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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 2037 1권 : 발렌시아의 인장
1권 제 장: 에릭 폰테스 교수의 보스 지옥도 해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 지옥도 중 상단 잘린 귀와 칼 부분]
프라도 미술관 제56A 전시실의 어둠은 묵직했다. 스캐닝 작업을 마친 에릭 폰테스 교수는 곁에 선 세바스티안의 어깨를 짚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삼면화인 쾌락의 정원 중 일부인 오른쪽 패널, 잔혹하고도 기괴한 ‘지옥도’의 중심부로 향했다.
“세바스티안, 보스가 500년 전에 이 캔버스에 짓눌러 담은 것은 단순한 종교적 상상력이 아니네. 이것은 역사적 비극의 재현이자, 말씀이 사라진 인간 육체가 맞이할 궁극의 종말이지.”
에릭 교수의 손가락이 그림의 최상단, 화염과 연기로 자욱한 어둠 속을 가리켰다.
“보게. 이 붉게 타오르는 잿더미와 무너져 내리는 성벽을. 이것은 기원전 219년, 카르타고의 한니발에 맞서 끝까지 항전했던 로마의 동맹 도시 사군툼(Saguntum)의 성채라네. 항복 대신 전원 자살을 택했던 사군툼의 마지막 밤, 사람들은 서로의 목을 베고 스스로 용광로에 몸을 던졌지. 피비린내와 살점 타는 냄새가 진동하던 그 지옥을 보스는 그대로 그려 넣었어. 가고일들이 사군툼의 붉은 열기 속에서 성배를 해체할 때, 인류의 의지와 신념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를 말이야.”
교수의 시선은 곧이어 그림 중간에 위치한, 거대한 칼날과 잘린 귀의 형상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이 귀와 칼을 보게나. 칼날에 톱니처럼 이빨이 나가 있지? 이것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야. 비명을 자르는 도구지. 칼날 표면에 새겨진 검은 인장이 보이는가? 엉덩이를 형상화한 모습인 동시에, 신의 영역을 찬탈하고 스스로를 높이고자 악마가 스스로를 부르는 'AO', 즉 가짜 오메가를 뜻한다네. 신성한 질서를 뒤엎으려는 오만의 표식이자, 바로 아래쪽에 적힌 '엉덩이 악보'의 연주 지시서이기도 하지. 음악 용어로 스트리덴테(Stridente), 즉 ‘귀를 찢듯이 날카롭게’ 연주하라는 뜻이라네.”
에릭 교수는 태블릿의 공명 시뮬레이터를 켜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평화의 기준음은 A4 = 440Hz일세. 하지만 보스가 가고일의 환청을 기록한 이 악보의 기준음을 600Hz로 끌어올리면 어떻게 될까? 조율 한계를 초과한 악기들은 비명을 지르고, 들려오는 소리는 음악이 아니라 뇌수를 파괴하는 가학적인 소음이 되지. 이빨 나간 칼로 귀를 천천히 베어내는 것 같은 600Hz의 공명…… 그것이 바로 영혼을 옥죄는 가고일의 주파수라네.”
두 사람의 눈동자가 지옥도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기괴한 ‘나무 거인’에 도달했다. 썩어가는 계란형 몸통, 기둥처럼 박힌 앙상한 나무 줄기 다리, 그리고 기묘하게 고개를 돌려 관람객을 노려보는 서늘한 얼굴.
“세바스티안, 자네는 이 나무 거인이 무엇으로 보이는가? 알맹이는 텅 비어 있고, 오직 썩은 껍데기만 남아 배를 띄우고 있지.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경계해야 할 신인류의 비극일세. 인간의 육체는 본래 하나님의 말씀, 즉 거룩한 주파수를 담는 그릇이어야 하네. 하지만 그 주파수를 잃어버리고 탐욕과 소음으로 채워진 육체는 그저 껍데기만 남은 나무 거인에 불과하지. 영혼이 빠져나간 자리를 가고일의 소음이 채울 때, 인간은 그저 걸어 다니는 지옥이 되는 것이야.”
이어 교수의 손가락은 지옥도의 악기 고문실을 하나씩 훑어 내려갔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 지옥도 중 하단 엉덩이 악보 부분]
“거대한 하프 줄에 온몸이 꼬여 매달린 자, 류트의 울림통 아래 눌려 진동에 뼈가 부서지는 자를 보게. 신을 찬양해야 할 거룩한 악기들이, 600Hz의 가학적 소음과 결합하는 순간 영원한 형벌의 틀로 변해버렸어. 그 옆의 긴 트럼펫 나팔관 속으로 밀려 들어간 자와 거대한 북 속에서 채찍질당하는 자 역시 마찬가지네. 그들은 소음의 파동 속에서 영원히 비명을 지르고 있지.”
