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로마의 인장 6권 : 침묵의 수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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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 2037 6권 : 로마의 인장 (6권 이동)
  
침묵의 수신기

로마 포로 로마노에서 세바스티안은 비베로스 정원에서 보았던 대리석 조각상인 엘 이돌로를 다시 생각했다. 
비베로스 정원(Jardines del Real)의 해 질 녘은 서늘한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세바스티안은 울창한 녹음 사이에서 마치 박제된 비명처럼 서 있는 대리석 조각상, '엘 이돌로(El Ídolo)' 앞에 멈춰 섰다.

사람들은 이것을 '우상'이라 부르며 그 매끄러운 피부의 곡선에 찬탄을 보냈지만, 세바스티안에게 그것은 전혀 다른 형상으로 읽혔다. 바르셀로나에서 보았던 리모나의 여인이 고통에 짓눌려 온몸을 웅크린 '소음의 흡수자'였다면, 카프루스의 이 여인은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들어 온몸으로 주파수를 수신하는 '열린 안테나'에 가까웠다.

세바스티안은 그렇게 느꼈다. 1911년 로마의 작업실에서 조각가 카프루스가 마주했던 것은 단순히 매끄러운 육체의 아름다움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빛보다 더 근원적인 무언가, 즉 태초부터 존재하는 신의 주파수를 담아낼 투명한 그릇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옷은 노이즈다. 가식도 소음이다."

조각가의 해묵은 문장 같기도, 혹은 세바스티안 자신의 뇌리 속 깊은 곳에서 깨어난 확신 같기도 한 환청이 귓가를 때렸다. 여인이 실조차 걸치지 않은 나신인 이유가 외설일 수 없는 까닭이었다. 한 올의 의복조차 주파수를 굴절시키는 소음이 될까 두려워 모든 인위적인 장식을 벗어던진, 가장 극단적인 수신 상태.

세바스티안은 소녀의 얼굴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두 손을 살며시 펼쳐 귀에 갖다 대고 눈을 감은 소녀의 표정은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 존재를 향해 열려 있는 모습이었다. 소녀의 대리석 피부는 정원의 미세한 바람을 안테나처럼 수신하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호세 카푸스 - 엘 이돌로]

그 순간 세바스티안은 깨달았다. 이 조각상이 '우상'이라 불린 이유는, 사람들이 그녀가 수신하는 본질이 아니라 그 본질을 담는 '그릇(육체)'의 아름다움만을 숭배했기 때문임을. 본질을 잃어버린 형상은 언제나 우상이 된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녀의 무릎 아래 새겨진 차가운 인장을 어루만졌다.

손가락이 돌의 표면에 닿았을 때, 정원의 미세한 소음들이 순간적으로 아득해지며 세바스티안의 지문을 타고 서늘한 진동이 번져나갔다. 그것은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망막 위로 선명하게 부상하는 기이한 숫자의 잔상이었다.

"54"

소녀의 대리석 손등에서 시작된 미세한 떨림이 그 숫자를 반복적으로 타전하고 있었다. 그 순간, 소녀의 감긴 눈꺼풀 너머로 또 다른 숫자가 겹쳐졌다.

"86"

그 숫자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경고하고 있는지, 어떤 운명과 연결되어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대리석 지각 아래서 솟구쳐 오르는 아득한 불협화음과 함께, 소녀가 100년의 시간을 뚫고 자신에게 무언가 거대한 경고를 타전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명백했다.

"아직 늦지 않았어."

환청이었을까. 세바스티안은 조각상의 무릎에서 손을 떼었지만, 손바닥에는 마치 오래 눌러 찍힌 인장처럼 두 숫자의 아릿한 감각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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