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PROJECT2037 #발렌시아 #발렌시아의인장 #1권 #스카프 #사군토
PROJECT 2037 제1권: 발렌시아의 인장
5-5장: 사군토의 깨달음
사군토성의 6월은 정수리를 쪼개듯 뜨거웠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발렌시아 특유의 습기를 머금은 열기가 맹렬한 햇빛과 섞여 로마 원형극장 유적지 전체를 거대한 화덕처럼 달구고 있었다.
세바스티안은 산비탈을 따라 굽이치는 석조 성벽과, 고대 로마의 관람석 위에 덧씌워진 현대적인 마감 벽체를 내려다보며 타들어 가는 입술을 침으로 적셨다. 일년이었다. 이 유적지 발굴 책임을 맡아 흙바람을 마신 지 햇수로 일년이 흘렀지만, 성과는 제로에 가까웠다. 시청 담당자의 독촉 전화는 매일같이 걸려왔고, 자금을 대던 후원 기업은 이번 주를 마지막으로 투자 철회를 통보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몇달 전 지표투과레이더(GPR) 탐사를 통해 유적지 최하층부에서 거대한 암반 동공(空洞)이 발견된 것이 화근이었다. 그 공간에 접근하려면 복원된 무대 벽면과 관람용 콘크리트 및 철제 구조물을 전부 철거해야 했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만약 구조물을 다 들어내고 들어갔는데, 그저 세월이 만들어낸 단순한 지하수 침식 동공에 불과하다면? 그 책임을 온전히 뒤집어쓰고 매장당하는 사람은 세바스티안 자신이었다.
"더는 방법이 없어..."
포기할지, 아니면 모든 비난을 감수하고 철거 강행을 요청할지 결정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6개월 넘게 이어진 교착 상태는 그를 낭떠러지 끝으로 몰아넣었다.
세바스티안은 자리를 지키던 인부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땡볕이 내리쬐는 발굴 현장 한가운데, 반원형 관람석 계단 밑 흙바닥에 그는 무릎을 굴복시켰다. 학자로서의 자존심도, 기획자로서의 야망도 모두 내려놓았다.
그는 바닥에 코를 박듯 엎드렸다. 양팔도 앞으로 쫙 펴서 완전히 11자를 만들었다. 완전히 항복했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입안으로 뜨겁고 매캐한 흙먼지가 들어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땀방울이 눈을 찔러 시려왔지만, 머리에 두른 스카프만이 유일하게 정수리의 열기를 막아주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현장으로 출발하던 날 아침, "스페인 볕이 얼마나 무서운데요" 하며 다정하게 머리에 씌워준 비단 스카프였다.
세바스티안은 땅에 코를 대고 속으로 읊조렸다. 기도가 아닌, 절망의 비명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위가 고요해지고 정적만이 맴돌던 그 순간, 대지 밑바닥에서 미세한 떨림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웅— 웅—
기계의 진동이 아니었다. 지하 깊은 곳, 인간의 장비가 간신히 존재만 확인했던 그 암반 동공에서 전해오는 진동. 그것은 끔찍한 불협화음이 아니었다. 세바스티안의 온 신경을 일깨우는 완벽한 하모니, 그가 그토록 추적해 오던 성배의 주파수였다.
대지 깊은 곳에 갇혀 있던 거대한 울림이 그의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뼈가 울리고, 몸 전체가 그 거룩한 울림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앗..."
얼굴에 범벅이 된 땀과 흙을 닦아내기 위해, 세바스티안은 무심결에 머리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풀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공명음이 뚝 끊겼다.
귀를 찌르던 완벽한 하모니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사군토의 매마른 바람 소리와 땡볕의 정적만이 남았다. 세바스티안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손에 쥐인 스카프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스카프를 머리에 고정하고 흙바닥에 손을 얹었다.
웅—
다시 공명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기계적인 안테나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된 현악기가 그러하듯, 인간의 나약한 육체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대지의 진동을 안전하게 낮추어 전달해 주는 조율자의 역할이었다. 성배가 거대한 악기라면, 세바스티안은 연주자였고, 이 비단은 뜨거운 현을 짚어내는 감싸안음이었다.
에너지는 점차 세바스티안의 육체로 빠져나가며, 대지 밑바닥의 울림도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하지만 성배의 주파수를 흡수할때마다 그의 눈 특히 왼쪽눈에 통증이 시작되었고, 그와 함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평상시 미술관을 돌면서 명화를 보면서 느꼈던 통증과는 다른 스케일의 통증이었다. 동시에 그를 옥죄던 지난 일년의 포기와 절망, 자책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었다. 오히려 세바스티안의 육체는 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진실을 깨달았다. 이곳은 더 이상 발굴할 필요가 없다는 것.
고고학자의 세계에서는 유물이 눈앞에 드러나야 성공이었다. 그러나 성배를 쫓는 이 오래된 세계의 법칙은 정반대였다. 사람이 유물을 찾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유물이 자신의 그릇을 알아보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었다. 성배의 유산은 이미 제 할 일을 다 했고, 그 소리는 그의 육체 속에 아픔을 남기며 깊이 각인되었다.