그림 하단, 황금빛 왕관을 쓰고 새의 형상을 한 악마가 기다란 의자에 앉아 인간을 삼키고 배설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 지옥도 중 하단 황금똥 배설 부분]
“그리고 이 황금 동전과 부정한 배설의 구덩이를 자세히 보게나. 왕관을 쓴 새 악마에게 삼켜졌다 똥으로 싸여 떨어지는 자 옆에, 허리를 숙이고 엉덩이로 황금 동전을 쏟아내는 자가 있지. 인간이 신성한 황금비(Golden Ratio)의 질서를 버리고 물질적 욕망을 절대 가치로 삼을 때, 그 욕망의 결말은 결국 부정한 배설물로 전락한다는 경고라네.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그 주변의 인간들이라네. 저기 푸르스름한 기괴한 알(Egg) 속에서 껍질을 깨고 나오는 사람을 보게. 신성한 말씀의 그릇으로 태어나야 할 생명이, 가고일의 악취 나는 배설 구덩이 한가운데서 변질된 채 기괴하게 태어나고 있어. 신인류라는 이름으로 변종되어 생성되는 타락의 탄생이지.
그 옆에서 수도건을 쓴 악마에게 머리를 잡힌 채 구덩이 속으로 핏빛 구역질을 해대는 자는 또 어떤가? 탐욕과 대식(Gluttony), 그리고 가학적 소음을 과도하게 섭취한 영혼이 자신의 죄악을 감당하지 못하고 영원히 오물을 토해내는 형벌이라네. 그 바로 밑, 수녀의 베일을 쓴 돼지 악마가 사내에게 서명을 강요하는 모습은 거룩함을 위장한 위선의 극치이지.”
에릭 교수의 스캐너 빛이 그 옆, 둥근 투구를 쓴 목조 형상과 그 앞에 누워 있는 나체 여인의 윤곽을 선명하게 비추었다. 여인은 눈을 감은 채, 자신의 가슴과 배를 감싸 쥔 기괴한 덤불 가지의 촉각에 온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저 여인의 표정을 보게. 도덕도, 신앙도, 영혼의 지조도 모두 던져버린 채 기괴한 나무 악마의 말라붙은 손길에 신음하며 쾌락의 황홀경에 빠져 있지. 가슴 위에는 타락과 감염을 상징하는 검은 두꺼비가 눌러앉아 그녀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데도 말일세. 거룩한 말씀이라는 신성한 울림을 잃어버린 육체는, 지극히 기괴하고 엽기적인 자극조차 도피성 쾌락으로 착각하게 되네. 탐욕과 음란에 중독된 인간은 저 목조 괴물의 차가운 가지가 자신의 혈관과 신경을 갉아먹는 줄도 모른 채 스스로 몸을 내던지는 걸세.”
에릭 교수는 시선을 하단 좌측의 주사위판과 섬뜩한 악마의 형상으로 이동시켰다.
“방패를 쥔 쥐는 어둠 속에서 감염을 퍼뜨리는 숨은 공작원들을 뜻하고, 그 옆에 흩어진 잘린 손과 칼, 그리고 주사위를 보게. 이 주사위 판을 정밀하게 관찰해보면 마주 보는 면의 합이 7이 되지 않고 1과 2가 바로 이웃해 있네. 머리에 횃불을 이고 있는 나체 여인 위의 주사위 역시 숫자 배치가 터무니없이 맞지 않는 가짜 주사위지. 판 자체가 조작된 완벽한 사기판이었던 거야. 정작 판에 뛰어든 인간들은 그것도 모른 채 인생과 영혼을 걸고 도박에 빠져들었고, 결국 심장을 빼앗긴 채 죽어가지. 저기 심장을 도려내 칼 끝에 꽂아 들고 의기양양하게 걸어가는 악마가 보이지 않는가? 욕망의 불꽃에 눈이 멀어 확률의 게임에 영혼을 내던진 자들의 처참한 패배라네.”
교수는 이어 어깨에 나무를 메고 가는 토끼와 거꾸로 매달린 사냥꾼을 가리켰다.
“토끼에게 짐승처럼 거꾸로 매달린 사냥꾼의 배에서 터져 나오는 저 불꽃을 보게나. 포식자와 피식자의 지배 구조가 완전히 뒤바뀐 혼돈, 그리고 배 속에서 폭발하는 불길은 사군툼의 용광로에서 시작된 원죄의 불꽃과 완벽히 연결되어 있지.”
에릭 교수가 말을 마치자, 제56A 전시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500년 전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가고일의 억압 속에서도 캔버스 전체에 인류를 향한 경고와 구원의 힌트를 가득 채워 넣었던 것이다.
“600Hz의 소음이 온 세상을 덮치고, 껍데기뿐인 나무 거인들이 거리를 메울 2037년…… 세바스티안, 우리는 반드시 이 캔버스 뒤에 숨겨진 진짜 주파수를 찾아내야 하네.”
스마트 안경 너머로 지옥도의 픽셀들이 푸른빛 미로의 좌표로 재편성되는 동안, 나무 거인의 텅 빈 몸통 안쪽에서 작은 빛의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Orignal copy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he_Garden_of_Earthly_Delights_by_Bosch_High_Resolutio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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