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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라이프 #스페인 #까스떼용 #모레야 #엘시드 #체시나
바위 산 위의 전설과 골목길의 빵 한 조각
스페인 발렌시아 지방 북부, 까스떼용의 험준한 산악 지대를 거쳐 들어설 때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모레야(Morella)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배가 떠 있는 것 같다. 해발 1,000미터가 넘는 매스트라즈고의 바위산 정상에 왕관처럼 올려진 성채와 겹겹이 싸인 성벽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현실 세계의 지도가 끝나는 지점에 서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이 거친 바위 도시는 수많은 역사적 전설을 품고 있다. 11세기, 스페인의 국보급 영웅 엘 시드(El Cid)가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6세에게 불의의 추방을 당한 뒤,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의 경계를 넘나들며 전무후무한 전설을 써 내려가던 시기에 중요한 무대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었다. 1084년 모레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엘 시드의 거친 숨결은, 지금도 이 성벽을 스쳐 지나가는 차가운 산바람 속에 남아 있는 듯하다.
[엘 시드의 무용담]
훗날 19세기 카를리스타 전쟁 당시 '모레야의 호랑이'라 불리던 라몬 카브레라 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항전했던 잔혹하고도 뜨거운 역사는 산타 마리아 라 마요르 성당의 고요한 돌벽마다 묵직한 채색을 입혀 놓았다.
그러나 아무리 거룩하고 압도적인 성벽의 위용이라 할지라도, 여행자의 발길을 진짜 모레야의 깊은 속살로 이끄는 것은 그 거대한 역사의 그늘 아래 뻗어 있는 좁고 서늘한 수직의 돌계단 골목길이다. 남들이 다 아는 성채 이야기와 영웅의 전설을 뒤로하고 가파른 골목으로 하산할 때, 피부를 스치는 고산지대의 서늘한 공기와 집집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장작 타는 냄새는 오감을 일깨운다.
그 골목길 어귀 제빵소에서 안아 든 모레야의 전통 빵(Pan de Morella)은 단연 압도적이다. 가보지 않은 이에게 설명하기 힘든, 거대한 크기와 기와장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겉껍질을 자랑한다. 혹독한 고산 지대의 추위와 험준한 지형 속에서 며칠 동안 두고 먹어도 속살의 수분을 잃지 않도록 구워낸 이 투박한 빵은 이 땅 사람들의 삶의 지혜이자 야생의 결정체다. 실제로 이 빵 이틀이나 먹었다. 손끝으로 힘을 주어 껍질을 부수면 바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수한 밀 향이 코끝에 번진다.
바위산 비탈의 풀과 허브를 먹고 자란 염소의 젖으로 만든 알싸하고 진한 치즈를 얹어 맛을 본다. 그리고 골목 안 상점에 들러 모레야의 명물인 소고기 육포 '체시나(Cecina)' 앞에 선다. 평소 발렌시아 시내 마트에서도 가끔 포장된 제품을 보기는 하지만, 하몽처럼 흔하지도 않고 직접 썰어 시식할 기회도 없어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발렌시아에서는 접하기 힘든 음식이고 여기서는 명물이라기에 내심 탐이 났지만, 주인이 건네준 시식용 한 점을 입에 넣는 순간 마음이 싹 달라졌다. 차고 건조한 산지의 바람과 오크나무 연기 속에서 푹 숙성된 체시나였다. 부드럽고 고소한 하몽의 결에 길들여진 내 입맛에 체시나는 상당히 억셌다. 씹을수록 터져 나오는 소고기의 육향은 어찌나 강렬하던지. 욕심내어 사봤자 다 먹지도 못할 게 분명해 아쉽지만 시식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하지만 평소 질긴 소고기 육포의 깊은 풍미를 즐기는 이에게는 이만한 별미도 없을 듯하다.
그리고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결국 여행자의 발걸음은 모레야의 중심인 산타 마리아 성당 앞에서 멈춘다. 이 성당은 겉모습과 내부 모습 모두 상당히 화려하다.
[산타 마리아 성당 외관]
하지만 발렌시아 라 론하의 가고일을 모티프로 하여 소설을 구상중인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 교회 입구에 있는 이런 가고일 조각에 더 관심이 간다. 세월에 닳고 깨진 모습이 오히려 가고일 특유의 기괴한 생명감을 더해 준다.산타 마리아 성당을 한번 휙 둘러보고는 모레야 성채를 올라가 본다.올라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유럽의 아름다운 중세 마을로 손꼽히는 곳이라 들었지만, 막상 성채를 오르는 길은 놀랄 만큼 한산했다.
위에 올라가서 내려다 보면 이렇다. 투우장도 보인다. 스페인 중소도시 곳곳에 이런 투우장이 있다.
위 사진은 중세 시절의 모레야를 재현한 축소 모형이다. 놀랍게도 오늘날의 도시 풍경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골목길을 구석구석 찍지는 못했지만 빵을 굽고 트러플을 캐고 꿀을 채취하고 염소 치즈를 만들고 소고기로 체시나를 만드는 그들의 생활은 오랫동안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웅장한 전설 위에 소박한 일상의 온기를 얹어 낸 이 아름다운 바위 도시의 여운은, 차마 다 품지 못하고 입안에만 감돌다 사라진 체시나의 강렬한 향처럼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 혀끝을 강렬하게 때리던 진한 훈연 향의 체시나와 알싸한 염소 치즈, 그리고 거대한 빵의 풍미가 어우러지던 그 순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칼바람이 몰아치던 영웅들의 전쟁터에서 끝내 살아남아 오늘의 모레야를 지켜 낸 것은, 성벽도 전설도 아니었다. 거대한 빵 한 덩이와 알싸한 치즈, 그리고 강렬한 체시나 같은 삶의 양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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