세바스티안은 서둘러 현장 사무실로 돌아가 발굴 일지를 작성했다. 펜 끝은 망설임이 없었다.
[사군토 로마 원형극장 하부 지층 최종 보고]
지표투과레이더(GPR) 및 초음파 비파괴 탐상 결과, 하부 동공은 자연적인 지하수 침식에 의해 형성된 단순 암반 지형으로 판단됨. 고고학적 유구·유물의 존재를 시사하는 이상 징후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상부 유적 보호 및 비용 대비 학술적 기대효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추가 발굴 작업을 최종 중단함.
일년이라는 긴 시간과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도 '아무 소득 없이 끝난 실패작'. 시청과 후원회는 혀를 차겠지만, 가방을 둘러메고 현장을 나서는 세바스티안의 발걸음은 하늘을 날 것처럼 가벼웠다.
발렌시아 대학교 연구실의 문을 열었을 때, 익숙한 고서와 묵은 종이 냄새가 세바스티안을 반겼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노교수가 안경 너머로 그를 바라보았다.
20여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진한 갈색 머리채를 자랑하던 에릭 교수는 어느덧 머리칼 대부분이 희끗희끗해져 있었다.
"교수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오, 세바스티안! 자네가 어쩐 일인가?"
"지척에 계신데도 바쁘다는 핑계로 일년에 식사 한 번 대접해 드리기가 힘드네요. 조만간 식사라도 근사하게 하시죠."
제자의 제안에 노교수는 허허 웃으며 안경을 벗었다.
"나야 뭐, 이제 은퇴할 시점이 다 되어서 시간이 넘쳐난다네. 언제든지 불러만 주게나."
세바스티안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뒤, 표정을 정색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교수님... 실은 오늘 사군토성 로마 유적지 현장에서 아주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유적지 지하 깊은 곳에서 분명 성배의 주파수를 느꼈는데, 이상하게도 이 비단 스카프를 쓸 때와 안 쓸 때 반응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 스카프가 거친 진동을 누르고 제 몸으로 완충해 주었습니다."
그 순간, 에릭 교수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찰나의 흔들림이었지만 세바스티안은 스승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세바스티안이 나직하게 물었다.
"교수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무엇을 말인가?"
"이 스카프가 대체 무엇인지요."
에릭 교수는 차분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 모금 목을 축인 뒤, 제자를 향해 깊은 눈빛을 건넸다.
"...알고 있었다면 자네에게 미리 말했을까?"
질문인지 회피인지 모를 스승의 대답에 방 안에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에릭 교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사군토가 고대부터 비단의 도시였다는 역사적 기록은 남아 있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비단이 단순히 왕과 귀족들의 화려한 옷감이었다고만 생각하지. 성배 파편의 진실을 간직해 온 옛 장인들은 알고 있었네. 실이란 것은 단순한 섬유가 아니라, 거룩한 진동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것을. 그중에서도 성배의 비밀을 아는 농부가 만든 명주실 비단은… 인간의 몸이 감당할 수 없는 거친 소리를 나지막이 조율해 주는 유일한 완충재라네."
에릭 교수가 세바스티안의 손에 쥐인 스카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런 희귀한 물건이… 대체 어떻게 자네 손에 들어갔단 말인가?"
"아내가… 재래시장에서 그냥 예뻐서 샀다고 했습니다."
세바스티안의 대답에 에릭 교수는 찻잔을 들려던 손을 멈칫했다.
"시장에서…?"
스승은 더 이상 물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방 안의 공기를 더욱 차갑게 가라앉혔다.
올리비아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세바스티안은 손끝에 닿는 비단의 결을 가만히 문질렀다. 올리비아는 평범한 수학 교사였다. 평소 사치와는 거리가 멀고, 직조나 섬유의 역사는커녕 숫자와 도형의 질서만을 신뢰하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왜 하필 그날, 수많은 상점이 늘어선 왁자지껄한 재래시장에서 먼지 쌓인 가판대 구석의 비단 조각에 시선을 빼앗겼을까. 왜 하필 현장으로 떠나는 그날 아침, "스페인 볕이 무섭다"며 다정하게 그 비단을 자신의 머리에 씌워주었을까.
비단장수조차 그 가치를 몰라 몇 유로에 던져두었던 물건. 아무것도 모르고 끌리듯 그것을 집어 든 올리비아. 그리고 마침내 세바스티안의 머리에 얹어져 대지의 비명을 완충해 낸 순간까지.
이 모든 것이 정말 순전한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이 비단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을 찾아 움직인 것일까.
"알겠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가슴 한구석을 채우는 알 수 없는 소름과 묵직한 의문을 안은 채, 세바스티안은 에릭 교수의 연구실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발렌시아의 노을빛이 그가 손에 쥔 사군토 비단 스카프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사군토에서 찾은 것은 땅속에 묻힌 차가운 유물이 아니었다. 세바스티안이라는 나약한 인간이 거대한 주파수를 견뎌낼 수 있도록, 이미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던 오래된 기억이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