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2037 1권 : 사군토 양잠 농부들의 혀의 계약

#사군토 #비단 #양잠 #누에 #고치집 #혀의계약 

PROJECT 2037 1권 : 발렌시아의 인장
사군토 양잠 농부들의 혀의 계약


[디에고 벨라스케스 - 실 자아내는 여인들]

발렌시아 라 론하 데 라 세다(La Lonja de la Seda)에서 거래되는 비단은 스페인 전역에서 흘러들어왔으나, 그중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것은 사군토의 뽕잎을 먹고 자란 누에가 뽑아낸 특별한 비단이었다. 그 비단이 유독 눈부신 광채와 묵직한 공명을 가졌던 이유는 사군토의 붉은 토양 속에 감춰진 성배의 비밀 때문이었다.

사군토의 붉은 토양은 철분과 광물 결정이 밀도 높게 자리를 잡은 핏빛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 붉은 흙이라고 해서 아무 데서나 파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직 과거 선조 세바스티안이 파괴했던 사군토 용광로 근처의 흙만이 특유의 영적 주파수와 고밀도의 철분 결정을 품고 있었다. 거대한 용광로가 불타오르고 파괴되며 지각 깊은 곳의 광물과 융합했던 그 아주 작은 구역. 바로 그 용광로 폐허 근처의 구체적인 매장 위치야말로 사군토 가문이 목숨을 걸고 수호해 온 최고 중의 최고 비밀이었다. 그 흙에 뿌리를 내린 뽕나무만이 서늘할 정도로 진녹색 잎을 피워냈다.

양잠은 수공의 극단을 요구하는 고된 노동이었다. 알에서 깨어난 누에가 허물을 벗고 탈피를 거듭할수록, 농부들의 손길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특히 고치를 틀기 직전 마지막 잠을 자고 난 누에들은 가히 폭식이라 부를 만큼 엄청난 양의 뽕잎을 먹어 치웠다. 사군토 용광로 근처의 비밀스러운 흙을 먹고 자란 뽕나무밭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무거운 짐을 지어 나르는 과정에서 농부들의 어깨와 손바닥은 갈라지고 부르텄다.

누에가 뽕잎을 다 먹고 투명한 노란빛으로 몸 색깔이 변해가면, 비로소 고치를 틀 때가 왔음을 의미했다. 농부들은 몸이 번지르르하게 바뀐 누에들을 손으로 하나하나 집어 들었다. 단 한 마리도 상하지 않도록 지극정성으로 가려내어, 나무로 짠 칸칸의 고치집(누에섶)에 일일이 제자리를 잡아 넣어주었다. 손끝에 전달되는 미세한 생명의 요동을 수천, 수만 번씩 확인하는 노동이었다.

농부들이 지켜온 가문의 극비는 용광로 근처 흙의 위치뿐만 아니라, '그 붉은 흙을 뽕나무 뿌리 근처 어디에다 뿌릴지, 또 언제까지 뿌리고 언제 거두어낼 것인가' 하는 토양의 타이밍 제어에도 있었다.

누에가 뽕잎을 먹고 자라는 기간 동안, 오직 정해진 임계점까지만 용광로 근처의 붉은 흙을 뽕나무 밑둥에 뿌리고 딱 거두어내야 했다. 흙을 한 줌이라도 더 뿌리면 철분에 중독된 누에가 사멸했고, 단 하루라도 일찍 거두면 고치 속 세리신(Sericin)이 주파수를 담아내지 못한 채 바스라졌다. 용광로 폐허의 위치와 이 거두어냄의 날짜는 오직 가문의 수장과 장인들만이 입에서 입으로 전수하는 비밀이었다. 절대로 글로 적어 남겨서는 안 되는, 기록조차 존재하지 않는 비밀이었다.

