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테오반고흐 : 《붉은 포도밭》- 안나 누님을 향한 테오의 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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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테오반고흐] 《붉은 포도밭》- 안나 누님을 향한 테오의 간구

Vincent van Gogh - Red Vineyard at Arles (1888) ]

1890년 브뤼셀, 20인회 전시회장 중앙 홀에서는 빈센트의 그림을 향해 "광인의 난도질", "정신병원 환자의 오물"이라며 귀족들과 비평가들의 서늘한 야유가 쏟아지고 있었다. 안나 보쉬 역시 화가로서 빈센트의 지나치게 강렬하고 강박적인 붓질에 거부감을 느끼며 캔버스 앞을 맴돌고 있었다. 이때 테오가 안나를 찾아 전시회장의 그늘진 회랑으로 걸어 들어갔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브뤼셀의 찬바람이 회랑의 가스등 불빛을 흔들었다. 테오는 바짝 말라붙은 입술을 타들어 가는 심정으로 삼키며 안나의 앞을 막아섰다.

화가이자 부유한 보쉬 가문의 영애, 그리고 빈센트와 둘도 없는 친구이자 테오와도 친분이 깊은 외젠 보쉬의 누나. 그녀는 테오에게 있어 파리의 냉정한 화상들과는 달랐다. 형의 그림 속에 봉인된 그 지독한 '영혼의 주파수'를 알아봐 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자 구원의 외줄이었다.

"안나 누님... 잠시만요. 단 5분만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안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벽면에 외롭게 걸린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붉은 포도밭》. 붉다 못해 땅속에서 핏물이 솟구쳐 오르는 듯한 아를의 언덕. 통제되지 않은 강렬함으로 눈이 시려오는 유화 물감의 육중한 덩어리들.

"테오, 미안하지만... 빈센트의 그림은 너무 과격해요. 물론 아름답기는 하지만... 마음을 불안하게 흔들어 놓는다고나 할까... 20인회 멤버들조차 이 작품을 전시회에 거는 것에 고개를 저었던 이유를 알겠어요."

그 순간, 평소 신사적이고 자존심 강하던 테오의 무릎이 꺾일 듯 휘청거렸다. 퀴랑베르 회랑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테오는 안나의 손을 잡아채듯 쥐었다. 그 떨리는 손끝에서 삶의 절벽 끝에 선 절박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안나 누님... 외젠의 친구이자 저의 단 하나뿐인 형, 빈센트를 위해 부탁드립니다. 이 그림은 그저 과격한 유화 덩어리가 아닙니다. 형이 1888년 가을, 아를에서 제게 보냈던 편지의 문장들을 기억하십니까?"

테오는 바래진 편지지를 떠올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형의 핏빛 소회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린 뒤 붉고 보랏빛으로 물든 포도밭이었단다. 황혼의 노란 빛 속에서 땅은 보라색으로 젖어 있었고, 초록색과 노란색 포도잎들이 가을의 태양 아래 타오르고 있었어...' 누님, 형이 석양 아래서 손가락 마디마디가 터져 나가라 흙을 움켜쥐며 하나님께 올려보낸 '핏빛 기도'였습니다."

테오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파리의 그 어떤 거만한 억만장자 앞에서도 절대 흘리지 않으려 잇새를 악물었던 눈물이었다. 전시장의 서늘한 공기 속으로 그의 오열이 낮게 울려 퍼졌다.

"아무도 사주지 않아도 됩니다. 이 미친 듯한 빛의 가치를 몰라봐도 견딜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형이 목숨을 바쳐 캔버스에 새겨넣은 이 빛을 자신의 집 안에 들여놓아 준다면... 생전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그림이 누군가에게 구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형이 알 수만 있다면... 저는 내일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테오..."

"형이 원하는 가격은 400프랑이지만, 400프랑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누님께서 내실 수 있는 만큼만 내주십시오. 모자라는 금액은 제 월급을 털어서라도 갤러리 장부에 채워 넣겠습니다. 제발... 아를의 어둠 속에 갇힌 형에게 살아갈 명분을 주십시오. 형이 하나님과 이 세상에 버림받지 않았다는 증거를... 안나 누님, 당신의 손으로 보여주십시오..."

파리의 화랑가에서 뼈가 굵은 베테랑 화상 테오 반 고흐가, 친한 누님이자 동료 화가인 안나 보쉬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통곡하며 사정하고 있었다. 자신의 자존심도, 화상으로서의 체면도 모두 흙바닥에 내팽개친 채. 오직 아를의 어두운 병실에서 시들어가는 형 빈센트에게 '살아야 할 한 줌의 이유'를 쥐어주기 위해서.

안나는 오열하는 테오의 머리 위로, 황혼의 빛으로 붉게 타오르는 포도밭 캔버스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석양에 젖어 드는 농부들의 굽은 등과 붉은 대지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공명하고 있었다. 포도밭의 농부들이 안나를 부르는 환상이 환각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떨리는 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400프랑에 한 푼도 깎지 않고 그 가격대로 제가 사겠어요, 테오. 타인에게는 기괴하고 과격해 보일지 몰라도, 이 캔버스 속에는 마법 같은 강렬함과 붓끝에서 느껴지는 진실된 영혼의 고통이 담겨 있군요. 이 눈부신 빛을 결코 외면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앞으로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빈센트보다 테오 당신이 흘린 이 눈물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네요."

안나는 《붉은 포도밭》 우측에서 자신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농부의 환영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날 밤, 브뤼셀의 숙소로 돌아온 안나 보쉬는 펜을 들고 어머니에게 띄울 편지를 써 내려갔다. 테오의 눈물과 캔버스 속 타오르는 포도밭의 잔상이 여전히 눈앞에 가득했다.

"어머니, 저는 오늘 브뤼셀 전시회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붉은 포도밭》을 구매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그의 그림은 기괴하고 과격한 정신병자의 일탈처럼 보일지 모르나, 저는 그 캔버스 안에서 마법 같은 강렬함과 붓끝마다 배어있는 진실된 영혼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지키기 위해 눈물을 흘리던 동생 테오의 절박함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 그림은 단순한 유화가 아니라, 한 인간이 목숨을 바쳐 남긴 빛의 유산입니다."

며칠 뒤, 생레미의 어두운 병실. 빈센트는 테오가 보낸 긴급 편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사랑하는 형, 브뤼셀 전시회에서 기쁜 소식이 도착했어! 20인회 회원인 안나  누님이 형의 《붉은 포도밭》을 400프랑에 구매했어. 이로써 형의 작품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거야."

창밖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빈센트는 앙상하게 마른 손으로 답장을 써 내려갔다. 편지지는 그가 흘린 감격의 눈물로 타들어 가듯 젖어 들고 있었다.

"안나 누님이 내 그림을 샀다는 소식을 들으니 정말 기쁘구나. 나보다 훨씬 가난한 이웃들과 농부들을 생각하면 400프랑이라는 돈은 내게 너무나 거금처럼 느껴지는구나. 하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내 그림의 가치를 알고 자신의 집에 걸어두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 내 마음속 깊은 어둠을 조금은 몰아내 주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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