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 #보티첼리 #산드로보티첼리 #비너스와마르스
그림을 딱 봤을 때 누구의 그림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화가가 있다면 저는 딱 두 명을 꼽는 데 주저함이 없는데, 한 명은 샤갈이고 또 한 명은 오늘 그림의 작가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입니다.
샤갈은 왜 그런지 굳이 긴 설명드리지 않아도 다들 아실 것 같고, 보티첼리에 대해서만 말하면 그 특유의 여성의 신체를 표현함에 있어 유려한 선과 아련하고 우아한 인체 곡선미가 워낙 독보적이어서 멀리서 슬쩍 봐도 "아, 보티첼리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만들죠.
오늘 소개해 드릴 작품은 그런 보티첼리의 걸작 중 하나인 《비너스와 마르스(Venus and Mars)》입니다.
먼저 이 그림이 소장된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공식 그림 설명입니다.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약 1445년경–1510년
비너스와 마르스 (Venus and Mars)
1485년경
비너스는 옷을 입은 채 비스듬히 기대어, 정신을 똑바로 차린 상태로 알몸인 연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르스는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시끌벅적한 어린 사티로스들이나, 머리맡에서 윙윙거리는 말벌들조차 알아채지 못합니다. 이 곤충들(이탈리아어로 vespe)은 아마도 이 그림을 주문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베스푸치(Vespucci) 가문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고대 조각, 고전 회화, 그리고 당시의 시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남성과 여성의 성적 만족도(sexual satisfaction)에 대한 유머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한때 피렌체의 어느 침실 벽판에 맞춰 끼워져 있었습니다.
재료: 목판에 에그 템페라 및 유채 (Egg tempera and oil on wood)
구입: 1874년 구입 (Bought, 1874)
저는 여기서 이 구절이 눈에 확 들어오네요.
"남성과 여성의 성적 만족도(sexual satisfaction)에 대한 유머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
500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보티첼리가 슬쩍 숨겨둔 짓궂은 유머 코드가 저와 공명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나만 이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구나.' 괜히 안도감이 들면서 보티첼리와 묘한 동지 의식마저 생기더군요.
그림 오른쪽을 보면 '전쟁의 신'이라는 마르스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풀밭 위에 누워 있습니다. 단단한 근육질 몸매가 무색하게, 입을 살짝 벌린 채 영혼까지 탈탈 털린 표정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죠.
바로 옆에서 귀여운 아기 사티로스(숲의 정령)가 귀에 소라 나팔을 대고 귓전이 찢어져라 고함을 지르고 있는데도 코까지 드렁드렁 골며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제일 왼쪽에는 마르스의 투구를 푹 눌러쓴 아기 정령과, 마르스의 갑옷을 입고 노는 정령들의 모습이 너무나 귀엽고 해학적입니다.
제 눈에는 한동안 격정적인 장면이 끝나고 남자가 완전히 곯아떨어진 상황으로 보입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야외에서 그것도 벌집과 말벌이 코앞에 있는데도 얇은 천 조각 하나 깔아놓고 홀딱 벗고 사랑을 나누었을까요? 그런데 너무 격렬하게, 그리고 너무 급하게 사랑의 의식이 끝났나 봅니다.
아무리 세상을 호령하는 전쟁의 신이라 한들, 본능 앞에서 배터리가 방전되는 건 별수 없는 모양입니다.
반면 맞은편에 앉은 사랑의 여신 비너스를 봅시다.
머리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차분한 옷차림으로 마르스를 가만히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저는 비너스의 흐트러짐 없는 머리 모양을 보면서 이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비너스 입장에서는 격렬하고 적극적인 행동을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지극히 수동적인 위치에만 머물러야 했던 모양입니다. (수위 조절을 위해 비유적으로 쓰지만... 무슨 뜻인지 다들 아시죠? 참 배려심 없는 이기적인 마르스 같으니라고...)
그 눈빛을 유심히 살피면 사랑스러움이나 만족감보다는, 묘한 허탈감과 서늘함, 그리고 속터지는 불만이 은근하게 서려 있습니다. 특히 왼쪽 손을 보면 살짝 사타구니 위에 올리고 쓸어내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뭔가 아쉬움이 계속 남는 듯... 마치 속으로 이렇게 외치는 듯하죠.
"…벌써 다 끝난 거야?"
"난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는데..."
"혼자 저렇게 골아떨어져서 잘도 자는구나."
제게는 혼자 만족하고 곯아떨어진 마르스를 바라보는 씁쓸함과 어이없음이 그대로 담긴 표정처럼 읽혔습니다.
비너스의 아련하고 고상한 표정 뒤에는 바로 그 현실적인 '여성의 시선'이 절묘하게 깔려 있습니다.
사실 이 그림은 당시 피렌체 귀족 가문의 '신혼방 장식용 가구(침대나 옷장 등)'로 제작된 작품입니다.
신혼부부의 방에 걸어둘 그림에 보티첼리는 아주 센스 있는 해학을 담아낸 셈이죠.
사랑의 승리라는 거창한 신화적 테마 포장지 속에, '체력이 조기 소진된 남편'과 '여전히 차갑게 정돈되어 있는 아내'라는 남녀의 생리학적 차이와 부부 사이의 미묘한 심리를 뼈 있게 꼬아놓았습니다.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거창한 신화보다 마르스의 풀려버린 동공과 비너스의 차가운 눈빛, 그리고 미묘한 손끝과 단정한 머리 모양을 먼저 확인해 보세요. 500년 전 르네상스 거장이 던지는 유쾌하고 서늘한 위트에 절로 미소가 지어질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이 작품은 '사랑이 전쟁을 이긴다'는 르네상스의 상징을 담은 그림으로도 널리 해석됩니다. 하지만 미술 작품의 재미는 정답 하나를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화가가 남긴 힌트 위에서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발견하는 데 있는 것 아닐까요? 제게는 이 그림이 500년 전 보티첼리가 신혼부부를 위해 슬쩍 던져 놓은 짓궂은 농담처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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