누에가 제 몸 안의 액체를 짜내어 고치를 완성하면 14일간의 치밀한 공정이 시작되었다.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고치를 넣으면, 세리신이 녹아내리며 물이 붉게 물들었다. 농부들은 끓는 물 위로 떠오른 실꼬리를 솔로 조심스럽게 건져 올려, 손끝으로 실 한 가닥 한 가닥을 집어 들었다. 실이 끊어지지 않도록 섬세하게 감아 물레의 물레살에 걸어주는 과정은 밤을 지새우며 이어졌다. 수천 번 물레질을 돌리는 동안, 가마솥 바닥에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준 번데기들이 남았다.

농부들은 가마솥에서 건져낸 번데기를 껍질 하나 버리지 않고 받아먹었다. 수천 번의 물레질 끝에 남은 이 번데기를 나누는 것은 단순한 허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제 몸을 녹여 비단을 내어준 미물의 희생에 화답하고, 그 세리신의 결정을 몸 안에 채우는 그들만의 거룩한 성찬이었다.

발렌시아 라 론하 데 라 세다에서 사군토의 비단은 다른 지역 비단보다 수배나 뛰어넘는 높은 값에 거래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희소성 때문이 아니었다. 사군토의 붉은 세리신으로 완성된 비단만이 성배가 뿜어내는 거대한 주파수를 제어하고 차단할 수 있는 유일한 물리적 결계였기 때문이다. 특히 성배의 주파수 노출을 두려워하던 황금눈의 후예들은 이 사군토 비단이 없으면 황금눈이 발현되어 자신들의 정체가 즉시 탄로 났기에, 언제나 이 비단으로 된 옷을 갑옷처럼 입고 다니며 사군토 비단을 독점하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공정이 완성되는 날, 장인들은 가마솥에서 추출한 붉은 세리신 앞에 끌려나와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어야 했다. 발렌시아를 통치하던 왕의 집행관과 라 론하 데 라 세다의 대표, 그리고 그 뒤에 숨은 황금눈의 후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농부들은 살아남기 위해 매년 피로써 그 강압적인 계약을 갱신했다.

용광로 근처 흙의 위치와 거두어냄의 타이밍을 독점하려는 권력자들 앞에서, 농부들은 손가락 피로 작성된 혈서 위에 지배층이 요구하는 처절한 조항을 매년 써 내려가야만 했다.

"만일 사군토 용광로 폐허의 위치와 흙을 거두는 날짜의 비밀을 외부에 누설할 시, 왕국의 율법에 따라 그 즉시 혀를 잘리는 형벌을 받고 영원한 침묵에 처해질 것임을 맹세하나이다."

권력과 자본의 폭압 앞에 스스로 '혀의 빗장'을 걸고, 비밀을 입에 담는 순간 혀를 빼앗기겠다는 비극적인 혈약을 매년 피로써 갱신한 것이다. 사사로운 탐욕의 언어를 뱉지 못하도록 혀를 저당 잡힌 농부들은, 부정한 권력의 소리에 물들지 않겠다는 맹세를 세리신처럼 단단하게 굳힌 채 어두운 침묵 속에서 남들이 버리는 번데기를 성찬으로 나누며 수백 년간 견뎌왔다.

발렌시아 미술관의 어두운 서고, 오래된 사군토 가문의 양잠 기록화와 희미하게 바랜 혈서 사본을 마주한 세바스티안은 그 정교하고도 처절한 공정의 기록, 그리고 권력이 강요한 핏빛 계약의 역사 앞에서 숨을 죽였다.

선조 세바스티안이 파괴했던 용광로 폐허 아래 숨겨진 붉은 흙의 비밀, 뽕잎을 나르던 농부들의 부르튼 손, 하나하나 고치집에 누에를 넣던 지극한 정성, 끓는 물에서 실꼬리를 손으로 집어 물레에 걸던 밤샘의 노고, 황금눈의 후예들이 감추고자 했던 결계의 비밀, 그리고 누설할 경우 혀를 잘라내겠다며 왕과 거상들에게 매년 피로써 혀를 저당 잡혀야 했던 장인들의 비극적인 침묵.

기록의 마지막 장을 넘기던 세바스티안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올려 자신의 입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그리고 입안 깊은 곳에 가만히 자리 잡고 있는 혀를 천천히 만져보았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