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가학적인 소음이 정화되어 흐르는 낮은 공명이었다. 세바스티안은 그 소리에 실려오는 안식의 파동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폭군의 찬양비는 추모비가 되었고, 불을 뿜던 용광로는 고요한 망루가 되었다. 그리고 그 곁에 선 세바스티안은 이제 이름 없는 공원의 유령이 아닌, 자신의 방주를 이끌고 침묵의 바다를 건너는 항해사가 되어 있었다.

붉게 물든 바다 위로 사군토의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견디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눈부신 어둠이었다.

세바스티안은 거대한 용광로(Horno)의 그림자를 뒤로하고, 고소한 밀가루 냄새에 이끌려 좁은 골목길의 낡은 화덕 빵집(Horno) 문을 열었다. 문에 달린 작은 종소리는 가학적인 소음이 아닌, 공기의 입자를 부드럽게 매만지는 청아한 파동으로 그의 귓가를 울렸다.

그는 갓 구워져 나온 투박한 빵 한 덩이를 손에 쥐었다. 화덕의 열기를 머금은 빵의 온기는 비석의 차가운 철판에 얼어붙었던 그의 손가락 끝을 천천히 녹여내기 시작했다.

바삭한 빵 껍질을 뜯어낼 때 나는 소리는 마치 이사벨라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바스러지는 소리 같았다. 그는 입안 가득 퍼지는 담백한 풍미 속에서, 한때 불꽃 같았던 첫사랑의 갈증이 비로소 평온한 갈색 소음으로 정제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빵의 부드러운 속살을 보며 올리비아를 떠올렸다. 환상에서 깨어나 마주할 최종적인 현실인 그녀는, 이 빵처럼 소박하지만 생명을 지탱하는 가장 확실한 존재였다.

"올리비아, 이 빵의 온기가 당신의 기도처럼 나를 채우고 있소."

그는 전파 없는 기도를 빵 한 조각에 실어 보냈다.

빵을 씹어 삼키는 행위는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그릇인 자신의 육체에 새로운 주파수를 각인하는 거룩한 의식과도 같았다. 사군토의 비석이 녹물을 흘리며 견뎌냈듯, 이 빵 또한 뜨거운 화덕의 고통을 견뎌내고 비로소 누군가를 살리는 생명의 방주가 된 것이다.

세바스티안은 빵집(Horno)을 나서며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거대한 기념비나 압도적인 권력이 아니라, 오늘을 견디며 구워낸 따뜻한 빵 한 조각과 그 안에 깃든 진실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 💡 작가의 노트 & 배경 해설 ]

  • 사군토(Sagunto) 공원의 비석: 스페인 발렌시아 주 사군토에 실제로 위치한 이 비석은 과거 독재자 프랑코의 얼굴과 독재 정권의 상징(멍에와 화살)이 크게 조각되어 있던 거대 기념비였습니다. 민주화 이후, 사군토 시민들과 시의회는 이 억압의 부조를 깎아내고 그 위에 무명의 철판을 덮어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국 총리였던 후안 네그린(Juan Negrín)의 명언을 새겨 넣었습니다.

  • "Resistir es vencer (견디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독재 시대를 견뎌낸 한국의 역사처럼, 스페인 민중들에게도 억압의 시대를 버티어낸 숭고한 정신을 상징하는 문장입니다.

  • 디에고 페냐스(Diego Peñas) 선생님: 1980년 프랑코 사후 엄혹했던 시절, 사군토 시의회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첫 동의안을 던졌던 용기 있는 인물이자 실제 수학 교사입니다. 거창한 권력의 인장 대신, 토요일 밤까지 제자들을 챙기며 묵묵히 자리를 지켰던 스승의 헌신이야말로 이 장에서 말하는 '견디는 자의 진짜 인장'을 상징합니다.

  • Horno (용광로 & 화덕 빵집): 스페인어로 'Horno'는 빵을 구워내는 '화덕'인 동시에, 사군토 해안가에 보존된 옛 산업 유산인 '용광로(Horno Alto)'를 뜻합니다. 거대한 쇳물을 녹여내던 압도적인 용광로(Horno)에서 골목길 소박한 화덕 빵집(Horno)으로 이어지는 여정은, 거대한 권력의 기념비와 대비되는 민중의 삶과 생명력, 그리고 참된 구원의 온기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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